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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ree Baik 애리백 Mar 29. 2020

<랩 걸> 결의에 찬 소녀가 과학자로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1부]

E는 내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을 건넸다. <랩 걸>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읽었던지 겉장의 테두리가 닳아 부드럽게 말려있었다. 책을 전달받은 후 돌아오는 길, 기다리지 못하고 표지를 넘겨보았다. 지나가던 담장에 잠깐 기댄 채 책을 내려다봤다. 식물 세밀화가 그려진 아름다운 표지였다. 첫 장을 펼쳤을 때 나는 벌써 직감했다. 내가 이 책을 분명 좋아하리라는 것을. 첫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은 어머니께 바치는 것이다.’

곧이어 페이지를 몇 장 더 넘기자 이 같은 문장이 나왔다. “더 많은 것을 만져보고 배우고, 그들의 이름과 용도를 알아갈수록 나는 더 기쁨에 넘쳤다. 그렇게 얻은 자신감은 내가 세상과 밀접히 관계 맺은 존재라는 느낌을 강하게 만들어갔다. - 헬렌 켈러” 
가슴이 환기되는 느낌이었다.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기쁨은 자신이 갖고 있는 내면의 힘을 확인하게 해 준다.

<랩 걸>의 저자인 과학자 호프 자런은 아주 어린 시절 미네소타에 있는 아버지의 연구소를 놀이터 삼아 자랐다. 실험기구가 가득 들어있는 아버지의 연구실, 그곳의 서랍장을 모두 하나씩 열어보고는 그 안에 들어있던 신기한 과학 도구들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던 에피소드로부터 이 책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북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가난하고도,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한 집안에서 그는 오히려 엄청난 이야기꾼으로 자라난다. 나는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다. 어떻게 표현에 폐쇄적인 가풍 속에서 자라난 인물이 이토록 표현력이 풍성하고 문학에 깊은 조예를 품고 있는 인물로 성장했을까? 서사를 이끌어가는 탄력성으로 자신의 스토리와 더불어 우리를 자연 깊숙이, 실험실 안으로, 때로는 흙을 만지며 땅을 파고 구덩이 속으로, 이끼를 밟고 앉아 있는 축축한 바지단 속으로 자꾸 끌어당긴다는 데 글의 큰 매력이 있었다. 침묵에서 자라난 스토리텔러의 탄생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곧 알게 된다. 그의 글에는 생동감이 있어서 실험실과 현장의 에피소드마다 마치 흙의 질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친구에게 내 친구를’ 소개해주고 싶다던 E가 아니었다면 직접 서점의 매대에서 결코 집어 들지 않을 책이었다. 난 지금껏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아무튼 식물에 큰 관심을 주지 않고 살아왔다. 오로지 나의 관심은 ‘인간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랩 걸은 프롤로그부터 단숨에 나를 과학자로 만들어 놓았다. 식물은 고사하고 방 안에 들여놓은 화분을 모두 말려 죽이는 ‘파괴 왕’인 나를 자연에 머물게 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살아있는 존재들에게 시선을 두게 하고, 씨앗의 성장기를 상상하게 하고, 지평선과 모래의 빛깔을 관찰하게 만들었다. 책을 읽다가도 이따금씩 창문을 내다보았다.

내가 지나온 풍경이 생명력을 얻어 호흡을 받아 살아났다. ‘아, 프랑스 보르도 여행에서 포도밭을 산책하며 발견한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던 매듭이 생각나네?’ 급기야 켜켜이 감추어진 채 변모해가고 있는 옥수수가 저 두터운 옥수수단 안에서 커가는 소리가 궁금할 지경에 이르렀다. 어떻게? 책을 읽으며 내가 변하는 모습에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내 비위를 맞춰준다 셈 치고 잠깐만 창문을 보자. (중략) 초록색이 보이는지? (중략) 이제 시선을 이파리 하나에 집중해보자. 정확히 어떤 종류의 초록색인가? 뾰족뾰족한가? 싱싱한가? 잎은 얼마나 큰가? 하찮은 잎인가? 살아있나? 왜? 
자, 당신은 이제 과학자다.” 

과학자가 할 일은 질문을 하는 일이고, 이미 창문 밖을 바라보며 눈에 보이는 초록 식물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으니 ‘당신은 과학자’라며 내게 별안간 역할을 부여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의 역할놀이에 이끌려 가게 되었다. 갑자기 식물의 삶에 개입하게 되었다. 자연의 숨이 궁금해지기 시작한 그 순간이었다. 살아있는 어떤 것도 길러본 적이 없던 내게 이건 큰 장면 전환이다. 꽃을 피우던 튼튼한 선인장도 내 방에서는 하얗게 표백되어 말라죽어나갔기 때문에 가족들은 내가 꽃화분 선물을 받아 올 때마다 어김없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내게 이 같은 역할놀이는 그의 인문학적인 시선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또한 작가는 자신을 나른하게 미화하지 않으며 땅에 발을 딛고 있는 강력한 말의 소유자여서 나는 더욱 그의 스토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 중에도 어디든 앉아 <랩 걸>을 펼쳐 읽었다.


호프 자런의 유년 시절은 마치 소설처럼 펼쳐진다.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는 1880년경에 시작된 노르웨이의 집단 이민의 일부로 미네소타에 들어온다. 1년 동안 9개월은 눈이 쌓일 만큼 추운 동네인 미네소타에서 돼지 배를 가르는 공장에 정착한 가족은 부유하게 사는 삶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검소한 문화에서 표현에 꽤나 인색한 가족들에 대해 호프 자런은 이렇게 묘사한다. “식량을 비롯한 자원이 점점 고갈되어가는 길고도 어두운 겨울을 지나면서, 불필요하게 서로를 죽이는 일을 피하기 위해 침묵을 지켜야 했던 옛 바이킹 생존 전략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경상북도에 본가를 두고 있는 우리집도 서로에게 무례를 마음껏 표시하며 자신의 생존을 목표했는지도 모르겠다.

곧이어 나는 과학자 호프 자런이 갖고 있는 스토리 텔러로서의 재능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게 된다. 바로 그의 엄마였다. 어렸을 때 마을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영리한 소녀’였던. 1951년의 미국 대학은 돈 있는 남성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고 그 조건에 부합하지 못했던 호프 자런의 엄마는 네 아이를 낳은 후 미네소타 대학에 다시 등록한다. 대학 화학과를 다니다가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그만둔 이후 자그마치 20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엄마는 유치원생인 호프와 함께 초서를 읽었고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주방 테이블에 앉아 꼼꼼하게 인물 카드를 만들었다. “엄마는 책을 읽는 것도 일종의 노동이며, 각 문단마다 분투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나는 그런 식으로 어려운 책을 흡수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는 동안 그는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생각이 조숙하며 상냥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제적 인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아이는 굴복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비로소 ‘어린 여자아이에서 과학자로 변신했다.’

오빠들에게는 과학실이 그들의 현실이었고 쉽게 입장할 수 있는 일상이며 보이스카웃에서 하는 활동들이 실험과 모험의 연장선상에 있었지만 5살의 호프 자런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섯 살 때 나는 내가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집을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아버지의 실험실을 나가는 순간 세상은 자신을 여자 아이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이 표현을 읽으며 나는 빛이 그를 어디로 이끌었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몸집은 작지만 결의에 찬 소녀였던 나는 나의 일부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법을 배우면서도 나의 본질을 배반하지 않기 위한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길을 걸었다.’ ‘과학자가 되고자 하는 내 욕망의 근본은 깊은 본능에 토대를 두고 있었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 번도 살아있는 여성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그런 사람을 만나본 적도, 심지어 텔레비전에서 본 적도 없었다.’



그의 여성성은 에피소드마다 매우 논리적이고 꽤나 감정적이면서도 더욱 큰 열정으로 모아진다. 실험을 하고 보고서를 쓰고 누구도 해내지 못할 발견을 해도 왜소하고 어려 보이는 외모 때문에 학회에서도 동료 과학자로 동등하게 취급받지 못한다. 강박증이 심해져 자신의 손등을 이로 깨무는 버릇 때문에 급기야 손등에 차오르는 피를 쭉쭉 빨아먹는다. 초조함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쓴다. 이토록 유머러스하고 재능 있고 특출 난 인간이 자신의 여성성을 가감 없이 유지하면서도 타인에게서 느껴지는 비뚤어진 여성관을 뛰어넘고자 분투하는 모습이 내게 위로가 되었다는 것은 나에게도 실재하는 어떤 절망의 경험이 여전히 아프게 각인되어 있다는 뜻이리라. 

안전함을 느끼는 환경, 오롯이 나 자신으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실험실’이 되었다고 서술하는 장면에서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랩 걸>. 사람은 식물과 같아서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설명을 하며 그는 자신을 향해 따뜻하게 쪼아 내리는 빛, 과학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곧이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자런 실험실’을 자신의 집이라 말했다. 그곳에서 최고의 연구 파트너 ‘빌’과 고생을 해가며 중고 물품들로 하나씩 실험실을 채워나간다. 때로는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실험 계획을 세워가며 조울증 약을 먹기도 한다.

여성과학자로서의 대서사를 펼치기 전에 나는 그의 마음 설명서를 들추어본 기분이 들었다. 아, 첫 챕터의 제목이 그래서 <뿌리와 이파리>였나 보다. 실험실이라는 공간은 호프가 글을 쓰는 작업실이기도 하다. ‘모든 역사를 왜곡해서 최종 보고서를 쓰는 것’, 그리고 어쩌면 내가 현재 읽고 있는 이 문장들을 쓴 장소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삶을 살고 있는 나무의 스토리를 쓰기도 하고 여전히 분투하고 있는 자신을 오롯이 받아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의 우주를 나는 자꾸 상상하게 되었다. 끈질기게 살아남아주기를 응원하며 지키고 서서 관찰하던 나무 한 그루가 마음처럼 지탱해주지 않던 순간 너무나 속이 상한 나머지 ‘그런 나무의 태도에 나는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기도 하는 엉뚱한 과학자, 자신의 실험실 속 주인공이 된 모든 식물을 순식간에 의인화하여 책을 읽어 내려가는 내게도 식물들의 안위와 감정을 꽤나 걱정하게 만든 인물, 호프 자런.

호프 자런은 평범하지 않았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외롭고 엉뚱하고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며 누구보다 총명한 사람의 성장기를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어린 나이에 박사가 되어 조교수 자리를 얻고 대학 연구관 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세 개의 실험실을 지금까지 만들어내면서 그는 빈 방에 에너지와 온기를 넣었다. 나는 별안간 나의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내 에너지와 온기가 이곳에 존재하는가.’ 사람들로부터 받은 좋은 기운과 빛을 이곳에 긍정적으로 꺼내놓고 있는지 나의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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