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eree Baik 애리백 Apr 19. 2020

<랩 걸> 산만한 독서 노트: 나를 움직인 문장들

생각과 단상, 기록하고 지속하기

25p. “겨울로 잠수했다가 다시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 자체가 우리 삶의 추동력이 된 리듬이었다. 어릴 적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여름 세상이 죽는 것을 목격하면서 수없이 얼음의 시련을 견뎌낸 지혜로 언젠가 여름이 다시 부활하는 것을 확신하며 살아갈 거라고 믿었다.”

숲과 이파리의 존재와 관계, 나의 영양공급원은 무엇일까. 식물을 의인화하는 서술이 눈에 띈다. 언젠가 나의 분야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쓸 때에도 구현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갖는 애정, 관심은 사람뿐 아니라 식물에게 더욱 해당되었다.

한 장면으로 시작하는 인상적인 인트로. 상상력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엄마가 떠준 스웨터 따뜻한 촉감, 이 작가는 분위기를 오감으로 설명한다. e.g. 톱밥 냄새. 아름다와서 생경한 것이 문학, 그리고 번역.

식물학자만의 표현력, 환경을 묘사할 때 등장하는 단어들의 예시: ‘봄이 되어 녹아내린 땅, 초콜릿 케이크 같은 흙, 지렁이의 기쁜 몸짓’ 사람을 묘사할 때 등장하는 표현들: “엄마는 토마토의 가지를 쳐주는데 필요한 시간이나 참을성이 없어 스스로 해결하는 무나 당근을 선호했다.” “엄마와 딸로 산다는 것은 뭔지 모를 원인으로 늘 실패로 끝나고 마는 실험을 하는 느낌이었다.”

“두 가지 이야기가 자라났다. 내가 써야 하는 이야기와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
36p. “내가 따르는 의식들이 있다 친구들이 각자 생각에 잠길 수 있도록 가만히 놔둬야 하는지를 나는 안다.” “내 실험실은 도피처이자 망명처이다. 갑옷을 정비할 수 있는 곳.”

‘몽상에 가까운 계획 -> 있는 대로 윤색 -> 가능성과 불가능의 경계로 -> 모든 역사를 왜곡해서 최종보고서’ 웃음이 난다. 나도 이렇게 일하는데.

‘씨앗’ 남는 시간에 뭐라도 해야 하는 열정적인 인간 ‘에너지를 태워야’ 직성이 풀리는.
117p. ‘방지할 수 없는 불운은 견뎌내야 하고.’

불안과 초조감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습관, 손등을 깨물어 입으로 쭉쭉 빤다 피 맛이 날 때까지. 언제나 계획하고 꿈꿔왔던 실험실과 비교하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그걸 언제든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옆에서 알려주는 실험 파트너와 함께 한다. 확실한 친구. 실험실 기구들이 상자 안에 모두 꽉 차 있었지만 실험실을 친구와 꾸려보고 싶어서 상자도 열지 않고 결국 몇 달을 기다린다.


미술관 카페, 책을 읽는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실험실에서 새로운 대단한 발견을 하고 획기적인 연구 실적이 될만한 결과가 도출되었을 때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그 순간을 온몸으로 흡수했다.” ‘이제는 아는 여성들처럼 될 기회를 공식적으로 놓쳤다는 생각’ 약간의 외로움을 겪는다. ‘곰팡이와 식물의 깊고도 지속적인 평화협정’ 곰팡이와 나무, 두 생명체는 서로 돕는다.

미래가 불투명한 과학자는 동물원의 고릴라를 보며 자신의 상황을 대입한다. ‘총이 있다면 자살했을 법한 고약한 속박’ 젊은 교수는 현장학습을 다니며 학생들과 성장을 계속한다.

174p. 단풍나무의 경영 전략, 연간 예산의 지배 ‘나무의 유일한 에너지원은 태양이다.’ 학계 과학자의 삶은 3년 예산의 지배를 받는다는 경영자로서의 자기 고민을 꺼내놓으며 단풍나무의 생애를 말하는 과학자 호프 자런, 과연 이야기꾼이다. 단풍의 이파리를 설명한다. 높은 가지는 작고, 낮은 가지는 크고, 왜냐면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단풍나무가 경영을 했기 때문이다. 함께 하는 연구자 빌의 생계를 항상 걱정한다. 글 속에 등장하는 미지의 제3자를 묘사할 때 발화자의 주어 ‘그녀는’ she, 호프 자런이 제시하는 과학자의 기본값은 남자가 아니다. 반갑다.

“덩굴은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살아간다. 투쟁을 한다. 그들은 숲의 규칙에 따르지 않는다. 힘을 제공해 줄 수 있는 틀을 미친 듯이 찾는다.” 흠.. 이거 마음에 든다. 악력과 뻔뻔스러움.
“덩굴 식물들이 사악하거나 해로운 존재는 아니다. 다만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야심찰뿐이다. 그들은 지구 상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식물들이다.”
182p. “우리는 잡초의 대담성에 화를 내지 않는다. 모든 씨앗은 대담하기 때문이다.”

185p.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나는 앞서 나갈 수가 없었다.” “나는 손톱을 공격적으로 물어뜯으며 매일 시간을 보냈다.” 연구자, 과학자, 교수로서 젊은 여성이 학회 뷔페에서 느끼는 불쾌한 경험들, 불안한 시간들이 보인다. 가까운 자리에서 함께 해주는 연구 파트너가 있다는 것을 늘 상기한다. ‘나를 핵심 멤버로 인정해주는 곳이 어딘가에 있다’는 그런 생각을 계속 읊조린다.

작가가 붙들고 있는 여성성을 전면에 놓은 고민들이 내게도 해당된다. ‘걷잡을 수 없이 다가오는 폐경기에 대한 플랜 B’ 거들을 입지 않는다고 수군대는 여비서들의 가십이 들린다. 더욱 무모하게 더욱 무책임하게 몰아붙이며 연구를 진행한다. 기름 탱크를 가득 채워서 학생들을 싣고 장장 50시간을 넘어가는 학회에 가기로 한다. 절박한 시절에는 모든 기준이 연구비로 점철된다.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난다.   

222p. “우리는 죽음의 신을 속였고, 그것도 크게 속였다는 기쁨과 감사함에 웃었다. 우리의 이 큰 행운은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이었고, 이 세상이 두고 떠나기엔 너무 달콤한 곳이라는 걸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사고를 겪으면서 나도 얻은 것, 깨달은 것, 신의 존재를 정리해 봐야겠다. 무턱대고 긍정적인 추진력이 엄청난 인간은 신도 두 손 두발 다 들 것만 같다. 아, 그래서 그 옆에 매우 냉소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을 붙여주는 가봐, 빌과 호프처럼.

‘증명해 보이기 위해’ 엄청난 양의 지적 자기반성을 하고 또 해야 하는데 그건 결국 실험실 운영비와 연구 파트너 빌의 월급과 직결된다. 연구 파트너 빌은 학교에 몰래 스며들어 햇볕도 들지 않는 창고방에서 기거한다. 생활비가 없어서. 학회 발표에 등장하고 서신교환을 하고, 이걸 하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잃을 위험에 빠질 것이다. 연구실에서 먹고 자고 밤을 새는 일이 허다하다. 어느 날 건물 관리인이 호프 자런 박사에서 말한다. “당신이 아무리 일을 사랑해도 일은 당신을 사랑해주지 않아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악몽은 계속된다. 실험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악몽, 구체적인 꿈의 박탈. “성경은 늘 세부사항에 약하다.”

246p. “우주의 정기를 모아 만들어진 내 운명의 잠재력을 성취해내지 못하고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 여성 조상들” 여성들이 잿물에 빨래를 하는 장면 248p. “나는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동등하게 취급받지 못하는 처지, 작은 여자 아이’


의사가 프로잭(우울증 약)을, 처방한다.


<느슨한 북클럽> 모임이 있던 날, 제네바 올드 타운에서 여성 마라톤이 있었다. 비가 오는 중에도 가열찬 뜀박질.


도움을 주는 스승, 퇴임하는 교수님이 실험실 전체 기구들을 통째로 물려준다. “주차장에서 우리, 두 과학자는 그의 삶의 도구들을 내게로, 그의 커리어를 내 커리어로 이전하는 소박한 의식을 거행했다.” 연구는 계속된다. 알래스카, 남극, 캐나다, 시베리아로, 해와 겨울, 완전한 암흑, 석 달 동안 계속되는 여름의 태양을 경험한다.

300p. “각 종은 자기들만의 독특한 성장 곡선을 가지고 있다.”
301p. “나무가 되는 것은 긴 여정이다. 그래서 경험이 굉장히 많은 식물학자라도 나뭇가지나 묘목만을 보고 그 나무가 향후 50년 사이에 어떤 나무로 자라게 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나무가 100살까지 사는데 ‘옳은’ 방법과 ‘틀린’ 방법은 없다.”

약을 먹는다. 우울증과 조울증 증세, 임신 중에 발작이 인다. 어떤 약점도 보이면 안 된다는 강박을 갖고 있고, 임신 상태로 존스 홉킨스 대학의 종신 교수 임명 직전에 있다. 여자로서 유일한 사례이다. 병가 중 임신한 배가 크게 부풀어 오른 상태로 연구실에 들어갔다가 학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다. “임신한 채 이 건물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니까.”

11개월 차 임산부의 삶은 꿈에 부풀어 미소 짓는 것과는 동떨어져있다. “대신 이 아기가 태어남으로써 인생의 일부분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오랫동안 깊이 슬퍼했다.” 담당 의사에서 모유수유를 하지 않을 거란 진술을 하며 마음이 복잡하다. ‘앞서 나가려는 마음을 붙들어 매면서 내 죄 중에 어떤 죄 때문에 지금 이 벌을 받고 있는지 생각’한다. 광기와 불안이 가득한 임신 시기의 호프 자런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쉽지 않았다. 그 자신이 말을 한다, 스스로 동정심이 일었다고. ‘슬프고 피곤하고 더러워 보여 불쌍’. 여성들은 선택의 기로마다 한번 더 생각한다.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 줄까. 산모의 정신질환을 돌봐야 하는 의료진들은 매 6시간마다 요일과 국가수반의 이름을 확인한다. 오늘은 화요일, 그리고 미 합중국의 대통령 이름.

326p. “나는 이 아이의 어머니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노르웨이에서 연구를 계속한다. “매년 지구의 땅 위에 떨어진 수백만 개의 씨앗 중 5퍼센트도 안 되는 숫자만이 싹을 틔운다” ‘어린 나무를 기르는 일’은 ‘거의 실패할 것이 확실한 흉조가 깃든 작업’ 노르웨이에서 연구를 하는 시간은 본연의 자아를 회복하게 한다. “일단 생존을 위해 모든 신경을 집중하지 않아도 되게 되면서, 내 참을성도 돌아왔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던 옛 성격도 돌아왔다.”
자유과 사랑이 합쳐져 강력한 효과를 본다. 편안함, 생산성. “나로 살 수 있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번창하고 있는 우월성을 본다.


책을 매개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타인의 삶을 배운다.


어느 순간에도 식물의 회복성과 생명력을 발견하는 호프와 빌, 352p. “그래, 네가 이렇게 거지 같은 날씨 좋아하는 거 알아.” 이끼에게 그렇게 비웃듯이 말하고 신발과 콱 밟아버리지만 이끼는 잠깐 땅 밑으로 불쑥 들어갔다가 다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모습으로 솟아온다. 아주 보란 듯이 용수철처럼 다시 튀어 오른다.

‘날이 밝으면 다시 시작하는 것!’ 시뮬레이션, 연구 결과가 모두 수포로 돌아가서 다 폐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뭐가 잘못되었나 머리를 처박고 복기해보는 자세, 쓰레기통이라도 뒤져서 폐기한 시험관 뚜껑이라도 재활용 여분으로 사용해보겠다고 하는 신입 연구의 조시의 모습을 지켜보는 호프.

아이에게 말한다. “자기가 원래 되어야 하는 것이 되는 데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단다.” 나는 이 문구에 밑줄을 쳤다.

실험실에서 싹과 나무를 키우듯 학생들을 케어하고 성숙한 시선을 키워간다. 선생과 멘토로서의 자세, 20년에 걸쳐 벌어진 이 모든 일들이 온실 속에서 연구 파트너 빌과 함께 한 여정, “우리는 희망과 목표에 대해서, 그리고 식물들이 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또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감동, 증언, 역사, 영혼의 쌍둥이, 연구 파트너 호프와 빌은 그렇게 이 책을 통해 반추한다.

396p. “책으로 써. 언젠가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줘.”
398p. “오랜 세월을 탐색하며 빚어진 소중한 비밀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누구나 그렇듯 나도 누구에겐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염원을 품고 있었다.”

<랩 걸>을 읽는 동안 내 마음속에 소중하고 깊게 남겨진 문장들과 사색을 이렇게 기록해본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꽤 복잡한 노동이다. 잡초처럼 대담하게, 덩굴처럼 뻔뻔스럽게 한 걸음씩 걷는다.  


생명력 있게 담장을 넘나드는 식물들, <랩 걸>을 읽은 뒤 산책길의 발견이 달라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