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eree Baik 애리백 May 10. 2020

<폭풍의 언덕> 조울의 에너지가 가득하던 친구들의 다락

나는 문득 에밀리 브론테의 20대가 궁금해졌다 [1부]

어느 날 나는 이메일을 열어 한 마디 문장을 타이핑하여 적고 난 뒤 여러 차례 읽어보며 오랜 기억을 회상하다가 나 자신에게 그 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문득 떠오른 이 생각을 놓치지 않아야겠다고 느꼈다.

“폭풍이 일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이들의 다락방이었다.”

똑똑한 나의 친구들은 살뜰하게 삶의 운영하며 저마다 자신의 공간을 어렵게 마련했다. 친구들은 매달 세를 걱정하면서도 그 아주 작은 공간을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곳에서 글을 쓰고 타로를 배우고, 초를 켜놓고 제3세계의 음악을 틀어놓은 채 비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긴 밤을 새워가며 생각들이 생산되는 공간이었고 감정이 쏟아져 나와 타오르던 그곳이 친구들에게는 다락방이었다. 때로는 이들이 뿜어내는 감정의 선회가 내게 소화하기 힘든 과도한 무게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20대의 우리들은 모두 조울증 증세가 있었다. 다만 폭발하지 못하고 김을 빼는 일에 매진해야 했다.

북클럽에서 <폭풍의 언덕>을 함께 읽어보자고 제안을 하느라 나는 비로소 책장에 꽂혀있던 책을 꺼내 몇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서울의 내 원룸에서 모든 가구가 하나씩 정리될 때 본가의 책장으로 보내졌다가 다시 세월이 흘러 자그마치 10년 만에 스위스의 내 집에 도착한 이 책은 충동과 욕망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저항하던 내 마음을 계속 따라온 끈질긴 녀석이다.


이번에도 나는 또 다락방 장면에서 책을 덮었다. 소설의 초반, 매번 넘어서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게 만든 장면이 저택의 꼭대기 방에서 펼쳐지는 악몽이 등장하는 현장이었다. 방문객이 발견한 비어있는 방의 귀퉁이, 빈 책상에는 ‘캐서린 언쇼 장서’라고 적혀 있고 거기 남겨진 일기에서 글자를 읽어나가게 된다.


런던 여행에 챙겨온 소설책은 <폭풍의 언덕>이 아니었다.


마침 주말로 다가온 런던 여행에서 나는 여정과 함께 할 책 한 권을 고르다가 여러 차례 주저했다. 추운 겨울의 스산한 런던에서 <폭풍의 언덕>을 읽을 생각을 하니 아득해지는 마음이 앞섰다. 결국 서울에서 선배가 사 준 김금희 작가의 소설을 골라 가방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재밌는 일은 런던의 숙소에 도착하고 난 직후에 벌어졌다. 체크인을 마치고 숙소 주인이 안내해준 방은 허름하고 오래된 4층 꼭대기 다락방이었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오르느라 심란한 와중에 옆에서 주인이 건네준 무거운 열쇠를 집어 들고서 다락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빈 책상에 결국 이렇게 앉게 되는구나. 설마 오늘 밤 악몽을 꾸는 건 아니겠지. 나는 문득 요절한 작가 에밀리 브론테의 20대가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30세에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1년, 세상에 남긴 단 한 권의 소설, 어둡고 거칠고 입체적인 소설을 적어 내려 갔을 20대의 에밀리 브론테를 자매인 샬럿 브론테는 이렇게 묘사했다고 한다. ‘남자보다 강하고, 아이보다 천진하게, 그녀의 본질은 홀로 서 있다.’ 10대부터 필명을 사용하여 글을 썼던 에밀리 브론테는 영국 국교회 목사의 딸이었고 기숙학교에 입학해 교육을 받았고 그 시대에 다양한 글을 써서 잡지에 기고하고, 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벨기에 브뤼셀로 여행을 가서 언어를 배운다.


런던의 다락방


나는 며칠 동안 런던에 머무르며 머리 한쪽은 <폭풍의 언덕>을 늘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이제 지적 노동과 감정 노동을 동반한 몰입을 견디며 마침내 이 책을 읽을 준비가 되었는가 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제네바로 돌아와 미술관의 카페 빈 책상에 앉았다. 비가 내리는 어두운 겨울 오후였다.

‘폭풍이 불면 위치상 정면으로 바람을 받아야 하는 이 집의 혼란한 대기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설명을 하며 방문객의 내레이션은 시작된다. ‘워더링 하이츠’라는 이름이 붙은 ‘히스클리프 씨의 집 이름’을 언급하며 그의 순진한 목소리가 등장한다. 저택의 이름인 고유명사 ‘워더링 하이츠 Wuthering Heights’는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폭풍의 언덕>.  

- “히스클리프 씨지요?” 내가 물었다.
-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집시처럼 피부색이 어둡고 특별히 스산한 기운을 품고 있는 히스클리프와 마주치는 장면으로 소설의 첫 장이 펼쳐진다. 그 이웃의 ‘드러시 크로스 저택’을 장기간 빌리고 싶다고 떼를 써서 이 동네에 등장한 순수한 표정의 이방인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 두 집의 헝클어지고 뒤틀린 질곡의 역사를 마주하게 될 줄 상상도 못 하고 있다. 그저 해맑은 얼굴로 생각하고 있다 ‘정말 이 집 사람들은 줄곡 그 꼭대기에서 일 년 내내 그 맑고 상쾌한 바람을 쐬고 있을 것이다.’ 현관문 주변의 조각상이나 보며 감탄한다.

그렇게 방문객인 록우드는 빌린 저택을 안내받아 이 동네에서 기대만큼이나 평화롭고 조용한 하루를 보낸다. 도시에서 사람들에게 시달리다 소문과 구설수를 피해 시골에 온 그에게 쾌적한 환경이었다. 적어도 그날만큼은 그랬다. 그는 이튿날 바람맞이 언덕배기에 산책을 나왔다가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눈보라의 조짐인 눈송이를 맞으며 추운 기온에 온몸을 떨다가 다시 ‘워더링 하이츠 저택’ 문 앞에 오게 된다. 현관문을 두드리다 얼얼한 주먹을 녹이며 기다려보지만 안에서 개만 짖어댈 뿐, 누구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한참 애를 먹고 있을 때 마음속으로 소리를 지른다. ‘빌어먹을 사람들 같으니...... ‘

우여곡절을 거쳐 몸을 녹이기 위해 겨우 입장한 워더링 하이츠의 거실에는 그 빌어먹을 사람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차례대로 등장한다. 혼란이 갑자기 증폭될 뿐이다. 이해할 수 없는 말투와 옷차림, 귀족의 저택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태도, 성질머리가 고약해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쇠갈퀴를 어깨에 메고 나타난 청년, 주인인지 하인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고집쟁이, 서로에게 폭언과 저주를 퍼붓는다.

- “왜 할 일 없이 서 있나 몰라! 하지만 당신은 쓸모없는 사람이니 말해봤자 소용없지. 그렇다고 버릇이 고쳐지진 않을 테니. 당신 어미처럼 바로 지옥에서 가는 거지!”
- “되지 못한 늙은 철면피야! 악마의 이름을 말하면 그대로 끌려간다는데 무섭지도 않아? 나를 건드리는 건 삼가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악마한테 특청을 해서 당신을 잡아가게 할 테니까. 가만있어 이봐 조셉.”


- “에이, 망측해!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악에서 건져주옵소서!” 늙은이는 신음하는 소리로 말했다.
- “안 돼. 빌어먹을 늙은이 같으니! 당신은 하나님이 버린 사람이야. 썩 꺼져버려.”

그렇게 으르렁대며 서로를 저주할 때마다 ‘하나님’이나 ‘악마’를 어김없이 가져다 붙이며 괴팍한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그곳에 가득했다.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 헤어튼, 조셉, 히스클리프, 그리고 짖어대다가 결국 방문객 록우드에게 덤벼들어 얼굴에 상처를 내고 넘어뜨리고 마는 셰퍼드들까지도.


비가 오는 미술관 정원


엉켜있는 족보를 제대로 정리받지 못한 채 순진했던 록우드는 차마 폭풍이 몰아치고 눈보라가 날리는 길을 통과해 자신의 숙소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그날 밤 어쩔 수 없이 워더링 하이츠의 다락방에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밤을 의탁하게 된다. 그리고 얼이 빠진 젊은이는 그 악몽을 겪게 된다. 그렇다, 그 장면. 내가 몇 번이고 넘어서지 못했던 그 페이지다.

그 방에서 발견한 글씨들은 갖가지 모양으로 적혀 있었다. “‘캐서린 언쇼’라는 이름이 군데군데 있는가 하면 ‘캐서린 히스클리프’가 되었다가 ‘캐서린 린튼’이 되어 있기도 했다.” 여기서 작가 에밀리 브론테는 독자들에게 숙제 같은 미끼를 던져주고 있다. 이걸 한번 풀어보라고. 매번 나는 그 수수께끼를 맞닥뜨리고 싶지 않아 책장을 덮었고 참을성 있는 누군가는 읽기를 지속했을 것이다.


펄떡이는 활어처럼 신경질적으로 그려진 캐릭터들, 욕이든 저주든 한시도 참지 않는 저 인물들에게 압도당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오늘의 나는 책장을 꾸준히 넘겼다. 다음 페이지에는 마치 작가가 독자에게 바라는 마음일듯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불현듯 캐서린이라는 미지의 여성에 대한 흥미가 생겨 나는 그녀의 읽기 힘든 빛바랜 글자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나는 같은 페이지를 록우드와 동일한 마음으로 읽고 있다.  

일기의 내용은 일요일의 지루하고도 무책임하게 길었던 조셉의 예배 설교를 힐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긋지긋한 일요일이다. 아버지가 되살아나셨으면. 힌들리 오빠가 아버지 대신이라니 끔찍하다. 히스클리프에 대한 오빠의 행동은 잔인하다. 힌들리 오빠는 난롯가의 낙원에서 달려와 우리 중 한 명은 멱살을 잡고 또 한 명은 팔을 잡아서 둘 다 부엌 안쪽으로 내동댕이쳤다. 거기 있으면 영락없이 악마가 우리를 데려갈 거라고 조셉이 으름장을 놓았다. 그 말을 듣고 우리는 따로따로 구석을 찾아가 악마가 오기를 기다렸다.”

빈 책상의 일기들을 읽다 잠든 록우드에게 그날 다락방의 꿈에서 죽은 캐서린의 환영이 등장하고, 그 소리를 들은 히스클리프는 괴로워한다. 내 앞에도 제발 나타나 달라고. 침대로 올라가 창문 손잡이를 비틀어 열고 활짝 창을 펼치며 울음을 터뜨리고 흐느낀다. “들어와! 캐시, 제발 들어와. 그리운 그대, 이번만은 내 말을 들어주오, 이번만은!” 환영에게 애원하는 그의 얼굴이 여러 진폭의 그림자를 보인다. 이 대목에서 나는 턱을 괴고 생각했다. 힌들리 오빠는 또 누군인가 말이다.

등장인물 중 누군가를 가볍게 넘길 수도 없는 입체적인 장면들이 펼쳐지며 상황에 따라 종잡을 수 없이 흩어져가는 감정들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필기를 해가며 나는 성실하게 책 읽기를 지속했다. 울부짖음과 비통함이 눈보라처럼 쏟아지는데도 발걸음을 계속 전진했다. 오래 유예했던 숙제를 마주하는 심정으로. 다음번 북클럽에서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이걸 어쩐다, 하고 때때로 크게 한숨을 쉬며 계속해서 책장을 넘겼다. 비밀이 가득한 이 야만스러운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여전히 품은 채 말이다.


영국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에서 사온 두 장의 엽서, 위대한 작가들 - 메리 셸리와 에밀리 브론테(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