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하는 현관 손잡이를 부여잡은 채 고개만 쭉 내밀고 두리번거렸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상자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아마도 바디 워시나 디퓨저 세트 정도가 들어 있을 만한 크기. 민하는 왼쪽 발을 뻗어 상자를 툭툭 쳤다. 생각보다 묵직했다. 민하는 한동안 상자를 노려보았다.
띠로리로-.
갑작스러운 휴대폰 벨소리에 민하는 움찔했다. 액정에 ‘피 부장님’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다. 민하는 다급히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출근 시간 2시간 전이었다. ‘뭐지?’ 민하는 상자와의 대치를 잠시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피 부장은 잘 잤냐는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오는데 그 사람이 유제품에 알레르기가 있다네? 아, 새끼 진작 말하지. 나도 방금 전에 문자 받았어. 민하 씨가 회사 올 때 허브차 같은 거라도 알아서 좀 사 와 봐.”하고 뚝 끊었다. 자신은 왜 허브차를 사 갈 수 없는지, 민하가 허브차를 사 올 수 있는 상황인지에 대한 그 어떤 고려나 설명도 없었다.
민하는 주방의 선반을 보았다. 페퍼민트와 로즈메리 티백이 있었다. 손을 뻗으려다 말았다. 피 부장이 원하는 허브차는 이런 게 아닐 것이었다. 이른 아침 도대체 어디에서 허브차를 사야 한단 말인가. 민하는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급히 칫솔질을 시작했다.
“아씨, 뭐야?”
민하는 자신을 향한 날 선 목소리에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가방 안에 쑤셔 넣은 랜덤박스의 삐죽 튀어나온 모서리에 누군가가 긁힌 것 같았다. 민하는 한 손으로 지하철 벽면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 모서리를 감쌌다. 지하철이 덜컹거릴 때마다 모서리가 민하의 손바닥을 찔렀다.
“이거 뭐 브랜드 있는 거야?”
지하철역 근처 트레이더스에서 겨우 구한 허브티를 받아 든 피 부장이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민하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골랐다. 피 부장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가보라 손짓했다. 민하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피 부장이 원하는 대로 유명한 상표인지는 모르지만 개 중에 제일 비싼 것이었다. 민하는 주머니 안에 영수증을 손으로 매만졌다. 하루에 5천 원씩 일주일에 3만 5천 원. 허브티의 가격은 민하의 일주일 치 저녁 식사보다 비쌌다.
자리에 앉자마자 일이 많았다. 처리해야 할 일도 많은데 손님이 오신다고 화장실 청소도 하고 보기 좋게 식물도 재배치하고 차도 끓이고 다과도 내가고 중간에 택배도 보내고 발주서도 쓰고 그러면서 억지 미소도 지어야 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겨우 숨을 돌렸다. 직원들이 빠져나간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초코바 하나를 먹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샛노란 상자, 민하는 심호흡 했다. 커터칼로 봉합된 부분을 조심스럽게 그었다. 입이 벌어진 상자 안에는 또 다른 검은 상자 하나가 있었다. 고급스러워 보였다. 상자의 뚜껑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민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한낮의 더위가 무색하게 온몸이 시렸다. 너무 시려 누군가 칼로 베는 기분마저 들었다.
넥타이와 향수.
“이건 말도 안 돼…….”
민하가 혼잣말했다. 둘이 합쳐 30만 원이 족히 넘는 금액. 그건 민하의 일주일 저녁 식사의 10배. 보통 결단 없이는 살 수 없는 것. 그걸 민하는 샀었다. 창우와 함께 보낸 마지막 크리스마스에. 이렇게 해서라도 창우와의 관계를 되돌리고 싶었다. 창우마저 떠나면 민하는 완전한 혼자였으니까.
민하는 진저리 치듯 머리를 내저었다. 사방으로 퍼지던 향수 냄새와 숨이 끊어질 듯한 압박감. 손이 덜덜 떨려왔다.
“뭐야?”
뒤에서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에 민하는 저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아이처럼. 지수는 그런 민하의 반응이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에 손을 갖다 댔다.
“아, 미안. 미안해요.”
민하의 사과에도 지수는 불쾌감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민하의 책상을 두리번거렸다.
“어머? 이게 뭐야?”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안젤리카 아티끄 향수, 이거 단종돼서 못 사는 건데……. 당근 했어? 이 향수 좋아하는지 몰랐네.”
지수가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안 좋아해요.”
“엥? 넥타이도 있네? 언니 설마 남자 생겼어?”
지수의 말에 민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재빨리 노란 상자 안에 뜯긴 포장지와 테이프를 물건과 함께 구겨 넣었다. 그리고 발아래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뭐야? 왜 그래?”
지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민하를 바라보며 민하의 팔목을 잡았다. 민하는 순간적으로 경련이 인 사람처럼 몸을 떨며 팔을 뺐다. 지수가 민하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이걸 왜 버리는데?”
“필요 없어서요.”
“언니가 산 게 아니야?”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이걸 언니한테 사줬다고? 헐, 대박. 근데 여자한테 남자 향수랑 넥타이를 왜 사줘? 에이, 거짓말이지? 뭔데? 왜 그러는 건데?”
재잘대는 지수를 보며 민하는 생각 했다.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밝을 수 있지?’
지수는 민하보다 2살이 어렸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미용 자격증을 땄지만 미용실 막내로 사는 게 너무 고단해 일단 돈을 모으기로 했단다. 대학원을 중퇴한 민하가 이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민하는 그보다 몇 개월 선배였다. 둘 다 무기계약직이었다. 지수는 매일 아저씨들만 보다가 언니를 만나니 숨통이 트인다고 했다. 규칙도 경계도 없이 경리부, 자재부, 영업부, 가끔은 현장에 나가 포장일을 돕는 업무까지 휘뚜루마뚜루 모든 잡무를 처리해야 하는 시쳇말로 좆소기업이지만 여기 좋은 점이 싹싹하게 일 잘하면 금방 눈에 띄어 정규직이 될 수 있다고, 지수는 들뜬 목소리로 언니 우리 꼭 같이 정규직 되어 알콩달콩 회사 다니자고 말했었다.
그렇게 본데없이 밝은 여자애랑 친구 한 적 없는 민하는 어색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좋았다. 의지가 되었다. 둘은 밖에서도 자주 만났다. 창우도 함께. 민하는 자신이 의지하는 두 사람이 친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창우는 지수가 여우 같다고 저런 애들은 가리지 않고 남자를 막 만나고 다닐 거라 민하에게 투덜거리곤 했었다.
“아까운데. 안 쓸 거면 그냥 나 줘.”
지수가 쓰레기통에 처박힌 상자를 다시 꺼내 들고 말했다. 민하는 겨우 진정된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지수의 손에 들린 상자를 빼앗듯이 낚아챘다. 지수가 놀란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
“버릴 거예요. 버려야 해요.”
지수의 허,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비릿한 비웃음을 지나 의혹 가득한 눈빛. 민하는 그걸 빠르게 읽어낼 수 있었다. 내색하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하며 민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 화장실을 향해 걸었다. 지수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퇴근 시간, 지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민하를 한 번 쓱 훑더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민하는 유리창에 비친 지수를 바라보았다. 지수의 발걸음이 오른쪽이 아닌 왼쪽으로 향했다. 여자 화장실 방향이었다. 지수를 뒤따라가고 싶었지만 몸이 의자에 딱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괜히 오해를 살까 봐, 난처한 상황을 만들까 봐, 하지만 무엇보다 두려운 건 지수가 자신이 버린 상자를 쓰레기통에서 꺼내는 장면을 보는 것이었다. 민하는 그런 상황에서 통쾌한 표정을 지으며 “내 말이 맞지?”하고 일갈하는 장면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아닐 거야, 설마 아닐 거야.’
민하는 창우가 자신이 선물한 향수를 바닥에 내동댕이쳐 깨부수고 넥타이로 목을 졸랐던 크리스마스를 잊을 수 없었다. 창우는 민하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도 그 무렵 부쩍 민하에게 이제는 그만 자신을 놓아달라는 말을 했었다. 이제는 자신도 지친다고. 민하는 거듭된 창우의 취업 실패가 창우를 변하게 했다고 믿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창우를 이해하겠어.’ 민하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조건에 놓여 어떻게든 살아보려 치는 발버둥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을 놓아달라는 창우의 말이 자신을 살려달라는 신호처럼 여겨져 민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했다. 창우가 좋아하던 향수는 민하의 형편에서 부릴 수 없는 사치였지만 상관없었다. 조금 더 아끼면 되니까.
- 이거 다 뭔데? 어디서 났어? 왜 샀는데?
창우는 향수의 포장지를 뜯은 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소리를 질렀다. 민하는 마음에 들지 않냐고, 그렇다면 바꿔 오겠다고 말했다. 창우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검지로 민하의 머리를 톡톡 누르면서.
- 야, 너 돈 없다며. 근데 이걸 샀다고? 너 나한테 구라 쳤냐?
- 아니야.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내가 산 거야.
- 크리스마스 선물?
창우는 그러면서 넥타이가 든 상자를 열었다. 넥타이를 보는 창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 이거 뭐야?
- 넥타이.
- 그걸 누가 몰라? 무슨 뜻이냐고 이거. 왜 이걸 나한테 주는데?
- 뜻?
민하는 뭐라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그리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사……사랑하니까.
- 뭐라고? 뭐 한다고?
- 사랑, 사랑하니까.
민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었다. 그러자 창우는 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 사랑?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야, 너 나 멕이려고 그러는 거잖아. 취업도 안 된 놈한테 넥타이를 사주는 게 무슨 뜻이겠냐. 식충이처럼 내 돈 축내지 말고 너도 빨리 취업해라, 이 소리잖아.
-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전에 네가 그랬잖아. 제대로 된 넥타이 하나 없다고. 한 번도 새 넥타이 해본 적 없다고. 그거 생각나서 그랬어. 정말 다른 뜻 없어.
민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창우에게 말했다. 그러나 창우는 검지손가락을 허공에 대고 흔들면서 제자리에서 서성거렸다. 흥분한 창우를 진정시킬 것은 그저 그 순간을 견디는 것임을 민하는 잘 알았다. 고개를 숙이고 숨마저 숙였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 참을 수 없었다. 향수만 사면 될 걸 괜히 넥타이를 샀다고. 웃고 있는 즐거운 사람들 틈에 휩쓸려 여기저기를 구경하다 60프로 세일 중인 매대를 발견했다. 제값이라면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민하는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창우에게 사주고 싶은 넥타이를 마침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민하는 자신의 행동이 후회돼서 견딜 수 없었다. 그때 창우가 민하의 턱을 치켜들었다.
- 야, 솔직히 말해라. 너 돈 있지?
- 돈? ……얼마나?
- 내가 전에 말한 거. 5천. 솔직히 말해봐. 있지?
- 그렇게 큰돈은 없어.
- 너 거짓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 정말이야. 이것도 다 할부로 산 거야.
창우는 민하의 말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실소를 내뱉었다. 그리곤 화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방바닥을 발로 쿵쿵 찧더니 민하가 사 온 향수를 집어던졌다. 향수는 철제 행거에 부딪히고 현관 타일에 떨어지며 깨지고 말았다. 온 사방에 향기가 진동했다. 민하는 울면서 창우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 너는 항상 그 태도가 문제야. 사람을 미치도록 짜증 나게 만든다니까.
이후의 기억은 엉망진창이었다. 민하는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때마다 향기가 피어올랐다. 칼날처럼 코끝에 찌르는 그 향기가 너무 생생해 숨이 막혔다.
“민하 씨.”
백 이사의 목소리에 민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거의 나가고 없었다.
“모대리는 먼저 갔나? 오늘 모대리가 화장실 당번인데.”
민하는 지수를 대신해 사과했다.
“제가 정리하고 갈게요.”
“그래? 고마워. 민하 씨도 얼른 정리하고 들어가. 문 잘 잠그고.”
백 이사는 말수가 적고 늘 무언가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보여 말 붙이기 힘들었지만, 회사에서 유일하게 민하를 챙겼다. 백 이사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민하에게 말했다.
“어떻게든 참고 버텨봐요. 그러면 민하 씨한테도 기회가 올 거야. 내가 장담할게.”
민하는 엷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렇겠죠. 저에게도 기회가 오겠죠. 모지수가 사라지면…….’
사람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라고 말하면서도 사장은 사람을 구하는 일에 굼떴다. 사장은 민하의 끈기와 의지를 칭찬하며 지수를 정규직으로 전환시켰다. 사람들은 알았다. 민하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묵묵히 일할 것을. 지수가 모대리가 되는 동안에도 민하는 여전히 민하 씨였다. 지수는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민하는 괜찮았다. 자신도 예상한 일이었으니까.
민하는 화장실로 갔다. 예상대로 넥타이와 향수는 없었다. 민하는 그것의 행방을 알 것 같았다. 지수는 그걸 들고 깨끗이 닦은 다음 새 쇼핑백에 넣어 창우에게 전해 줄 것이다. 마치 자신이 산 것처럼.
창우는 지수에게로 갔다. 몸만 이동한 게 아니라 마음까지도. 민하를 달달 볶아 얻어낸 5천만 원도 함께였다. 창우와 지수는 자신들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덤벙거리며 물건을 잘 흘리거나 잃고 실수가 잦은 지수의 습관 탓에 그 관계마저 자꾸만 민하에게 들켰다. 민하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모른 척했다. 그들은 그들일 뿐. 창우와 민하가 지수와 아무 관계없는 것처럼. 지수가 사라진다면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을 거라고 민하는 굳게 믿었다.
지징-.
민하는 주머니 속을 울리는 진동에 깜짝 놀라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랜덤박스 아이콘이 반짝였다.
- 고객님 앞으로 랜덤박스가 배달 완료되었습니다. 별점과 함께 간단한 리뷰를 남겨주세요. 고객님의 평가가 저희 랜덤박스의 발전에 귀한 거름이 됩니다.
집으로 돌아온 민하는 어플로 들어갔다.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는 걸까 하고 고민해 보신 적 있나요? 착하게만 살아온 당신, 아무런 보답 없는 세상에 화가 나나요? 랜덤박스가 고객님의 취향을 99퍼센트 분석해 깜짝 선물을 보내드립니다. 희망 없는 당신의 일상을 빛내 줄 최고의 이벤트!’ 갑자기 튀어나온 창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민하는 습관적으로 다시 보지 않기를 눌렀다. 고객센터로 들어가 보았지만 FAQ만 보일 뿐 따로 연락할 창구 같은 건 없었다. FAQ에 달린 답들도 두루뭉술해 궁금증만 더 증폭시켰다.
민하는 불현듯 의문의 여자가 자신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신호음이 아무리 울려도 여자는 받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무턱대고 송장을 뜯어낸 것이 후회됐다.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힌 사람처럼 민하는 하염없이 어플 속을 헤맸다.
멍하니 액정을 들여다보던 민하가 얼마 전 만든 가짜 계정으로 지수의 인스타에 들어가 보았다.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 향수와 넥타이가 단정히 놓인 테이블 위에는 샴페인과 크래커가 함께했다. ‘글 쓰느라 힘든 우리 자기를 위한 깜짝 이벤트, 늘 고마워. 내가 내조 잘해서 꼭 최고의 작가 만들어줄게.’라는 글이 달려 있었다. 민하는 사진을 캡처한 뒤 크게 확대해 꼼꼼히 살폈다. 슬쩍 비친 남자의 손은 창우가 확실했다.
민하는 지수와의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지수는 거침없는 아이였다. 남의 눈치라곤 조금도 보지 않아 민하는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늘 당황스러우면서도 짜릿했다. 우정은 산산이 조각났다. 애초에 그런 아이가 자신과 친구할 리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영원한 무언가를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같다고 민하는 자신을 책망했다.
“지수야, 제발 창우와 나 사이에서 사라져 줘. 넌 창우 없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아이잖아. ”
민하는 액정 속 웃고 있는 지수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눈물이 났다. 창 너머로 흔들리는 근처 주점의 네온사인만이 민하의 웅크린 등을 쓸어 주었다.
5일이 지났다. 다시 벨이 울렸다. 상자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무게만큼은 묵직했다. 감이 오지 않았다. 민하는 일단 상자를 집안으로 들인 뒤 바닥에 놓았다. 송장에는 보낸 이의 주소도 받은 이의 주소도 없이 그저 박민하란 이름과 랜덤박스라는 상호가 적힌 로고만이 표시되어 있었다.
“저번에도 그랬었나?”
민하는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상자의 테이프를 뜯었다. 만약 이번에도 이상한 게 들어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업체에 연락해 반송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민하는 자신이 그토록 굳세게 무언가를 작정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러나 방금의 결심과는 달리 상자 안을 확인한 민하는 한 순간에 무너졌다. 누군가 민하의 어깨를 잡아 주저앉히기라도 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