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글라라 Jun 22. 2022

주일학교 교사로 부르심을 받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성당은 나에게 새로운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아이들이 유아세례를 받고, 큰 딸이 첫 영성체를 하기까지 성당은 내 아이들에게 따뜻한 엄마 품이 되어 주었다. 성당에 가면 언제든 아이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대모님이 있었다. 작은 딸 대모님은 주일학교 자모회장, 큰 딸 대모님은 자모회 총무. 토요일 오후 어린이 미사 후에 주일학교 교리를 마치고 나면 간식 먹고 대모님 집에서 친구들이랑 놀고, 주말이면 아이들은 성당 마당에서 뛰놀며 자랐다. 

나는 아이들을 성당으로 태워주고 나서 자유시간을 얻었다. 성당에서는 아이들에게 마음의 양식과 일용할 음식을 내어주었다. 내 아이들은 성당이 키워준 아이들이다. 성당은 좋은 이웃, 좋은 친구를 만들어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내가 성당 미사에 빠지는 일은 자주 있어도 아이들은 미사에 빠지지 않으려 했다. 

시아버지가 세례를 받은 후에 시어머니도 예비자 교리를 받았다.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앙인이 된 것이다. 이 또한 축복이지 않을 수 없다. 어려서는 관혼상제 의식을 허례허식이라 생각하고 경멸한 적도 있고, 의식을 중요시 여기지 않았으나 낯선 타향에서 아버지를 보내며 장례미사가 있어서 좋았다. 낯선 이들이 모였지만 장례미사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더라면 더욱 초라하고 비참하고 쓸쓸했을 텐데, 가톨릭 의식으로 아버지 장례를 치를 수 있어서 감사했다. 틀에 메이는 것이 구속과 속박이라 여겨져 벗어나고 싶고 깨뜨리고 싶었으나 가톨릭 미사 의식은 풍요로운 구속으로 다가왔다. 이후에는 제사 명절에도 성당에서 연미사를 드리며 그 안에서 안도와 평화를 얻었다.   

결혼하며 글라라라는 세례명을 먼저 받았고, 큰딸을 배속에 품고 세례는 받았으나 오랜 기간 냉담했다. 광야에서의 시련을 겪으며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옵시고"는 "차라리 유혹에 빠지고 말테야"라는 반항으로 바뀌었고, 하느님에 대한 원망과 의심의 화살이 빗발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 성당과의 인연으로 그와 나는 견진성사를 하고 혼인 갱신식을 하고, 진짜 어른의 삶으로 나아갔다. J 성당은 그와 나에게 신앙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사업 실패하여 사업장 폐업을 하면서 우리 가족은 J 성당을 떠났다. 그는 신앙을 버렸다. 신앙조차 초월하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을 성당에 태워주고, 아버지 기일에 연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가면서도 영성체는 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과 얻은 성당에서의 평화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과 나만 W 성당으로 이전했다. 교적을 옮기며 나와 아이들만 교적을 옮겼는데, 행정절차상 가족 모두가 이전되었다. 그는 신앙을 떠났으나 교적에는 여전히 그가 우리 집 세대주로 남아있다. 

W성당에서 청소년 주일학교 봉사를 하게 되었다. 새로 오신 보좌신부님은 첫 부임지에서 열성적으로 주일학교 일을 하면서 전 신자에게 재능기부를 받았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재능을 쪽지에 적어서 봉헌함에 넣도록 했다. 예술놀이, 청소년 학습심리 진로상담을 쪽지에 썼다. 그 쪽지가 신부님에게 가 닿아서 뽑혔다. 한 달에 한번 예술놀이 프로그램에서 유치부 아이들을, 진로상담에서 중고등 청소년을 만났다. 성당에서 받은 만큼 나도 무언가로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니 봉사라는 것은 내게 빚 갚음이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돌려주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죄책감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아이들이 성당에서 받은 게 많은 만큼, 나도 무언가 해야 했다. 재능기부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 또한 기쁘고 감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다음 해에는 Y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Y 성당은 시골 작은 성당으로 주일학교 아이들이 유치부에서 중고등부 모두를 합쳐봐야 10명 남짓이었다. 교육연구소에서 일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는데, 수녀님은 연구소를 방문해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는지를 물었고, 가족공감 프로그램에 성당 주일학교를 하나의 가족으로 참여시켰다.  

1년 연구소에서의 계약기간을 마치고 이사를 생각하고 있을 즈음,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이들과 함께 그가 있는 고향으로 내려갈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연구소 프로그램을 마치고 느티나무 아래에서 간식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녀님이 말씀하셨다. "성당 가까이 와서 살아라. 성당 가까이에 있으면서 봉사도 하고." 이사할 집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성당 구역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주일학교 교사인데, 이사할 집을 찾는다. 아이 둘과 함께 지낼만한 집이 있으면 찾아봐달라" 부탁하셨다. 수녀님의 추진력으로 시골에 월세 10만 원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을 찾아서 이사했다. 

수녀님이 베풀어주신 관심에 감사하며 이를 되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것이다. 봉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얻은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버지는 겨울에 떠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