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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유은 Jun 30. 2019

"꺼져, X신아."

거울 속 나에게 나도 모르던 해왔던 말.

얼마 전 대학원 동기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은 나의 어떤 면을 말한 적이 있었다.

확실한 질문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그들의 요청을 성실하게 수행하려는 내 본능은 어떤 대답을 내놓았고, 내 앞에 나를 바라보고 있던 두 선생님은 내 대답을 다 듣기도 전에 말을 자르며 내 말을 반박했다.


나 : 제가 가면성 우울증 성향이 좀 있어서 (말하는 도중)

A  : 선생님이? 병원에서 진단받은 거예요?"

나 :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10초간 고민하다) 아니, 병원에는 안 가봤는데 내가 살아온 시간과 내 증상을 내가...

A  : (웃으며 내 말을 가로챘다) 에이~ 나도 정신병리학 배우면서 다 나 같다고 생각했어. 선생님이 무슨 우울증이야. 아니야.

B :  (역시 웃고 있었다.)

나 : 아니, 그래.  그 말이 뭔지 나도 아는데, 선생님은 저에 대해 모르잖아요. 제가 이때까지 어떻게 살아왔...

A, B  : 에이, 아니야~


나는 학부 때 전공이 상담심리였다.  때문에 대학원에 와서 신기하고 놀라운 심리의 세계를 처음 접한 그 선생님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내 말은 그 선생님의 '어느 정도 생각하고 내린 결론'과는 다른 말이었다.

내 인생과 그동안의 감정과 느낌. 그리고 증상을 내 온 힘과 삶으로 고찰해온 '당신은 모르는 내가 알고 있는 나에 대한 결론'이었다. 나를 잘 알려는 노력도 없고, 노력 없이도 알 수 있을 법한 누적된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닌 타인이 맞다, 아니다를 판단할 수 있는 범위의 말이 아니었다. 물론 그 선생님들이 무슨 뜻으로 내 말을 아니라고 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너는 밝은 사람이잖아. 우울증이라니 말도 안 돼. 네가 그런 어두운 병에 걸렸을 리가 없어.' 어쩌면 이건 그들의 호의였을지도 모르지만 난 순간 정말 화가 났다.


나는 그 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그 들 세계 밖의 이야기를 했음에도 그들은 그 이야기를 굳이 상관없는 자신의 세계로 끌고 갔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세계 안에 있는 것 중 유사해 보이는 무엇인가와 같은 것이라고 확신하며 네가 하는 말은 틀린 말이라고 그야말로 틀린 판단을 내렸다. 그것도 두 명이 동시에! 게다가 내가 우울증 성향이랬지 언제 우울증 이랬냐고!  정말... 쪽수에는 장사가 없다. 후...;;


지금은 그냥 타인에게 비치는 내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밝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구나.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민망해도 웃고, 외로워도 웃고, 슬퍼도 웃고, 내 이름은 캔디처럼 맨날 그렇게  웃고 다니니까.

하지만 내 앞에서 동시에 빙글빙글 웃었던 그 두 선생님도 언젠가 알게 되겠지. 그 정도의 겉모습을 보고,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속까지 같을 거라 확신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


사실 내가 거울 속의 나에게 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 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상담사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집에서 거울을 볼 때면 그 언젠가 경험했던 수치스러웠던 장면, 창피하고 도망가고 싶은 기억이 떠올라 이내 인상을 쓰며 거울을 엎어버리곤 했다. (아, 모닝 화장할 때 빼고.) 그러기를 몇 년이나 해왔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10년은 족히 될 것 같다. 그러던 중 마음속에서 몽글몽글 모여들어 이루어진 한 문장이 입 밖으로 나온 적도 있었다.


"꺼져, X신아."


처음 마음속의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냈을 때는, 거울을 보며 떠올랐던 그 기억 속의 상대에게 혼자 욕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실제로 몇 분간 그 상대를 생각하며 분노를 품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할 시간이 아닌가. 그 긴 시간을  살아가는 동안 천천히 알게 되었다. 내 마음속에서 맴돌다가 가끔 입 밖으로 나왔던 그 'X신'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나는 거울을 볼 때뿐 아니라 그냥 가만히 있다가도 불현듯 내가 참으로 바보 멍청이스러웠던 장면이 자주 떠오르는 편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어떤 제스처를 취했고, 어떻게 마인드 컨트롤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그건 숨 쉬고 밥 먹는 것처럼 나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으니까. 오늘 저녁 식사 때 젓가락질을 몇 번 했는지 세지 않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 전에 신경정신과 의사가 설명하는 우울증의 사례 유튜브를 보다가 문득, 아주 문득.

내가 거울을 보며 셀프 추방명령을 내리지 않은지 한참 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체 BGM으로 '할렐루야'를 떠올려 주시길.) 더불어 그간 내 안에서 들려왔던 셀프 추방명령이 정말 다행한 일이었구나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생각해봐라. 내 안에서 들렸으니까 망정이지 밖에서 들렸으면 그건 조현병이다.

만성 우울이건, 만성 불안이건 조현병보다는 함께 살아가기 수월하고, 어쨌든 지금은 그 덕분(?)에 심리치료사가 되어서 나와 비슷한 내담자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정도면 정말 천만다행이지 싶다. (자체 BGM 끗.)

이렇게 또 한 고비가 지나고, 나는 그 시간을 버텨 오늘 하루도 잘 살아냈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 하루 살아 숨쉬기도 힘들었던 당신, 당신도 오늘 하루 잘 살아냈다.

버텨내느라 정말 수고했다. (토닥토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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