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연결은 가족이다.
브런치에서 틈이라는 글감을 매주 제시하는 서비스가 있다. 이번 10주차는 [연결]이었다.
나한테 연결이라는 주제를 듣자마자 생각이 든 것은 우리 가족이었다.
우리 가족은 부모님, 큰 누나와 작은 누나 그리고 나 이렇게 5명이다. 우리 가족이 모두가 대전에서 지낼때 (내가 어린이시절에), 늘 다 같이 밥을 먹었다. 집에 분명 식탁이 있었으나, 식탁에 앉지 않고, 오븐과 싱크대 사이에서 앉은뱅이 책상에 옹기종기 밥을 먹었다. 엄마가 오븐에서 갓 구운 고등어나 삼겹살을 꺼내서 그릇에 두면 다 같이 메뚜기떼처럼 해치웠다. 정말 많이 먹던 시절이고, 나는 어렸을 때 그런 순간의 기억이 많다. 어떤 때는 엄마가 빵을 할 때도 있었다. 적어도 내가 어렸을 때는 "우리 가족은 대전의 오븐 앞에서 다 같이" 모여있었다.
그러다가 누나들이 서울로 대학을 가고, 나도 학원을 많이 다니면서 집은 천천히 비워지기 시작했다. 집이라는 공간의 여백은 점점 커졌다. 그러다가 15년도에 작은 누나가 결혼해서 미국을 가게됐다.
우리 가족은 연말에 가족회의를 한다. 어머니께서 맛있는 걸 해주시고 그걸 먹으면서 보통 연기대상을 보면서 재야의 종소리를 듣는 것이다(왜 늘 연기대상이었는지 글을 쓰는 지금 의문이 든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전에 아빠가 요르단에 파견나가서 한 3개월간 있던 적이 있는데, 연말을 포함해서 계셨다. 그래서 대전에 있는 나와 엄마, 서울에 있는 큰 누나, 미국에 있는 작은 누나, 요르단에 있는 아빠까지 "온라인" 연말회의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나와 엄마는 큰 누나와 같이 서울로 가서 이적 콘서트도 보고, 서울에 있기로 했다. 그래서 서울, 미국, 요르단을 포한한 화상통화를 시작했다. 그때 skype를 처음 써봤다. 코로나 이전에 트렌디한 경험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화상 회의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작은 누나가 울기 시작했다. 한국이 그리워진 것 같았다. 그때 우리 가족이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연결되어있음을 느꼈다. 각자의 목소리, 얼굴이 큰 힘이 되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2년후에 내가 논산 훈련소를 입소하고, 훈련소에서 조교를 하느라 논산에 계속 있었다.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대전과 멀지 않았기 때문에 최소한 부모님이랑은 계속 연결되어있는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부모님이 해결해주시겠지.' 같은 기분말이다. 그동안 초, 중, 고, 대학교, 군대, 석사까지 대전과 부모님과 연결되어있었다.
지금은 부모님은 부산에, 나는 대전에, 큰 누나는 서울에, 작은 누나는 여름부터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예정이다. 나도 돌아오는 가을이면 미국 콜로라도로 갈 예정이다. 몇 달전에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편도행 티켓을 끊었다. 티켓을 끊으면서 대전의 그 앉은뱅이 식탁이 떠올랐다. 조그만한 식탁에서 같이 밥 먹던 우리 가족인데, 나뭇가지들처럼 힘차게 쭉쭉 뻗어나간다. 누나들은 결혼도 하고, 애기도 낳고, 공부나 일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한 뿌리에서 나온 가족이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있더라도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한다.
나한테 연결은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