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과 규칙 속에 내재된 불안.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자신만의 정갈한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청소부 히라야마의 일상을 통해 평안과 불안 사이의 미세한 간극을 조명합니다. 그리고 그 간극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살은 매일 카메라 필름에 담겨 기록되고 히라야마의 꿈속을 가득 메웁니다.
영화는 제목처럼 완벽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히라야마의 일상에 예기치 못한 사건을 끊임없이 던지며 그의 잔잔한 내면에 파동을 일으키죠. 그러면서 히라야마는 서서히 살아내기가 아닌 살아가기에 대한 생각에 잠깁니다. 덩달아 내내 평온했던 그의 표정도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히라야마에게 살아내기는 오랜 습관을 반복하는 일에 지나지 않지만, 살아가기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살아가기에 대한 질문은 안정된 궤도에 안착한 것처럼 보이는 장년의 삶에 던져지며 과묵한 그를 더욱 침잠하게 만듭니다.
오랜 필모그래피가 증명하듯 감독 빔 벤더스는 단순히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감독은 아닙니다. 오히려 회의주의적인 시각으로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조명하고 인간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삶의 복잡한 본질과 정체성을 탐구하죠. 그러니 그에게 삶이란 히라야마의 일상처럼 정갈한 무언가가 아니라, 히라야마의 꿈처럼 삶의 단상이 여러 겹으로 교차되며 드러나는 추상화 같은 겁니다. 명료하게 정의할 순 없지만 무엇이 느껴지는지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퍼펙트 데이즈>의 선형적 서사 구조는 역설적으로 히라야마의 얽히고설킨 심리적 실타래를 헤집게 만드는 기폭제가 됩니다. 철저히 정해진 행동만 반복하며 일자로 뻗어나가는 일상은 히라야마가 오랜 시행착오를 거치며 구축한 습관이자 그 스스로 무언가를 포기한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인지 대사 한 마디 없는 영화 초반부에서 우리는 그의 지난 삶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무엇이 그를 침묵하게 만들었으며, 무엇이 그의 삶을 이토록 간단명료하게 만들었을지에 대해서 말이죠.
히라야마의 일상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건 바로 식물을 가꾸는 것과 공원에 앉아 나뭇가지 사이의 햇살을 카메라로 찍는 일입니다. 여기서 식물과 햇살의 공통점은 바로 ‘찰나의 존재’라는 겁니다. 며칠 혹은 잠깐만 한 눈을 팔아도 시들어버리거나 사라지는 존재들이죠. 그렇게 히라야마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사라지는 존재들을 담고 담으며 뭐든 쉽게 사라지는 시대에 역행하는 삶을 택합니다. 7-80년대 음악을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로 듣고, 오래 전 출간된 소설들을 정독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죠. 오래된 것들을 지키고 즐기며 일상과 지난 추억을 공허하게 만들지 않는 것. 그의 일상에 현재에 부합하는 새로운 문물이 보이지 않는 건 바로 이런 삶의 자세에서 비롯된 겁니다.
공교롭게도 그가 즐기는 음악과 소설의 내용도 히라야마의 일상과 내면에 맞닿아 있습니다. 영화 오프닝에 등장하는 The Animals의 <House of the rising sun>은 잘못된 삶에 대한 후회를 털어놓는 화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히라야마의 결연하고도 활기찬 표정과 대조되며 그의 일상을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끔 만듭니다. 그리고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의 정열>과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1>은 공통적으로 일상으로부터 도피하는 인물들의 불안한 정서를 조명하는 소설입니다. 이는 히라야마가 밤마다 이 책들을 탐독하는 장면에 깔린 불안의 그림자를 짐작하게 만들죠. 덩달아 책을 덮은 후 화면을 뒤덮는 히라야마의 꿈도 이런 불안감과 비슷하게 다가옵니다.
여기서 히라야마의 꿈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꿈의 피사체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만큼 형체가 흐릿하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흑백으로 표현된다는 거죠.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주창한 꿈의 해석 개념을 살펴보면 꿈이란 본디 낮의 잔재, 즉 낮에 접한 이미지가 과거의 경험과 심리적 기제와 맞물려 응축되고 형상화된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영화 속 꿈을 자세히 살펴보면 히라야마의 일상이 남긴 잔상을 어렴풋이 발견할 수 있죠. 근데 중요한 건 이 잔상들이 흐릿하게 그려진다는 건데, 이는 마치 마음 속에 응축된 욕구를 애써 다른 잔상들로 에두르며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게끔 하는, 히라야마의 강력한 심리 기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앞서 말을 아끼고 절제된 일상을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무의식이 표출되는 꿈에선 의식과 욕구가 중첩되어 나타난다고 볼 수 있죠.
이렇듯 복잡한 꿈이 흑백으로 표상된다는 것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검은색과 흰색 딱 2개의 색깔로만 그려지는 꿈은 빛에 대한 히라야마의 갈망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다가옵니다. 영화 초반부 ‘어둠 속에서’라는 말로 시작하며 연달아 비춰지는 꿈들에서 선명한 피사체는 모두 밝은 빛을 띄고 있습니다. 마치 히라야마가 공원에서 카메라로 포착하는 빛처럼 말이죠. 이는 어둠 사이를 비집고 내리쬐는 햇빛을 놓치지 않겠다는 그의 본능적인 갈망이 투영된 결과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 이면에 그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어둠이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죠.
아버지와 오랜 갈등을 겪으며 연을 끊은 듯한 히라야마의 과거. 그 갈등의 본질이 무엇인지 몰라도 그에게 아버지를 등진 과거는 후회와 외면으로 가득한 순간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꿈속에서도 아버지의 손을 잡은 아이들의 손이 나오는 등 어린 시절의 잔상이 그려지죠. 그렇지만 히라야마는 지난 날의 선택을 뒤집진 않습니다. 그 스스로도 오랜 어둠을 완전히 걷어낼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대신 그는 조금씩 변하고자 노력합니다. 조카 니코와의 만남 이후로 철칙 같던 일상의 습관을 조금 미루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말이죠. 더불어 자주 가는 선술집 사장의 전 남편 토모야마의 이야기를 들은 후 두 사람이 그림자 밟기 놀이를 하는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히라야마가 토모야마의 그림자에 자신의 그림자를 겹치며 더 어두워진 것 같지 않냐고 말하는 장면은 변화된 그의 심경을 대변하는 대목입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다는 깨달음. 낮에 나뭇가지 틈새의 빛을 쫓듯 밤에는 그림자를 쫓겠다는 다짐. 경쾌한 발걸음으로 토모야마의 그림자를 밟는 히라야마의 모습은 이 모든 게 담겨있는 마냥 가장 생동감 넘치게 다가오죠.
그렇게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여느 때와 같이 노래를 들으며 출근하는 히라야마의 마지막 표정엔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모든 메시지가 다 담겨 있습니다. 삶이란 원래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것이기에 굳은 다짐마저 때론 무의미해지는 것. 히라야마의 강렬하고도 입체적인 표정은 이런 빔 벤더스의 오랜 철학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결과물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죠. 우는 듯하면서도 웃는 것 같은 그의 얼굴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짜 히라야마를 만난 것 같이 개운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소 지난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영화의 서사가 왜 그렇게 그려져야만 했는지 역설적으로 깨닫게 되죠.
<퍼펙트 데이즈>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의 가치란 무엇인지 섬세하고도 깊은 시선으로 보여줍니다. 마음대로 되는 게 없을지라도 행복의 창구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행복을 진짜 행복이라 착각하지 말 것.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듯 일상도 나도 변한다는 걸 인정할 것. 그리고 이 모든 걸 경험하며 사는 게 인생이라는 걸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