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현대 미술의 제왕이라 불리는 제프 쿤스의 작품 '파란색 풍선개'가 관람객의 실수로 깨진 사건이 있었죠. 그런데 전 세계가 놀란 건 '깨졌다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깨져서 더 비싸졌다는 사실'이었죠. 누군가 예술 작품과 공산품의 차이를 묻는다면 이 예시가 답이 될 겁니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에 누군가의 스토리가 입혀진다면 그 순간부터 작품의 물리적인 형태는 무의미해집니다. 조각난 파편 하나를 두고 부르는 게 값이 되거나 예술가의 장구한 서사에 기념비적인 전환점이 마련되죠. 흠집 하나만 생겨도 가치가 곤두박질치는 공산품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왜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술 작품엔 서사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서사는 희소성 같은 자본 논리로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고 유일하죠. 유일한 시간과 유일한 장소에서 유일한 주체에 의해 발생한 유일한 사건. 물 흐르듯 이어지는 우연이 입혀진 작품은 비교불가한 우위에 서게 됩니다. 희소성은 그 이후에나 거론되는 가치죠.
현대 예술에선 서사가 더욱 중요합니다. 예술가들이 이전 세대들보다 모호한 스탠스를 취하기 때문이죠. 주제와 피사체가 분명했던 르네상스 시대를 지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추상이라는 단어가 예술계를 잠식했고 정형화된 형태를 붕괴시킨 작품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해석할 여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가치가 있다고 믿으면서 말입니다. 현대 미술을 사랑하는 이들은 물감을 흩뿌리며 찰나의 순간을 담은 잭슨 폴락의 작품이나 형이상학적인 구성으로 가득찬 바실리 칸딘스키의 추상 회화를 보면서 저마다의 해석을 내놓습니다. 작품을 보고 느낀다는 행위 자체가 창조적인 일이 된 것이죠.
그렇다고 현대 예술의 추상성이 모호함을 앞세워 서사를 등한시할까요? 아닙니다. 제목 혹은 짧은 설명을 통해 창작자의 의도만큼은 밝혀줍니다. 예술의 완성을 기승전결로 도식화한다면 '기' 정도에만 그치긴 하지만 말이죠. 그럼에도 창작자의 의도라는 서사는 중요합니다. 나머지 세 단계가 오롯이 예술을 소비하는 주체의 몫이라면 창작자의 서사라는 짤막한 가이드라인이 최대 다수가 작품을 이해하며 자신만의 생각으로 재창작하는 즐거움을 보장해주기 때문이죠. 물론 그조차 안중에 두지 않는 고집스러운 예술가들도 있습니다. 영화 감독으로 치자면 아마 데이빗 린치 같은 예술가이겠죠. 무엇이 옳고 그름의 문제를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예술계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한 개인적인 단상일 뿐이니까요.
생각해보면 영화만큼 예술에서 서사가 중요한 카테고리가 있을까 싶습니다. 단일한 형태로 존재하는 작품에서조차 서사가 가치를 드높이는 시대인데 수천 개의 시퀀스가 관객의 배경과 맞물려 다양한 감상과 해석을 도출해내는 예술에서 서사 구축에 안일하다면 이보다 무책임한 회피는 없겠죠. 여기서 안일하다는 말은 단순히 모호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응당 해야할 작업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얘기죠.
예술 영화의 관점에서 영화 <타르>를 수작이라 생각하실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일례로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와 정적인 일상을 감각적으로 조율한 연출력에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력엔 감히 위대하다는 수식어를 붙여도 이상할 게 없죠. 2시간 반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정말 한 사람의 연기에 편승해 흘러간다는 착각이 들 정도니까요. 연출과 연기의 앙상블을 챙겼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반절의 성공을 챙긴 셈입니다.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이 작품에 엄지를 치켜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영화의 서사가 메워지는 걸 방해하는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첫 번째는 정보의 과잉입니다. 문학과 영화의 차이가 있다면 바로 '침묵의 존재 여부'일 겁니다. 문학에선 인칭과 상관없이 모든 맥락을 설명합니다. 인물의 생각을 생략할 수 없으니까요. 행여 생략하고 싶다면 생략하게 되는 배경이라도 서술해줍니다. 어느 방식이 됐든 글을 읽는 이는 정보를 제공받습니다. 반면 영화엔 침묵이 있습니다. 물론 시나리오엔 지시문의 형태로 존재하겠지만 영화로 만들어질 땐 정적만 존재하는 장면이 원테이크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죠. <타르> 역시 침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영화입니다. 고뇌하는 예술가의 생각을 중후하게 전달하기 위해선 이만한 방법이 없을 테니까요.
문제는 그 침묵 사이로 쉴 새없이 파고드는 정보들입니다. 수많은 작곡가와 클래식 용어들, 그것들로 이뤄진 장대한 역사를 대화마다 실어나르는 인물들을 보면 이 영화가 관객과의 단절이라는 초강수를 뒀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오프닝부터 켜켜이 쌓인 정보들로 인해 관객은 역설적으로 리디아가 침묵 속을 헤매는 순간에 몰입하지 못하죠. 보통 관객은 함의를 통해 영화의 지향점을 유추하고 그 지향점을 상징하는 매개를 찾아보죠. 근데 <타르>에선 그 함의가 너무 산재되어 있습니다. 매 시퀀스마다 함의로 둔갑한 정보들이 난무하니 관객은 리디아의 고뇌를 유추하기 어렵죠. 물론 감독은 이 캐릭터의 고뇌에 명확한 형태를 설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정보로 인해 관객이 리디아가 짊어진 고통을 오히려 단순화시켜 이해한다면 영화가 추구하는 깊이가 무색해지는 패착을 낳을 수 있겠단 생각도 들더군요. 고뇌라는 주제를 오롯이 전달하기 위해 침묵이라는 시퀀스가 필수라면 정보의 과잉은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됩니다. 우린 리디아라는 인물이 왜 고뇌하는지를 생각해보고 싶지 위키백과를 보고 싶은 게 아니니까요.
두 번째는 모호해진 개연성입니다. 리디아의 고뇌는 순수한 창작에서만 비롯되는 게 아닙니다. 이해관계를 둘러싼 관계와 사회적인 현상도 그녀를 곤경에 빠뜨리는 중요한 요소죠. 하지만 영화는 그것을 피상적인 단계에 머물게 만듭니다. 문제 지점을 만들지만 가해와 피해의 경계도 모호하고 충돌조차 일으키지 않죠. 누구의 말에도 신뢰를 주지 않으면서 문제를 열린 시각에서 해석하도록 만든 감독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그렇다 해도 그녀가 매일밤 정체 모를 소음에 시달리고 불안에 시달리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선 그 뿌리에 존재하는 사건과 인물에 대한 정성이 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이 영화는 <멀홀랜드 드라이브>나 <홀리 모터스>처럼 난해한 영화와는 결이 다릅니다. 주인공의 정체성이나 직업의식, 가치관도 뚜렷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도 분명하죠. 스토리의 맥조차 잡을 수 없도록 난해해지겠노라 결심한 영화는 아니라는 겁니다. 주인공이 시달리는 고통의 원인을 종잡을 수 없다는 건 열린 결말이라는 말로 치환하기엔 너무 무책임하게 느껴집니다. 자칫 스토리의 결마저 망가뜨릴 수 있는 패를 자신 있게 내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데, 해석은 수용자의 자유라는 영화의 오랜 미덕에 창작자의 중요한 의무를 떠넘겼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기대를 많이 한 작품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만족감보단 아쉬움에 더 많이 사로잡힌 느낌이긴 합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명예와 실력 모두를 짊어져야 하는 예술가의 발걸음이 얼마나 무겁고 외로운지를 성실하게 조명하는 미덕을 갖춘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침묵의 순간에서조차 리디아 타르의 복잡다단한 생각을 오감으로 전달하는 케이트 블란쳇의 위대한 연기가 존재하죠. 한순간도 허투루 쓰지 않는 그녀의 열연과 <헤어질 결심>으로 우리에게 친숙해진 말러의 일상을 한층 더 깊게 느껴보고 싶으시다면 한 번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