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21세기의 셰익스피어는 비극을 사랑하는가?
고요하지만 맹렬한 비극. 삶의 폐부를 있는 힘껏 끄집어내는 갈등과 고뇌. 올해 <이니셰린의 밴시>로 영화계를 뒤흔든 천재 극작가 마틴 맥도나는 연극과 영화를 오가며 인생의 슬픈 단면들을 조명하기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가로막히거나 이유 모를 상실감에 절규하는 사람들이 가득하죠.
개인적으로 올 아카데미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된 작품들 중에서 <이니셰린의 밴시>가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불꽃처럼 맹렬한 아일랜드의 현대사를 다뤘다면, <이니셰린의 밴시>는 물처럼 고요하게 흘러가는 개인의 삶으로 아일랜드의 현대사를 바라봤다고나 할까요.
<이니셰린의 밴시>는 절친했던 두 남자 파드릭과 콜름의 갑작스러운 절교로 시작됩니다. 콜름이 파드릭에게 절교를 선언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그와 나누는 무의미한 대화가 싫어졌기 때문이죠. 콜름은 영문을 모르는 파드릭에게 죽은 뒤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 말합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대화를 나눌 시간에 음악을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말하죠.
하지만 파드릭은 콜름에게 다정함이 남지 않냐고 되물으며 두 사람의 꼬인 마음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손수 만든 예술을 남기고 싶은 자와 평범하지만 따뜻한 다정함을 남기고 싶은 자의 갈등은 혼란한 시대를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대하는 아일랜드인들의 갈등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이 1920년대 아일랜드라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말이죠.
파드릭과 콜름의 갈등은 1921년 체결된 영국-아일랜드 조약 이후 빚어진 갈등의 은유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일랜드의 자치를 인정하되 대영 제국의 휘하에 둔다는 조약의 내용을 두고 아일랜드인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격렬한 갈등에 휩싸입니다. 찬성 측은 조약을 미래에 있을 완전독립의 발판으로 삼자는 의견을 내세웠고 반대 측은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완전독립을 쟁취하자는 입장을 고수했죠.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함께 싸웠던 이들의 균열은 파드릭과 콜름 이 두 남자의 절교를 통해 더욱 선명해집니다. 변화를 꿈꾸는 누군가에겐 그저 평범하길 바라는 이가 따분해 보이고, 그냥 평범한 게 좋은 누군가에겐 변화를 갈구하는 이가 피곤해 보이듯이, 다름을 인정하기보단 배척하고 단절하려 애쓰는 모습은 당대 아일랜드인들의 분열을 대변하기에 충분하죠.
그렇다고 해서 영화는 두 사람의 갈등을 시대적인 아픔에 묶어두기만 하진 않습니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삶을 바라보는 자세에 따라 달라지는 관계의 본질에 집중합니다.
파드릭은 살아가는 과정에 의미를 둡니다. 다정한 마음과 저녁에 마시는 맥주 한 잔만으로도 삶의 의미가 충분한 인물이죠. 하지만 콜름에겐 죽음 뒤에 남겨질 결과가 더 중요합니다. 자신의 존재가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 휩싸여 있는 것이죠. 그렇게 영화는 두 사람이 가진 삶의 목표가 절대 교차될 수 없다는 걸 수없이 비춰줍니다.
파국으로 치닫는 관계에서 부각되는 키워드는 바로 착각입니다. 파드릭은 절교하자는 콜름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가령 만우절이라는 걸 알고 콜름에게 너스레를 떨거나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말해달라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모두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자신한테 있다고 믿는 착각에서 비롯된 행동들이죠.
콜름도 착각에서 자유롭진 않습니다. 스스로 창작한 음악이 자신의 유산이라 믿으며 열과 성을 다하지만 정작 주변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따분하다고 여기죠. 모차르트까지 언급하며 음악에 남은 생을 쏟겠다는 그의 말로 미뤄보면 콜름은 단순히 음악을 남기는 걸 넘어 위대한 무언가를 만들고 남기고자 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주변의 미지근한 반응은 그의 결연함을 무색하게 만들 뿐이죠.
이렇게 마틴 맥도나는 착각이라는 개념을 통해 의지만으로 이겨낼 수 없는 한계에 가로막히는 인물들을 조명합니다. 파드릭은 말을 걸 때마다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던지는 콜름 앞에서, 콜름은 손가락이 사라질 때마다 연주할 수 없게 되는 바이올린 앞에서 체념의 정서를 마주하죠. 이토록 자기파괴적인 결과까지 불러오는 두 사람은 후반부로 치닫을수록 과연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에 봉착합니다.
영화 후반부터 마틴 맥도나는 21세기의 셰익스피어라는 별명에 걸맞게 불행한 운명에 직면한 인물들의 선택을 그려냅니다. 파드릭이 애지중지하는 당나귀 제니가 콜름의 손가락을 삼키다 죽게 되자 그는 콜름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셰익스피어식 복수의 근간이 되는 ‘개인 내부에서 진행되는 도덕적 갈등’을 조명합니다. 마치 햄릿이 복수를 위해 선택하는 살인엔 도덕성이 훼손되는 결과가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끊임없이 고뇌하는 것처럼 말이죠.
햄릿의 복수는 결국 살인을 동반하지만 파드릭의 복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아끼는 당나귀가 죽었으니 콜름이 아끼는 강아지를 똑같이 죽이겠다는 등가교환식 복수도 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콜름을 찾아가 친절하게 복수를 언제 어떤 식으로 단행할 것인지 예고하죠. 처음엔 체념한 듯 보였던 콜름은 끝내 죽음을 피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파드릭의 예고 때문인지 콜름의 두려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2개의 죽음이 마을을 덮칠 것이라 말한 노파의 예언은 빗나갔다는 것이죠.
이 대목이 바로 마틴 맥도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입니다. 운명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가거나 거스르며 비극을 맞이하는 셰익스피어 작품과 다르게 마틴 맥도나의 캐릭터들은 운명을 거스르면서도 희망의 불씨를 살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죽게 될 거라는 걸 알려주는 아일랜드의 유령 ‘밴시’의 존재가 무색하게 말이죠. 결국 영화는 비극을 만드는 건 운명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선택에 달린 문제라는 메시지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운명 같은 부조리 앞에서 고뇌를 거듭하는 인간과 그 인간의 선택이 불러오는 비극, 그리고 비극의 결말을 결정할 키를 다시 인간에게 쥐어주는 일말의 희망. 이것이 진정 마틴 맥도나가 비극을 사랑하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