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lee soyeon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se lee Mar 27. 2021

생각할 여백

봄 4호


이번 주의 생각


2년 전, 서울역 근처에서 첫 자취를 했다. 집에서 학교로 오가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시간적 여유가 생겼지만 이상하게 나는 점점 지쳐갔다. 그래서 하루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본가에 가기로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지하철에 탔고 책을 읽었다. 한강 위를 지날 땐 고개를 들고 창밖을 내다봤고 친구들과 연락하며 하루의 일과를 나눴다. 오늘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대화를 했는지,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영상을 봤는지, 웃긴 에피소드를 말하며 다시 그 일이 눈앞에 벌어진 것 마냥 키득거리며 웃었다. 우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심각한 이야기를 꺼냈다. 답을 구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데 왠지 치유받는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자취를 시작하며 이 소중한 일상을 잃었으니 어쩌면 괜찮지 않은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눈 뜨고 잠드는 순간까지 생각할 여백이 없었던 것 같다. 읽고 싶은 책과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준비물처럼 챙겨 지하철에 올라탈 일이 줄어들었다. 꽃이 반가운 할머니들의 대화를 엿듣고 교복을 입고 현장학습을 가는 고등학생들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는 사실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지하철 방송에서 따뜻한 이야기를 흘러나오고 스크린 도어에서 좋은 시를 만나 친구들에게 들려줄 수 있던 이야기도 줄어들었다. 나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위로를 받고 사랑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안국 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이었다. 전화로 친구와 ‘봄 냄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자연스레 고등학생 때 이야기로 이어졌다. 점심시간에 친구와 팔짱 끼고 산책 가던 연못가, 야자 직전에 아이스크림 먹으며 옥상정원 평상에서 바라보던 노을, 허브로 가득 찬 온실을 아지트로 삼았던 겨울.. 푸릇푸릇하고 싱그러운 기억 들을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그 공간을 가꾸어 주신 미술 선생님이 생각났다. 공터에 땅을 파서 생태연못을, 교실이 5층에 있는 학생들을 위해 옥상에 예쁜 정원을 만들어주셨다. 식물을 심는 것과 학교에 찾아오는 새들을 돌보는 일을 미술을 가르치는 일만큼이나 사랑하셨던 분이었다. 나는 그에게 ‘그림'은 자연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그릇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머무는 자신감이 있었고 타인을 흉내 내거나 자랑하는 법이 없는 선생님이 좋았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감사함이 또다시 밀려왔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늦었지만 감사하다는 인사를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선생님이 쓰신 책과 전시 들을 바탕으로 정보를 모았고 선생님의 책을 팔고 있는 한 독립서점 주인의 도움을 받아 선생님의 연락처를 구했다. 선생님은 새로운 인생 후반을 준비하기 위해 제주에서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고 계신다고 했다. 여전히 자유롭고 푸르게 살아가시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더욱더 나 자신으로 살고 싶어 졌다.



이번 주의 콘텐츠


선생님의 글

그 연못은 나를 감동시켰습니다. ‘나를 감동시켰다’ 이 말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선생이란 남을 바꾸기 전에 자신이 먼저 바뀌어야 하고, 남을 감동시키려면 스스로 감동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울 강을 보면서, 가는 실처럼 흐르는 강을 보면서 ‘여름철에 넘쳐나는 물을 가둬두었다가 필요할 때 쓰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강이 흘러가며 주변의 들과 산과 할미새와 참종개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모르던 철이 없던 때였다. 온통 세상을 내 편리만 좇던 부끄러운 때였다.


Book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운명에 의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과 운명이 자기를 위해 빚어 놓는 모든 것을 기뻐하고 환영하는 것, 자신의 마음속에 좌정하고 있는 신성을 더럽히지도 않고 밖에서 들어오는 무수한 인상 들로 인한 혼잡한 상념 들로 신성을 어지럽히지도 않는 것, 신에게 온전히 복종하여 참되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은 일은 행하지 않음으로써 신성을 끝까지 편안하게 섬기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단순하고 겸손하며 즐거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믿지 않아도 그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고 자신의 삶의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묵묵히 걸어간다.
어떤 사람이 맑고 시원한 물이 솟아나는 샘으로 와서 그 샘을 저주한다고 해도, 그 샘에서는 계속해서 맑고 시원한 물이 솟아 나온다. 그 사람이 흙이나 오물을 그 샘에 던져 넣어도 샘은 그것들에 의해 오염된 채로 있지 않고, 얼마 후면 그것들을 분해해서 씻어내 버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물이 고여있는 웅덩이가 아니라 영원히 솟아나는 샘을 가질 수 있는가. 늘 유의하여 너 자신의 자유를 지키고 선의와 소박함과 겸손함으로 행하는 것이다.


Book

이진순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   

세상을 밝히는 건 위대한 영웅들이 높이 치켜든 불멸의 횃불이 아니라 크리스마스트리의 점 열등처럼 잠깐씩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짧고 단속적인 반짝임이라고 난 믿는다. 좌절과 상처와 굴욕이 상존하는 일상 속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광채를 발화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순간을 담고 싶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웰치스상자사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