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5호
이번 주의 생각
어제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기대하던 <올해의 작가상> 전시를 보러 갔다. 늘 머리에 물음표가 가득 찍히는 예술의 세계. 이해가 아닌 보고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조언을 떠올리며 전시를 둘러봤다. 기억에 남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이슬기 작가의 물이 담긴 유리용기들. 전시장 벽면에 매달려있던 유리용기 속 물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격리되어 만나지 못하는 세계 각지의 지인들이 담아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슬기 작가의 전시명이었던 ‘동동다리거리'. 가볍고 유쾌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김민애 작가의 거대한 구조물들, 그 사이에 놓여있는 우리가 비치는 거울, 잔디에 위트 있게 놓여있던 로켓과 축구공이 인상적 이었고 마지막으로 정희승 작가의 <행복한 루저들>이라는 사진. 작품과 작품의 이름이 딱 붙어서 하나 된 느낌이 들었다. 행복한 루저들?
전시를 보고 나와, 근처 바에서 와인을 마시며 헤더랑 재미있는 일을 하나 벌리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지민이가 낮에 줬던 생일 편지에 대한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음.. 네가 ‘재미'라는 단어를 정말 자주 말하고 어떤 선택을 내릴 때 기준도 ‘재미'일 때가 많잖아. 근데 난 네가 ‘재미'있는 선택을 하기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는 줄 몰랐어. 너에게는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선택이라고 생각 했거든.
대학에서 만난 지민이는 재미 없고 흥미도 없는 일 들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했던 나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사실 대학에 오기 전에 했던 유일한 다짐이 ‘해야 하는 것 말고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였다. 부끄럽지 않게 고등학교 시절을 열심히 보냈지만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은 단 한번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이 뚜렷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하니 따라 했고 어른들이 정답이 정해져있듯 이야기하면 정말 그것이 답인 줄 알던 시절이었다.
지민이에게 20살 때 르네상스 플라자에서 있었던 일을 입 밖으로 꺼냈다. 면접장에서 질문 하나를 받았는데 이게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일, 내가 했던 다짐을 떠올리니 답변을 그럴싸하게 할 의욕도 사라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던 일, 스스로가 너무 실망스러워서 집으로 향하던 그 길에서 했던 생각들, 부끄러워서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던 기억 들까지. 그래서 어제 지민이의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 여전히 어렵지만 그래도 이제 제법 잘 살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재미있는 것을 하면 결과와 무관하게 과정에서 나름의 의미가 생기고 즐거웠던 것 같다. 물론 결과가 좋으면 더 좋지만 그래도 난 불행한 위너가 될 바엔 행복한 루저가 되는 걸 선택하는 편이 좋겠다. 나에겐 그게 진정한 위너가 되는 길일 테니까.
이번 주의 콘텐츠
Book
윤혜정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게르하르트 슈타이들 : 지금까지 만든 책 중 최고의 책을 꼽을 수 있을까요? / 나의 답은 언제나 ‘내가 내일 작업할 책’입니다. 과거의 프로젝트와 기존에 쌓은 모든 경험이 그다음 작품에 고스란히 담길 거니까요.
우고 론디로네 : 내 작품이 수동적인 이유는 작품 앞에 선 관객들이 각자의 감정을 투영할 수 있도록 결말을 열어 두기 때문이죠.
제니 홀저 : 의미 있고 쓸모 있는 것을 내놓고 싶어요. 나의 작업이 너그러움, 박식함, 재미있음, 끔찍함, 사랑스러움, 신비함의 알 수 없는 조합이면 좋겠습니다.
프랑크 게리 : 나는 호기심이 강해서 뭘 찾고 연구하다 보면 어떤 무언가가 다른 쪽으로 저절로 이어지는 걸 자주 경험해요.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이 되는 것, 다른 누군가가 되려 하지 않는 겁니다.
Book
나가오 다케시 <논어의 말>
정말로 단단한 칼은 아무리 갈고닦아도 얇아지지 않는다. 정말로 흰 것은 아무리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 진정으로 확고히 마음에 품은 신념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어떠한 유혹이나 역경 앞에서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말이라는 것은 그저 입 밖으로 내뱉어져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뱉은 한마디의 말이 상황을 바꾸고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말하자면, 순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함으로써 중대한 일을 그르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말이란 신중하고 정확하게 나가야 한다.
모든 일은 시간이 흐르고 진보함에 따라 정교해진다. 그리고 시작할 때의 투박함과 거친 느낌은 서서히 희석되어 사라진다. 그러나 만약 나에게 시작할 무렵의 투박함과 진보에 의한 정교함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 한다면, 나는 전자를 고를 것이다. 무슨 일이든 처음의 열정이 가장 뜨겁고 에너지 넘친다. 거칠고 조잡스럽지만 미래를 향한 기대와 순수함으로 가득 차 있다.
Poem
너의 눈에, 유성우 / 지하철 시민공모작 - 김선민
쏟아지는 것들을 사랑하기로 해
감은 눈 너머로 밤 하늘을 가르고
너의 소원을 안고서 떨어지는
이토록 수많은 별빛을
언젠가 꿈 많던 아이가 속삭인
두 팔 가득 안아도 삐져나와
발끝에 흩어지는 말들을
그저 가만히, 들어주기로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