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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열 Feb 20. 2024

다크보다는 밀크, 웡카 초콜릿

폴 킹, <웡카>, 202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린이와 어른을 위한 동화

어린 시절에 꿈꿨던 환상을 눈앞에 보여준다. 하늘을 날고, 머리색이 변하고, 감정에 솔직해지는 마법 같은 일들이 초콜릿을 먹는 것으로 가능해진다. 초콜릿에 쓰기 위해 기린의 젖을 짜고, 손가방만 한 작은 초콜릿 공장에서 번개가 내리치는 폭풍을 담은 병과 햇살을 담은 병을 부어 초콜릿을 만든다. 장난기를 덜어낸 위즐리 형제의 과자 가게를 보는 것도 같다. 웡카와 누들은 억류당한 숙소에서 탈출해 기린의 젖을 짜고, 동물원의 풍선 묶음을 잡고 날아서 '달콤 백화점'의 지붕을 뛰어논다.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형형색색의 풍선 묶음과 아케이드의 유리지붕은 어렸을 적에는 누구에게나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던 상상의 조각처럼 빛난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과는 다른 이야기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초콜릿 공장의 주인인 '윌리 웡카'의 이야기, 말하자면 프리퀄이다. 주인공의 성격이나 권선징악적 이야기 구성은 <찰리와 초콜릿 공장>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로알드 달 답게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는 공장이 불타거나 거만한 아이들이 끔찍한(?) 최후를 맞는 등 제법 섬뜩한 구석도 있었으나, 이번 영화에서는 기껏해야 초콜릿에 빠져 죽을 뻔한 장면이 나오는 정도다.


복선의 회수, 그러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결말

복선이 꾸준히 등장하고 대부분은 스토리 진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꽉 쥐는 악수와 가문의 반지, 세탁소와 여관을 함께 한다는 설정은 스토리 진행에 긴장감과 당위를 부여한다. 그러나 모두가 힘을 합쳐 준비한 계획도 결국 무너진 위기의 순간, 결정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움파룸파족이다. 어떻게든 웡카의 초콜릿을 훔치려 하고 뒤통수만 치던 움파룸파 족이 문제 해결을 위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작동해서 개연성이 조금 아쉬웠다.


웡카의 초콜릿

초콜릿에 대한 묘사는 상황에 따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폭풍 뒤 한 줄기 햇살, 와인-위스키-포트 와인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밤 외출‘, 용기를 북돋아주는 ‘기린 우유 마카롱‘, 평범한 일상을 뮤지컬로 만들어주는 초콜릿은 화려한 외형뿐 아니라 상황이 겹쳐져 어른도 한 번쯤 맛보고 싶게 한다. 사실 어린이보다는 술맛을 알고 용기를 내기 어렵고 평범한 일상이 지루한 어른이 더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티모시 샬라메

티모시 샬라메는 멋지고 희망에 찬 마술적인 젊은이 그 자체였다. 도시에 주눅 들었던 시골 청년이지만 꿈꾸던 백화점에서 사람들 앞에서 초콜릿 이야기를 할 때는 노련한 약장수처럼 사람들을 휘어잡는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어도 초콜릿 이야기에 눈이 반짝이고, 초콜릿을 통한 문제 해결도 결코 헤매는 법이 없다. 그러나 마약 중독자, 동성애자, 가문을 잃은 후계자처럼 그가 빛났던 배역을 떠올리면 전작 같은 다크 초콜릿 분위기도 잘 어울리겠다 싶었는데, 그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쉽다.


유럽 풍의 현대적인 배경

섬세한 배경 설정이 인상 깊었다. 성당과 광장, 노상 테이블, 아케이드, 트램 등을 보면 유럽의 중소도시가 떠오르는 물리적 환경이지만 등장인물은 국적과 문화, 시대를 초월해서 나타난다. 그들은 백인이 주류인 사회에 대항하지도, 특별히 설정상으로 우대받지도 않는다. 단지 모두 같은 위치에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작중 사회의 중책도, 이야기의 주요 인물도 대체로 남자가 맡고 있어 완전히 같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PC가 전면에 드러나기보다는 평등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구체적인 배경을 만들지 않고자 했던 제작자들의 고민은 아마 이런 배경 설정을 통해 현대적인 동화를 만들고자 했던 의도도 있지 않았을까.


비틀지 않은 따뜻한 동화

선은 선, 악은 악. 지극히 평면적인 등장인물들이 등장하고 선역은 악역의 방해를 선의와 친절에 기대어 극복한다.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경찰을 초콜릿으로 매수하는 악당, 초콜릿을 먹기 위해 신념도 거스르는 성직자가 악역으로 등장하는 황당한 설정은 <크레용 신짱>과도 닮아 있다. 끝이 둥글둥글한 자갈밭 위에서 감독은 비틀지 않고 곧고 따뜻하게,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동화를 빚어냈다. ‘세상의 모든 좋은 일은 꿈에서 시작된다’는 웡카의 어머니의 말은 아마도 방향을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적어도 나에게는 온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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