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에 썼던 일기와 현재의 일기를 함께 엮었습니다.
2022년 봄과 여름을 집필실에서 보냈다. 따뜻해지기 시작하던 봄에 캐리어에 옷 몇 가지를 넣어 서울로 왔는데, 정신 차려보니 가을이다. 사람들이 모두 박수친다. 응원한다. 어떻게 그 사이에 드라마작가가 될 수 있었냐고 묻는다. 별 거 없었다고 말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드라마 쓰는 일이 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예상보다 더 험난하긴 했다. 대본을 쓰는 도중에도 듣보잡 작가 나부랭이는 언제 잘려나갈지 몰랐고. 나의 기획이고 나의 대본이었지만, 편성이 난 순간부터는 나는 그저 글을 쓰는 도구일 뿐이었다.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 일을, 그렇다고 어깨너머로나마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일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선배가 있는 것도 없는 일을 벌였으니 이를 아득바득 갈아야만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면 아까우니까 끝까지 마무리만 해보자고 거듭 마음먹으면서 8번째 대본을 마무리했다. 행복한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촬영이 끝날 때까지도 매일 사건사고가 터졌다. 사람들에게 나 이렇게 힘들었다고 말하기엔 기회가 주어진 것이 행운이라 징징거리기도 힘들었다.
23년 1월 23일에 종영했으니, 7개월이 지났다.
드라마틱하게 내 인생이 달라졌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여전히 나는 나를 의심하고, 내가 쓴 글을 창피해한다. 하지만 어떤 보이지 않는 인생의 레벨에서 한 단계 올라선 기분이다. 자만은 아니지만 자신감이 조금은 생겼고, 두려움은 더 커졌다. 역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 때 즐기기가 쉽다. 무언가 성취했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진다. 하지만 두려움은 늘 행복을 빼앗는 도둑이기 때문에 경계하려고 한다. 여전히 내일이 없는 듯, 미래 따위 걱정 없다는 듯 그렇게 글을 쓰려한다. 될 대로 되라지 하고.
그래도 같이 고생한 사람들이 제 몫을 챙겨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나는 매일 출근을 하고, 혼자서 계속 글을 쓴다. 회사에서 조금 쉬어도 좋다고 하지만, 쉬지 않는다. 망하는 건 괜찮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고 망하는 건 싫으니까. 이렇게 했는데도 안돼? 그럼 말어! 이렇게 쿨하게 망하려고.
이사를 하면서 책장 정리를 했다. 책은 계속 늘어나고 책장의 용량은 한계가 있으니 오래되고 다시 읽지 않는 책, 소장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책은 버리기로 했다. 끊임없이 글을 쓰지 않는 작가는 시간이 지나면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때 '이 작가 감성 미쳤다!'며 환호했던 책의 저자는 신간을 내지 않았고, 나는 그의 책을 나눔 박스에 담는다.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예요? 하면 10년 전에 좋아했지만, 지금은 책을 내지 않는 작가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그 책을 좋아했었다.' 과거 형이다.
작가는 역시 끊임없이 글을 써야 하고 세상에 내놓아야 하고 평가받아야 한다. 그래야 녹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