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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도리작가 Sep 10. 2021

완벽한 날의 사유

완벽한 날이 있다면 그건 바로 오늘일까?

'완벽'이라 인간이 꿈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신의 영역을 침범했다 혹여 신들에게 노여움을 사서 그 완벽에 금이라도 갈까 봐 감히 쓸 수 없는 말인데 그래도 오늘은 써야겠다.

완벽한 날이라고


평소보다 더 빨리 일어난 딸은 입맛이 없었을 텐데도 청국장에 밥 한 공기 뚝딱. 하루의 출발이 좋다.

아들이 새로 산 간절기 셔츠를 안 입으면 어쩌나 했는데 입을 삐죽이면서도 다행히 입고 간다. 진한 녹색의 셔츠가 하얀 피부의 아들에게 잘 어울려 보기 좋다.

오랜만에 찾아온 맑은 날씨를 그냥 보내기 아까워 굳이 없는 빨래를 긁어 모빨래를 한다. 눈부신 햇살과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제 몫을 한다.

환절기 옷장 정리. 가족 중에 옷이 제일 많은 나. 정리하고 정리해도 매번 한가득 나오는 옷들

오늘도 버릴 옷, 기증할 옷이 잔뜩이다.

식물들을 볕 좋고 환기 잘 되는 베란다에 줄을 세웠다.

식물 키우는 데는 똥 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아이들이 우리 집에만 오면 무럭무럭 자라니 참 대견하다.

최근 분갈이 한 극락조는 제 집이 넓어져서 일가? 눈에 띄게 성장하는 속도가 보인다. 정말 이러다 정글 될라.


슈베르트 즉흥곡 90-3

최근 연습하기 시작한 곡이다. 세상 음악가들은 모두 천재인가?

한 곡 한 곡 어찌 이리도 아름다운지

거실에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슈베르트 곡이 하루 종일 흐른다. 너무나 아름다운 곡이다.

'클래식이란 다 보여주지 않아 섹시하고 아름답다'던 어떤 음악가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조금씩 알아간다.

보여줄 듯 말 듯 음 하나하나 절제하며 조금씩 드러내고 다시 감추다 살며시 보여주는, 종국에는 아쉬움으로 더 갈망하게 되는, 요즘 내게 음악이 그렇다.


은은한 살구빛이 감도는 거실과 방금까지 연습한 듯 흐트러진 피아노

블랙티 한잔과 노트북 치는 소리. 이제 정말 여름 끝자락임을 알리는 힘찬 매미소리

공사를 하는 건지 어디선가 들리는 망치 소리마저 아련하다.



여유로움의 극치를 보여주는구나.

나는 요즘 아주 한가하게 살았다. 너무 놀았나 싶게 하고 싶은 것만 했다.

작가의 고뇌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글 안 쓴지도 한참 되었다. - 그래도 최근에 산 양장 노트에는 가끔 뭔가 끄적거렸다. 브런치에 쓰고 발행하기는 좀 거시기하거나 남사스러운 것들 위주로-

하여간 브런치는 참 오랜만이다. 너무 놀아서 그런가 사실 생각도 좀 무디어지고 휙휙 지나가는 사유의 끝자락을 눈 멀뚱히 뜨고 놓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 사이 누군가는 또 내 글을 어떻게 찾았는지 가뭄에 콩 나듯 라이킷도 하고 심지어 구독 버튼까지 눌러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그런 분들한테도 못할 짓이고 그래도 내가 브런치 작가인데 너무 했다 싶다. 반성하자.


나의 일상은 계속되었다.

피아노를 꾸준히 연습했고 -집에서 폼 잡고 내 맘대로 칠 정도는 되었다. 선생님 앞에서는 배운 대로, 혼자 있을 때는 완전히 내 감정대로-

피아노만큼은 아니지만 골프 연습도 꾸준히 했으니 벌써 골프 입문한 지 6개월이다.

조금 부끄럽지만 밝히자면 최근 드라이버 비거리 150을 찍었다.

필드보다-기분 좋으라고- 스크린 기록이 더 잘 나온다고 하던데 그래도 너무 신나서 사진을 다 찍고 남편한테 자랑했다.

참고로 연습장에서 나는 별로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이다. 선생님이 좀 한심하게 쳐다보는 것이 단순히 기분 탓이길 바란다.

하여간 그런 학생이지만 레슨도 얼추 한 바퀴 돌아 이제 열흘 후에는 그래 필드라는 것이 뭔지 나도 맛을 보기로 했다.

웃픈 사실을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연습은 대충 하면서 요즘 골프 의상에 더 신경이 쓰인다는 것이다. 초보들은 하여간 대체로 이렇다.


피아노든 골프든 즐겁고 풍요롭게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취미들인데 조금씩 써먹게 되어 기분 좋다. 아주 한가로움에 복에 겨웠다고 욕할 사람이 있을까?

사람이란 자고로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지. 맨날 그렇게 놀기만 해서야

존재가치가 그렇게 가벼워서야 그렇게 사느니 안 사는 게 낫지 않은가????

뭐 혈기왕성한 20대에는 이런 생각으로 맨날 심각한 영화랑 어려운 책 근처에서 놀았던 것 같은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이 있는데 무슨 내용이었더라?

대체 존재 가치가 얼마나 가볍기에 참을 수 없을 정도였을까?


그런데

존재의 가치가 크고 작음은 누가 판단하지? 존재의 가치가 높고 낮음은 누가 결정해?

오늘 아침 클래식 방송 사이 광고시간에 잠깐 스치듯 지나간 말이 있다.

행복하기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행복의 강박에서 벗어나자.

세상에 의미 없는 일은 없다.

뭐 이런 내용이었는데 곰곰 생각하게 되는 말이다.

뭐 그리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일이 있다고.

사는 것 자체가 일이다.



어제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앞자리에 앉았던 세 명의 여성

골프친구들인지 가을에 필드 나가는 얘기로 한창 웃음꽃을 피우던

방금도 건물 위층에 있는 스크린 골프 한 게임치고 온 듯한

재난지원금은 누군 받네 누군 못받네 시샘어린 시선이 오가던

밥 먹고 한 게임 더 치자고 신나던 그 여인들을 한심한 듯 고개 숙이고 비웃었는데

의미 없는 일은 세상에 없단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친목 다지며 열심히 무언가를 하며 행복을 찾는 사람들에게 의미 없다고 평가절하했으니 그분들께 머리 숙여 사과해야겠다.


일을 하면 일을 해서, 놀이를 하면 놀이를 해서

돈을 벌면 벌어서, 돈을 쓰면 누군가를 위해 소비해서

밥을 하면 누군가 맛있게 먹고, 밥을 먹으면 밥 지은 사람이 좋아해고

쉬엄쉬엄하면 천천히 음미하면서 할 수 있고, 부지런히 하면 또 쭉쭉 실력을 쌓을 수 있기에

세상에 의미 없는 일은 없으니 내 잣대로 누군가를 평가절하하거나 나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지


백건우의 피아노 연주가 계속된다. 조금 더 들어야지

완벽한 날 오후의 끝자락이 참 흡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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