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학교에서 우리 지역 교육지원청에서 영재교육생을 선발하니 원하는 사람은 신청하라는 알리미를 받았는데 제목과 첫 단락만 대충 읽고 우리 집은 해당사항이 없는 것 같아서 그냥 흘려버렸다.
3월이라 무슨 무슨 신청, 무슨 무슨 선발 이런 게 하도 많고 용어도 비슷해서 필수사항이 아니면 다 그러려니 코로나 시대에 학원도 겨우 가는데 무슨 새로운 것을 하나 생각했다.
그렇게 끝나는가 했는데 며칠 후 동네 아는 동생이 카톡을 보냈다.
'언니 영재교육 신청했어요?'
'어 영재? 안 했는데 하는 건가? 우린 해당사항 없는 거 같아서'
'오늘이 마감이래요.'
'아 근데 그거 우리 애가 할 만한 거는 아닌 거 같던데? 과제도 진짜 복잡하고 어렵고 신청서도 심사받아야 할걸?'
'아녜요 언니 추첨하는 거고 숙제 같은 거 없던데요? 우린 신청했는데 혹시 하셨나 해서요. 같이 수업받으면 좋을 거 같기도 하고'
어 그런가? 뭐지? 내가 잘못 본건가?
나는 알리미를 찾아 다시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 우리 지역 영재교육원이 작년부터 명칭을 바꾸고 그전에는 선발하던 것을 작년부터 추첨으로 바꾸고 학생수도 대폭 늘렸단다?
주제를 보니 과학 수학 예술 각 분야를 융합한 요즘 유행하는 창의 융합 교육을 할 거란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추첨이라 해도 그전에 아이들 선발해서 교육하던 커리큘럼의 많은 부분을 가져온 프로그램을 우리 아이가 할 수 있으려나? 의심이 들던 찰나
아니지 잠깐만 뭐 못할 것도 없지?
돈도 안 들고 추첨이라는데 작년에 경쟁률이 4-5:1 정도였다니 일단 신청이나 해봐?
순전히 떨어지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 신청했더랬다. 물론 신청하기 전에 아이에게 물어보긴 했다. 소개 영상을 보여주면서 일주일에 한 번 몇 개월간 온라인으로 재미있는 영상도 보면서 수업하는 건데 어때? 할래? 아이는 긴가민가 한다. 우리 예전에 과학관 갔을 때 자기 부상 열차 같은 거 보고 신기했지? 그런 거 수업하는 거야. 어때? 아이는 해보지 뭐 하는 분위기다.
그래서 신청을 했다. 선청서 쓰는데 무슨 자기소개서도 있고 좀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이 예전 영재교육원 때 하던 방식 그대로인가?20년 후 본인이 핸드폰을 개발한다면 어떤 새로운 기능을 탑재하고 싶은지 기술하시오. 추첨할 거면서 무슨 자기소개서를 이렇게 어렵게 쓰라는 건지 이런 문제가 5-6개나 된다. 이건 뭐 평범한 초등 3학년이 쓸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수년간 글 쓰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내가 알아서 내 버렸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몇 주 후 문자 하나가 떡 왔는데
'축하드립니다. 창의융합교육 교육생으로 최종 선발되었습니다. 언제 언제까지 이거 이거 하고 언제 언제까지 저거 저거 하고.......'
어? 합격이네. 잘된 건가? 그 엄마는 어찌 되었나?
최근 그 집에 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먼저 물어보기도 거시기해서 그냥 잠자코 있는데 저녁쯤 그 집에서 먼저 카톡이 왔다. 되었냐고. 우린 떨어졌다고
음 그렇구나. 친구 따라 강남 갔다가 나만 강남에 남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영재교육 학생이 되었다. 며칠에 한 번씩 중요한 공지 문자가 오는데 가장 최근에는 언제까지 구글 클래스룸에 가입하고 언제까지 영상 7개를 시청해야 하고 언제까지 과제를 제출해야 한다는 아주 복잡하고 긴 문자가 왔다. 무슨 스프레드시트까지 첨부한 장문의 문자였다.
안내 영상 시청과 사전과제를 제출하지 않으면 미이수 처리되니 유의하라는 살벌한 내용까지...
정작 그 대상자는 지금 코로나에 걸려 아이도 엄마도 며칠 동안 정신이 하나도 없고 이제야 좀 정신이 들던 차였다.
그래도 기왕지사 뽑힌 거 열심히 해야지 싶어서 문자가 하라는 대로 하나하나 찾아보고 시청하고 하나하나 알아가는데 이건 뭐 알면 알수록 내가 잘 신청한 거 맞나? 오리엔테이션 전까지 내야 하는 사전 과제는 파워포인트 템플릿 2p 길이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거였다. 아니 초등 3학년이 커다란 도화지에 사진 붙이고 그림 그리고 직접 써서 자기 소개하면 되지, 이 남보기 좋은 과제는 누구를 위한 거지? 꼬였구나 싶었다.
아니다. 배우지 않고도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작동할 줄 아는 알파 세대인 아들은 엄마보다 훨씬 잘할 거야. 억지를 써본다.
영재 풍년 시대에 친구 따라 강남 가서 우리도 영재 흉내 한번 내보겠다고 욕심부린 꼴이 참 우습게 되었다.
바야흐로 영재 풍년 시대이다.
나를 포함해서 엄마들은 왜들 그렇게 영재 OO에 목을 맬까?
너무 흔하니까? 영재들이 흔한 게 아니라 영재OO이 너무 흔하니까 그래서 그 많은 자리에 너무 뒤처지지만 않으면 돈 내고 들어갈 수 있으니까? 어느 정도 상위권만 되면 -나 어릴 때 최최상위권이어야 했던 것이- 돈 내고 영재OO에 들어가니까. 영재OO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 흔한 상위권도 안된다는 방증이니까. 좀 비싸도 학원 영재OO에 들어가면 영재고 가고 과학고 간다니까. 그러니 죽으나 사나 한 번씩은 그런 타이틀 하나쯤은 따자 그런 마음일까?
나 어릴 때는 우열반이라고 했다. 우등생반 열등생반
교육의 효율을 따지자면 우열반의 당위성도 맞는 말이긴 하다. 실력이 비슷한 아이들을 모아서 가르치는 것이 학생이나 선생님이나 서로 효율적이라는 거다. 물론 우등생반에 해당하는 얘기다.
열등생반은 어떨까? 친구들아 우리 비록 열등하지만 함께 으쌰 으쌰 해서 우리 수준에 맞게 기본적인 것부터 차근차근 배우면서 전의를 다져보자. 했을까?
아니었겠지. 자포자기하고 자리만 채우고 있다가 집에 갈 시간만 기다렸겠지. 절망을 반항으로 표현하는 아이들과 무관심한선생님들의 불편한 시간이었겠지. 학교가 꼭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열등반의 희생을 전제로 한 당위성이었다는 걸 모르지 않을 거다.
학교를 뭐라 할 수는 없다. 다 나름의 사정이 있다. 학부모들의 요구, 교장의 욕심, 교육청의 권고, 당시 분위기, 유행 뭐 이런 것들.
우열반 제도는 학교의 재량이었기에 물론 시행하지 않는 학교도 있었고 시행하다 중단한 학교도 있었다.
우리 학교는 신설 고등학교였는데 의욕적이었는지 잠깐 동안 우열반을 운영했다.
상중하 정도로 나누어서 방과 후에 수학 보충수업을 했는데 그리 길게 운영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학교가 사립이고 신설학교라 젊은 선생님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젊고 순수한 피가 작용해서였을까? 우열반은 금방 폐지되었다.
나는 어느 반이었냐고? 중간반
중간반이었다. 그걸 듣고 얼마나 안도를 했던지 하위반이 아니라서. 절망하긴 아직 이르니 조금 더 해보자는 씁쓸한 다짐. 하위반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이냐는 서글픈 위로. 상위반의 뜨거운 열기에 애매한 중간반이 뒷받침하면서 몇 달 운영되던 우열반은 그렇게 폐지되었다. 학교는 무엇이 남았을까? 아이들은 무엇을 얻었을까?
그때는 우등생 열등생이 그래도 한 학교에서 부대끼며 살았는데 이제는 영재고니 자사고니 과학고니 똑똑한 아이들만 모아 아예 학교를 만들었다. 서로서로 시너지 효과 내고 멋진 아이들로 평생 인맥 쌓으라고.
인서울과 지방대학, 상류층과 하위층, 점차 심해지는 양극화 중에서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교육분야에서 우리 애들이 어떻게든 주류에 편입하게 하겠다는 부모들의 욕망이 빚어낸 온갖 영재OO들.
우리 첫째가 중3인데 솔직히 성적도 아깝고 성격도 무난하니 기숙사 생활도 잘할 거 같고 또 국제고에 관심을 보이길래 한번 도전해 보겠냐고 제안을 했고 아이는 약간 긴가민가 하면서 고민을 좀 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일반고와 국제고의 장단점에 대한 나의 의견을 말해주고 공부할 사람은 너이기 때문에 결정은 네가 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국제고가 좋다 일반고가 좋다 그런 거는 없으며 어딜 가든 그 상황에 맞춰서 열심히 하면 되는 거라고, 더 좋은 것은 없지만 너에게 더 적합한 곳은 있다고.
물론 이번 건은 한번 해 보고 안되면 말지 하는 생각은 당연히 아니었다.
고민의 시간이 이어졌다. 나는 내심 아이가 '그래, 한번 해볼래' 하고 도전적으로 나왔으면 바랐다. 솔직히 지인들 앞에서 헛물켜는 상상도 했다. 나는 내 맘 속 깊이 꿈틀대는 욕심을 보았다.
아이는 한 일주일 고민하더니 그냥 일반고에 가겠다고 한다. 너무 잘하는 아이들만 있으면 주눅 들고 내신 관리하기도 힘들 거 같다고. 나는 조금 실망했지만 희한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그게 맞지. 지금 아이 상황으론 그게 순리에 맞는 거다. 난무하는 영재들 속에서 아이는 화려하지 않지만 마음 편한 곳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엄마보다 낫다.
아이는 휘둘리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으려 하는데 사실 나는 아직도 그래도 혹시 모른다 하고 있다.
누가 누구를 탓할까? 나도 이러는데
그나저나 친구 따라 강남 갔다 혼자 남은 둘째 영재교육이나 신경 써야겠다. 욕심부리다 이 꼴 났으니 그 값은 치러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