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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Feb 29. 2020

상처를 남기는 이유, '미안해요, 리키'

켄 로치 (Sorry We Missed You, 2019) 

*'미안해요, 리키'를 마지막으로, 작년에 가장 좋았던 6편의 영화에 대한 글은 모두 올릴 수 있었네요. 조만간 2019년 BEST 12 목록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미 50년이 넘게 영국 영화의 한 최전선을 지켜온 켄 로치에게 있어서, 사회의 모서리에서 분투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자 하는 투지는 꺾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켄 로치의 단호한 목소리는 사회적 굴레에도 굴하지 않는 극중 인물의 목소리가 되어 그의 영화 속에서 줄곧 메아리친다. 켄 로치의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마치 평행선상에 놓인 것 같은 그의 신작 ‘미안해요, 리키’는, 사회를 향하는 차가운 비판의 시선과 인물을 향하는 따스한 응원의 시선이 공존하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켄 로치가 희구하는 이상적인 세상을 점점 멀어지게 하는 현실적 장애물이 놓여있는데, 켄 로치는 그러한 제도에 대한 비판을 거침없이 담아내는 와중에도 가장 강력하게 멍울지는 휴먼드라마의 형태로 관객들의 마음에 잊기 힘든 잔상을 남긴다. 그 잔상은 결국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켄 로치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는 방법일 것이다.



‘미안해요, 리키’는 리키(크리스 히친)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인터뷰 자리에서 자신의 경력을 끝없이 나열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리키가 쌓아온 경험의 양이 그가 새롭게 뛰어들려는 일에 별다른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리키에게 업무에 대해 설명해주는 고압적인 상사는 자신을 동업자라 칭하거나 승선(onboard)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결국 그건 하청업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얄팍한 올가미와 다름없어 보인다. 일정한 루트의 배송 물류를 모두 책임지는 택배 하청업체에서 일하며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분투하는 리키는 새로운 밴을 빌리고, 기존의 차를 팔기에 이른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여러 집을 오가며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는 애비(데비 허니우드)는 자신이 방문해야 하는 고객들과의 시간을 맞추기 위해 더욱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리키와 애비의 가족들은 (그것이 팔아버린 ‘차’로 상징되는 물건이든, 가족 간의 ‘정’으로 표상되는 관계이든) 기존의 것들을 희생해서 새로운 것들을 향해 나아가려 하지만, 그것이 한 발짝 내딛는 진전이라기보다는 쳇바퀴 속을 헤매는 정체임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비극은 거기에 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쳇바퀴 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의 절망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수많은 대사들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마음을 후벼판다. ‘사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라는 리키의 한숨어린 탄식도, ‘내 가족 괴롭히지 마’라는 애비의 분노어린 고함도 결국 눈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지난한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리키는 주말도 반납한 채 밴을 타고 기계적으로, 그러나 누구보다도 빠르게 정해진 루트를 돌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리키에게 돌아오는 것은 소변을 볼 시간조차 없어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하는 작은 물병이거나, 자리를 일정 시간 이상 비우는 순간 경고음을 울리기 시작하는 단말기 뿐이다. 애비는 요양보호가 필요한 가정을 돌며 고령의 환자들을 마치 부모님을 대하듯 정성껏 돌본다. 하지만, 그런 애비에게 돌아오는 것은 고객들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수도 없게 하는 회사의 명령이거나, 추가 수당조차 없이 갑작스레 할당된 업무 뿐이다. 그들이 일에 지쳐갈 무렵, 인도 음식을 포장해서 오랜만에 단란한 저녁식사를 하던 그들의 모습이 이 영화에서 모든 가족이 웃고 있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라는 사실은 마음을 저릿하게 한다. (그 순간 애비에게 갑작스런 연락이 오고, 리키의 밴을 타고 모두가 함께 ‘일’을 하러 나선다는 사실은 일말의 행복조차 오래 갈 수 없는 현실을 너무나도 잔인하게 적시한다.) 가족 모두가 이렇게 노력한다면 결국 행복할 수 있을까.



그들은 모두 최선을 다했지만 가족관계는 너무나도 허망하게 엇나가기 시작한다. 그래피티 벽화를 그리는 아들 세브(리스 스톤)는 도둑질까지 하는 등 자꾸만 일탈 행위를 저지르고,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딸 라이자(케이티 프록터)는 삐걱대기 시작하는 가족관계에 정신적으로 불안 증세를 보인다. 가족 간의 불화는, 집 안에 리키가 찍힌 모든 사진에 페인트 스프레이를 뿌리고 집을 나간 세브의 행위로 극대화된다. 이튿날, 밴의 열쇠가 사라지자 리키는 자신을 골탕먹이기 위해 세브가 열쇠를 가지고 집을 나갔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리키의 판단은 틀렸다는 사실이, 라이자가 열쇠를 숨긴 것이 자신이었음을 고백하는 순간 밝혀진다. 라이자는 리키가 밴을 타지 않으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되돌아올 것 같아서 그랬다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과연 리키가 배송업을 시작한 것이 만약 이 모든 불화의 시작이었을까. 리키는 라이자에게는 ‘내 잘못이니 울지 마’라고, 세브에게는 ‘미안해서 어쩌지’라고 되뇌인다. 그러나 리키에게 잘못이 있는가. 왜 사과는 잘못하지 않은 사람의 몫이어야 하는가. 마치 배송에 늦을 때마다 리키가 남겨야 하는 그 허망한 메시지처럼 말이다.


이때 영화 속 켄 로치의 목소리는, 리키가 배송시간을 놓칠 때마다 고객들에게 전해야만 하는 메시지이자 이 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Sorry We Missed You’로 간명하게 요약된다. ‘우리가 당신을 놓쳤네요’라는 사과의 메시지 속 두 개의 대명사가 지칭하는 바가 뒤집히는 순간, ‘미안해요, 리키’를 통해 켄 로치가 역설하는 바가 상징적으로 극대화된다. 고객(you)에게 리키(we)가 제때 도착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문구는, 결국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리키(you)를 사회(we)가 놓치고 말았다는 회한으로 탈바꿈한다. 미안하다는 말은, 영화 내내 그랬던 것처럼 리키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우리 모두가 이 사회의 수많은 리키들에게 해 주어야만 하는 말이었다. 수많은 리키들에 대한 사과는 극중에서 애비의 목소리를 통해 강력하게 전달된다. 배송 중에 괴한에게 습격당한 리키는,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병원에서 엑스레이 결과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때 걸려온 상사의 전화는, 리키의 안부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리키가 끼친 손해에 대한 걱정이었다. 전화기를 빼앗아 든 애비는 사람의 가치에 앞서 물품의 가치를 따지는 상사에게 분노에 찬 일침을 날린다. 이때 애비의 목소리(를 빌린 켄 로치의 목소리)는 상사 개인에 대한 분노가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 리키와 같은 위치에 놓인 이들은 한둘이 아니다. (리키가 엑스레이 결과를 기다리던 병원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제각기의 사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켄 로치는 우리가 수많은 리키들을 놓쳐서는 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고, 그 순간 애비의 목소리를 빌려 시스템과 제도에 대한 분노를 쏟아낸다.



‘미안해요, 리키’에는 크고작은 사건이 일단락된 뒤 덩그러니 남은 가족의 모습을 비춘 채 페이드 아웃으로 쇼트를 끝맺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일을 마치고 늦게 들어와 쇼파에서 잠들어버린 리키를 라이자가 깨워주는 장면, 세브와 리키가 한바탕 다툰 뒤 이를 중재하려던 애비가 홀로 식탁에 남겨지는 장면, 그리고 다친 몸을 이끌고도 손해를 메꾸기 위해 퉁퉁 부은 얼굴로 트럭을 운전하던 리키를 측면으로 비추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랬다. 애비는 (그리고 켄 로치는)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극화된 드라마일 뿐이다. 극중 인물의 외침으로 경종을 울린다고 해도 현실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켄 로치는 반복적인 페이드 아웃을 통해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관객들의 감정적 여운을 천천히 환기한다. 그리고 결국 리키의 모습을 페이드 아웃 처리하며 끝나버리는 영화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사회에 대한 비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가슴아픈 마무리가 된다. 그러나 사회는 결코 변두리의 개인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켄 로치의 확고한 믿음은 리키가 화면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영화가 끝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켄 로치는 그 믿음을 관객에게도 공유한다. 리키에게 남은 상처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마음에도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남는다. 그리고 이런 상처를 남기기 위해서 켄 로치는 계속해서 영화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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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리키 (Sorry We Missed You, 2019)

dir. 켄 로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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