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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Oct 17. 2020

2010-2019: 최고의 영화들

지난 10년 간 어떤 놀라운 영화들이 있었나


2020년도 벌써 삼사반기가 지나갔지만,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영화 개봉이 줄줄이 밀리거나 영화제, 기획전 등이 연달아 취소 내지는 축소되고 있어 새로운 영화에 다들 목말라 있는 이 시점이라면 뒤를 돌아보는 것도 좋은 선택이지 않을까 싶어서, 이전부터 생각해두고 있던 일종의 조촐한 글을 써내려가볼까 합니다. 이름하여 “2010년대 최고의 영화들”입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한 것이 2011년 즈음이었기 때문에, 사실 2010년대의 작품들은 저에게 있어 말하자면 ‘동시대’의 영화들이었다는 점에서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특히나 아래 소개드릴 영화들은 짧은 저의 영화인생을 고스란히 함께 해 온 소중한 영화들이라는 생각이 항상 있었습니다.


선정에 있어서 사실 나름의 원칙은 있었습니다. 예컨대, 최대한 다양한 작품들을 고르고 싶었기 때문에 동일한 감독의 작품은 의도적으로 한 편 이상 넣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특정 감독들의 경우 여러 편이 들어갈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이 리스트에 포함된 감독들의 작품은 다소간의 편차는 있을지언정 대다수가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소개드릴 영화들은 그렇게 저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고르고 또 고른 2010년대의 가장 뛰어난 영화 10편인 동시에, 제가 가장 편애하는 감독들 중 일부의 리스트라고 해도 넓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닐 것 같습니다. 자, 서론이 길었으니 이제 한 편씩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순서는 공개년도 순이고, 순위는 물론 없습니다. 이런 훌륭한 작품들에 순위를 매기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일 테지요.




01 <사랑을 카피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이란/프랑스)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제게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영화감독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가 만든 모든 작품들을 열렬히 좋아하지만, 그가 이란을 떠나 만든 첫 작품이기도 한 2010년작 ‘사랑을 카피하다’는 그의 최고작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세계를 요약한다면, 진실과 거짓 혹은 실제과 기억 사이의 모호한 경계, 그리고 이를 담아내는 진심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의 영화에서 언제나 (악의가 보이지 않는) 거짓말은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흐리는 특유의 화술은 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이 진심을 담아내는 것임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줍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필름과 디지털 사이를 종횡무진 오가는 그의 연출법 역시 중요한 것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님을 역설합니다.

‘사랑을 카피하다’는 이러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긴 걸작입니다. 이란 감독이 프랑스와 영국 배우를 기용해 이탈리아에서 촬영한 이 작품은 얼핏 보면 낯선 이들의 만남을 그린 전형적인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영화의 중반부가 넘어가는 순간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마법처럼 허물어지고 이야기는 예상의 틀을 하나씩 깨부수어 나갑니다. 결국 이 영화는 서툰 남녀 사이의 소동극을 넘어서, 진실과 거짓을 명확하게 알 수 없도록 점차 호도되는 실제과 기억 사이의 괴리를 교묘하게 껴안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담아냈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담겨있는지’에 대한 고찰이어야만 할 것입니다. 결국 이 놀라운 드라마를 통해 그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확고한 신념까지 전달하고 있는 것이죠. ‘사랑을 카피하다’에 담겨있는 것이 영화예술의 창작자로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지닌 진심이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Copie Conforme / Certified Copy, 2010)



02 <자전거 탄 소년> (장-피에르 다르덴/뤽 다르덴, 벨기에)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 감독은 데뷔 이후로 일관되게 사회의 변두리에 내몰린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에 가까울 정도로 건조하게 다루는 작법을 유지해오고 있지만, 흔히 '윤리적인 카메라'라고 수식되곤 하는 그들의 영화세계에는 더하지도 빼지도 않는 지근거리의 카메라를 통해 인물을 보듬어주고자 하는 사려깊은 영화만들기 태도가 그대로 배어나옵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2005년의 ‘더 차일드’, 2008년의 ‘로나의 침묵’, 2011년의 ‘자전거 탄 소년’이야말로 그들의 영화세계에서 정점에 위치해 있는 걸출한 연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 편을 나란히 놓고 보았을 때 영화 외적으로 인상적인 것은 각각 브뤼노, 클로디, 기라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배우 제레미 레니에의 (비유적인 의미로의) 영화 내적인 성장통이기도 합니다. 제레미 레니에는 실제로 다르덴 형제의 '약속'을 통해 데뷔하기도 했으니까요.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과 그 인물이 처한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이고, 그런 의미에서 '자전거 탄 소년'은 보호 없이 세상과 마주하게 된 소년의 드라마인 동시에, 자전거라는 소재를 매개로 세상과 소통하게 된 소년의 성장담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엔딩에서 주인공 시릴의 행동은, 이렇게나 건조한 연출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선사합니다.) '자전거 탄 소년'은 그들의 다른 영화와 마찬가지로 감정적으로 고양되기 쉬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결코 동정을 과열하거나 공감을 유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최근 공개된 '소년 아메드'에 이르기까지) 다르덴 형제의 모든 영화는, 그들이 천착하고 있는 연민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극화해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죠. (Le Gamin au Vélo / The Kid with a Bike, 2011)



03 <멜랑콜리아> (라스 폰 트리에, 덴마크)

덴마크의 라스 폰 트리에만큼이나 만드는 작품마다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감독도 드물 겁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면면만 보자면 정말이지 굉장하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솔직히 그의 모든 작품들을 열렬히 좋아하는 편은 아닐 뿐더러 작품 간에 다소간의 편차도 있다고 생각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다만, 2011년에 그가 '우울증 3부작'의 두 번째로 만든 '멜랑콜리아’만큼은 정말이지 라스 폰 트리에가 만든 작품 중에서 최고라는 찬사를 보내 마땅한 작품입니다. 그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어느 지점에서든 기벽에 가깝게 드러나는 집착이 특징이라 할 수 있을텐데, ‘멜랑콜리아’는 그러한 라스 폰 트리에의 인장이 가장 선명하게 찍혀있는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우울증을 영화의 제목으로까지 선택한 ‘멜랑콜리아’는, 우울이라는 정서를 영화언어를 통해 상징하는 데 있어 탁월한 성취를 자랑합니다.

‘멜랑콜리아’는 근본적으로 이중적입니다. 애초에 (이 영화 속 두 챕터의 제목인) 저스틴과 클레어는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 및 우울의 원인에 이르기까지 서로 대척점에 놓여있습니다. 고정된 카메라를 이용해 회화처럼 촬영한 프롤로그와 정반대로,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로 촬영하기를 고집한 영화 전체의 촬영 방식 역시 서로 대비됩니다. 감내하는 여성과 도망치는 남성을 관념적으로 대조시켜 다루는 점도 그렇습니다. (인물을 관념화하는 것은 사실 ‘우울증 3부작’의 다른 작품인 ‘안티크라이스트’와 ‘님포매니악’에서도 동일합니다.) 세상의 종말을 다루면서도 오직 외딴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일에만 집중하는 ‘멜랑콜리아’는 느릿느릿 시작하지만 서서히 고조되어 관객들을 삼켜버리고야 마는데, 이 배짱을 보자면 ‘멜랑콜리아’는 감독 스스로가 앓았던 우울증의 느낌을 스크린에 고스란히 투영하는 집념의 예술 그 자체입니다. (Melancholia, 2011)



04 <지슬> (오멸, 대한민국)

오멸의 ‘지슬’은 최근 십수년 간 한국영화가 이루어 낸 가장 뛰어난 영화적 성취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역사적인 비극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제주 출신으로서 각본가이자 연출가인 오멸의 작가적 야심과 미학적 비전이 스크린에 얼마나 훌륭하게 투영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걸작입니다. (줄곧 제주 사람들의 영화를 만들어 온 오멸에게 있어, ‘지슬’의 이야기는 꼭 한 번은 다루어야만 했을 관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죠.) ‘지슬’은 이야기의 형식은 물론 그 깊이도 범상치 않습니다. 마치 영화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의식처럼 느껴질 정도로 경건한 동시에 엄숙하기도 한데, 실제로 이 영화는 신위(神位), 신묘(神廟), 음복(飮福) 그리고 소지(燒紙)의 4부로 구성된 형식부터 위령제의 것을 그대로 가져오고 있습니다.

진중하게 접근해야만 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연출법을 견지하고 있는 ‘지슬’의 태도야말로 ‘의식’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이 영화의 목표를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정교하게 촬영된 영화의 모든 장면이 비장하고도 아름답지만, 그 속에서 인물들의 상황은 다소 익살스럽게 연출되어 있기 때문에 극이 후반부로 치달음에 따라 벌어지는 비극적인 상황이 역설적으로 더욱 강조되기까지 합니다. 연기가 자욱한 현장으로 느리게 다가가는 영화의 첫 장면은 마치 관객들을 의식의 현장으로 초대하는 것만 같고, 2부를 마무리하는 디졸브 시퀀스와 3부를 마무리하는 롱테이크 시퀀스는 그야말로 참혹하게 몸서리칩니다. 무엇보다도 4부 소지(燒紙)의 마지막 장면은, ‘종이를 태운다’는 문자적 의미 그대로 잔인한 역사의 희생자들에게 보내는 엄숙한 영화적 위로 그 자체입니다. (지슬 / Jiseul, 2012)



05 <인사이드 르윈> (조엘 코엔/이든 코엔, 미국)

코엔 형제가 만들어 온 숱한 작품들의 면면에서 알 수 있듯 재기 넘치게 내러티브를 전개해 나가는 그들의 능력은 언제나 탁월했지만, 완벽에 가까운 그들의 각본과 연출이 쓸쓸한 여운을 자아내는 음악과 만난 ‘인사이드 르윈’은 정말이지 훌륭한 걸작입니다. 일견 얄궂고 냉소적인 블랙코미디처럼 보이는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것은 마음 한 켠을 따스하게 감아드는 포크송의 정겨운 선율입니다. 일견 기구한 한 음악가의 삶을 흘려넣은 전기영화처럼 보이는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것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을 한 발치 떨어져 바라보는 관조적 태도입니다. 그렇게 ‘인사이드 르윈’에는 (실존 포크 뮤지션을 거울삼아 만든) 인물과 음악에 보내는 한없이 따스한 애정과, (코엔 형제의 여타 작품이 그랬듯이) 인생에 대한 한없이 차가운 시선이 한데 뒤섞여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방향성 없는 로드무비입니다. (극중 고양이의 이름은 ‘율리시스’로 지칭됩니다. 그리고 ‘르윈이 고양이다’라는 의미심장한 대사가 단순히 재미를 위해 등장한 것은 물론 아닐 것입니다.) 로드무비에서는 방향성이 전제되며, 길 위에서 변화한 것들과 성장한 인물의 묘사에 이야기의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그러나 ‘인사이드 르윈’은 이와 정확히 정반대의 지점에 놓여있습니다. 집 없이 떠도는 주인공의 처지에서, 혹은 시작과 끝이 순환하는 것만 같은 영화의 구조에서 드러나듯, ‘인사이드 르윈’의 이야기 자체는 종착점이 없는 궤(軌)와 같이 짜여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복과 변주를 통해 이렇게나 세심하게 짜여진 이야기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코엔 형제가 (일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조적인 태도와 (르윈이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애정어린 태도 사이의 간극에서 느껴지듯 냉기와 온기가 신비롭게 공명하는 바로 그 지점이 되겠죠. (Inside Llewyn Davis, 2013)



06 <사울의 아들> (라슬로 네메스, 헝가리)

라슬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은 2010년대에 등장한 최고의 데뷔작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인 비극을 소재로 삼은 이야기가 지니는 힘 위에, 의도한 바를 절대 굽히지 않는 연출자의 미학적 배짱이 더해지면 이런 어마어마한 데뷔작이 탄생하는 거겠죠. 4:3이라는 좁은 화면 비율을 채택한 뒤에 인물의 뒷모습으로만 화면의 거의 대부분을 채워버렸기 때문에, ‘사울의 아들’을 보는 관객들은 인물의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극도로 제한된 시각적 정보, 혹은 귓가를 계속해서 자극하는 청각적 정보를 통해서만 이야기의 맥을 짚어갈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영화에서 상징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사울이 프레임에 들어오는 순간과 프레임을 떠나는 순간(그리고 각 순간의 맥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의 아들’에서는 사울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양상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죽음에 관여하면서도 애써 자신과의 연관성을 떼어내고자 했던 사울은, (첫 번째로 그가 정면 클로즈업으로 담기는) 어느 순간 이후부터 (두 번째로 그가 정면 클로즈업으로 담기는) 거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투철한 목표를 위해서 움직입니다. 이는 수용소의 끔찍한 현실을 정면으로 목도해야만 하는 지옥 속에서 더 깊고 슬픈 지옥을 마주한 순간, 철저하게 주변인이었던 사울이 비로소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겠죠. 사울을 지독하리만치 따라다니던 카메라의 초점이 사울으로부터 빗겨가는 단 두 순간은 선명한 잔상을 남기고, 보여주는 대신 들려주는 영화 속 목소리와 소음은 예리한 이명을 남깁니다. 라슬로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은 지극히 의도적인 불친절함을 압도감과 경외감으로 짓눌러버리고 마는 놀라운 걸작입니다. (Saul Fia / Son of Saul, 2015)



07 <파라다이스>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러시아)

러시아의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는 이미 1960년대부터 인상적인 작품을 만들어오고 있지만, 이제 노장이 된 그가 2016년에 내놓은 ‘파라다이스’ 역시 놀랍습니다. 이 영화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굉장히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세 주인공의 이야기를 마치 과거의 일화처럼 다루면서 중간중간 인물들의 인터뷰를 삽입하는 식으로 후일담처럼 구성된 모큐멘터리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귀족이지만 혁명군을 통해 아이들을 돕는 올가, 독일의 군인이며 철저하게 국가의 이상적 목표를 위해 움직이는 헬무트, 그리고 프랑스의 관료이며 시대의 급류에서 이익을 좇으려 하는 쥘. 서로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 세 사람의 이야기가 번갈아서 제시되는 한편, 서로 접점이 없어보였던 이야기는 서서히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파라다이스’의 세 인물들은 각자의 낙원을 (그러니까 극의 제목이기도 한 ‘파라다이스’를) 꿈꿉니다. 그 낙원이란 누군가에게는 과거에 대한 동경이며, 누군가에게는 현재에 대한 안주이며, 누군가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입니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처럼 교차되는 세 명의 이야기 속에서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삶에 내가 꿈꾸는 낙원이 개입하자 낙원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 가서야, 비로소 이 영화가 인물들의 인터뷰를 극중에 삽입하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한 이유가 명백해집니다.) 그렇게 그들이 각자의 선택에 따라 맞이하게 된 결말에 이르자, ‘파라다이스’는 세 인물의 운명이 이끄는 서로 다른 결말을 관객들에게 제시하며 묵직한 여운을 남깁니다. 과연 쥘은, 헬무트는, 그리고 올가는, 서로 다른 이상 속에 단단히 뿌리내린 지옥을 딛고 서서도 각자의 낙원으로 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곱씹게 하면서 말이죠. (Рай / Paradise, 2016)



08 <트랜짓> (크리스티안 펫졸트, 독일)

독일 출신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필모그래피는 2010년대에 이르러 원숙한 정점에 다다릅니다. ‘바바라’와 ‘피닉스’도 굉장했지만, 그의 2018년작 ‘트랜짓’은 정말이지 환상적인 걸작입니다. 영화 외적으로 살펴본다면 모호하게 설정된 극의 배경부터가 대담해서, 21세기 현재의 시대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서도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나치 점령기라는 역사적 배경을 과감하게 욱여넣음으로써, 역설적으로 현대의 이슈를 강렬하게 환기시키는 데 훌륭하게 성공합니다. (극중 직접적으로 언급되듯, 그 이슈라 함은 당연하게도 현대 사회가 당면한 난민 문제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영화 속에서 암시되는 두 개의 시간대 (1940년대, 그리고 2010년대) 중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려는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두 시간대의 배경을 문질러 흐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독특한 극의 배경 설정을 통해 얻어진 것은, 과거의 만행과 현재의 과오를 동일시하는 데서 오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일 테고요.

영화 내적으로 살펴본다면 오인과 우연이라는 상징적 모티브를 극 속에서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어서, 인물들이 상대방을 우연히 ‘다른 누군가’로 오인하는 상황이 여러 차례 발생합니다. 인물이 서로의 존재에 대해 무지한 채로 엇갈리는 관계에 놓인다는 점 자체가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이전 작품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한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트랜짓’은 결국 중간자들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딘가에 머물기 위한 (극의 제목이기도 한) ‘통행증’을 얻으려면 어딘가로 떠날 것이라는 증명을 해야만 하는 역설 속에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물들은 서로를 찾아 헤맬 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치 우연처럼 여겨지는 수많은 인연의 고리들은 인물들을 느슨하게 연결합니다. 끊임없이 연쇄하는 오인의 작용, 그리고 이에 맞서는 우연의 반작용은 ‘트랜짓’을 황홀하게 감싸안고 있습니다. (Transit, 2018)



09 <야생 배나무> (누리 빌게 제일란, 터키)

터키의 누리 빌게 제일란은 영화가 영상예술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기에 가장 적절한 작품을 만드는 감독 중 한 명일 것입니다. 사진작가로 커리어를 시작한 그답게 유려하고 감각적인 구도 및 촬영을 자랑하는 그의 작품들은, 여과 없이 드러나는 장광설에 가까운 대사 및 상황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어 하나같이 굉장한 영화적 체험을 선사합니다. 누리 빌게 제일란이 2010년대에 만든 세 작품 중 가장 뛰어난 하나를 고르는 것은 그래서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2011년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나톨리아’와 2014년작 ‘윈터 슬립’ 역시 매우 훌륭하지만, 그의 최근작 ‘야생 배나무’야말로 앞서 언급한 그의 영화세계 속 요소들을 원숙하게 담아내고 있는 누리 빌게 제일란의 대표작 중 하나라 칭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 작품은 공통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굴레를 다각도에서 관찰한 뒤 서술한, 장황하고도 세밀한 세 편의 사례 연구 보고서처럼 느껴집니다.

‘야생 배나무’는 소설가의 꿈을 품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청년의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결국에는 그 윗 세대(혹은 윗 윗 세대까지)로 이어지는 관계의 맥락을 품어냅니다. 과거와 현재를 교묘한 방식으로 은유하는 데 있어서, 이 영화는 지속적으로 ‘늘어뜨린 밧줄’이라는 소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실과 이상을 씁쓸한 방식으로 연결짓는 데 있어서는 모호한 꿈과 인물들의 궤변을 여러 차례 엮어내기도 합니다. 결국 극중 주인공이 완성한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야생 배나무’에서 배나무는 강인하게 살아내야만 하는 세대를 지칭하는 동시에, 나무를 자라게 하기 위해서 파내려가는 ‘우물’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 우물에서는 물이 솟아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물을 파내려가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이 영화의 대답이야말로, ‘야생 배나무’에서 삼대의 이야기를 통해 써내려 간 누리 빌게 제일란의 인간 존재 탐구 보고서의 결론이 되겠죠. (Ahlat Ağacı / The Wild Pear Tree, 2018)



10 <로마> (알폰소 쿠아론, 멕시코)

알폰소 쿠아론이 ‘이 투 마마’ 이후 16년 만에 멕시코로 돌아가 만든 영화인 ‘로마’는 본인의 여타 훌륭한 작품들을 뛰어넘는 그의 최고작입니다. 자신이 각본과 연출은 물론 촬영과 편집까지 모두 담당한 ‘로마’에서, 알폰소 쿠아론은 카메라 뒤의 관찰자로서 존재합니다. 그가 직접 밝혔듯 자신을 키워낸 여성(들)에게 바치는 이 자전적인 영화는 지극히 사적이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공적이고, 지극히 특수한 누군가의 이야기지만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보편적인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결국 ‘로마’는 클레오의 삶을 영화로 만든 것처럼 관객들 모두의 삶 역시 영화가 될 수 있다고 믿는 포부를 가진 영화니까요. 그리고 이건 인생과 영화를 떼어놓고 싶지 않은 (그리고 그럴 수도 없다고 믿는) 알폰소 쿠아론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할 것입니다.

멕시코시티의 중산층 가정에서 일하는 가정부 클레오의 1년을 함께 따라가는 이 영화는, 알폰소 쿠아론의 근작들이 모두 그랬듯 생명의 탄생(과 소멸)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는 동시에,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인물의 성장영화로도 읽힙니다. 거의 완벽에 가깝게 짜여진 모든 프레임의 안과 밖은 서로 시청각적으로 조응하고, 마치 서로 공명하는 듯한 쇼트와 쇼트 그리고 시퀀스와 시퀀스는 러닝타임 내내 유기적으로 맞물립니다. 극장과 영사라는 체험을 다루는 메타시네마로 보아도, 카메라의 방향 그리고 다가올 인생의 궤적을 마치 거울의 상처럼 그려낸 오프닝과 엔딩의 대조로 보아도, ‘로마’는 상징적 함의를 완전하게 담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인간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에 대한 감정적인 울림, 그리고 영화가 영화여야 하는 이유에 대한 기술적인 화두가 ‘로마’에는 모두 담겨있습니다. ‘로마’라는 황홀한 영화적 마법, 저는 이 영화의 모든 순간들을 마음 속에 영원히 담아두고 싶습니다. (Roma, 2018)




이상 10편이었습니다. 앞서 이 작품들은 저에게 동시대의 영화라는 점에서 특별하게 다가온다고 했었죠. 동시대라 함은, 이 영화의 공개 시점에 맞추어 제가 극장에서 이 작품들을 관람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국내 개봉 당시에는 보지 못했던 ‘사랑을 카피하다’를 제외하면, 나머지 9편 모두 극장 개봉 혹은 영화제 공개 당시에 볼 수 있어서 지금 생각하니 매우 뿌듯하네요. 한편 한 감독의 영화는 한 편만 선정하려는 나름의 기준을 세우다 보니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피닉스’ 그리고 누리 빌게 제일란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나톨리아’처럼) 정말 아쉽게 뺀 작품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무리짓기 전에 한 편을 더 언급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핑계를 대자면 이 영화를 위 10편에 넣지 않은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로는 이미 동일한 감독의 다른 영화를 넣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이 영화가 내러티브라는 요소를 완전하게 배제한 실험적인 장르의 극단에 위치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감독의 사후에야 완성된 특별한 의미의 유작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들으셨다면 짐작하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꼭 언급하고 싶은 마지막 작품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24 프레임’입니다.




00 <24 프레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이란/프랑스)

2016년 타계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후에 완성된 유작 '24 프레임'은 만약 '순수영화'라는 구분이 유의미하다면 그 장르의 전형에 가장 들어맞는 영화일지도 모릅니다. 24개의 단편적인 시퀀스를 한 데 모아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옴니버스 영화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러한 형식을 통해 어떠한 줄거리가 전개되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아니오’에 가까울 것입니다. 회화의 한 프레임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놓은 것만 같은 각각의 시퀀스는, 정靜물처럼 짜여진 구성 속에 동動물을 삽입함으로써 회繪화와 영映화의 경계를 흐립니다. 24개의 정적인 프레임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 1초의 동적인 필름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결국 ’24 프레임’은 정靜과 동動의 경계에 선 예술입니다. 애초에 영화란 움직이는 사진을 만들고자 하는 염원에서 출발한 예술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24 프레임’ 속 24개의 단편들은 전체로서는 영화의 형식을 박제하고, 개별로서는 영화의 방향을 은유합니다. 영화는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향하는 걸까요.

무엇보다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마지막 작품 ’24 프레임’은 그가 평생에 걸쳐 품어왔던 고민과 믿음을 절실하게 담아낸 스물 네 조각의 사유입니다. ’24 프레임’에서 내내 은유되는 것은 영화에 있어 중요한 것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라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철학입니다. (이 점은 2015년에 그가 만든 단편 '집으로 데려다 주오'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의 프레임 속 사진에 영상을 덧대듯 후처리한 기법을 통해,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이 영상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도적인 부자연스러움은 사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이제까지 보여주었던 작품들의 주제의식과 그대로 맞닿아 있습니다. 예컨대, ‘클로즈-업’과 ‘체리 향기’ 속 이야기는 왜 다큐멘터리와 픽션 사이의 아슬한 경계 그 어딘가에 위치해 있는 걸까요. 혹은 20세기의 마지막 작품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와 21세기의 첫 작품 ‘텐’은 왜 각각 필름과 디지털로 촬영된 걸까요.

역설적으로 ’24 프레임’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후에 완성되었다는 사실까지 떠올려보면, 결국 ’24 프레임’은 영화에 담긴 단 하나의 진심 이외에는 아무 것도 중요한 것이 없다고 믿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굳은 의지가 표명된 작품으로 느껴집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세계를 단적으로 요약하는 그의 아득한 정점인 동시에, 영화사 전체를 놀라운 은유로 관통하고 있는 이정표적 영화입니다. 저는 ’24 프레임’의 마지막 순간, 영화라는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극점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스스로 영화가 되어 자신의 마지막 프레임을 남기고 세상을 홀연히 떠났습니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었던 것은 감사한 행운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네요. 저는 앞으로 그런 행운을 또 만날 수 있을까요. (24 Frames, 2016)




삐걱거리며 시작된 2020년대, 앞으로 다가올 10년 동안 우리는 어떤 놀라운 영화들을 또 만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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