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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Dec 31. 2020

환상과 처연 사이, 모래시계 요양원

Sanatorium pod Klepsydrą (1973)


보이체크 하스의 이 놀라운 걸작에서, 황홀하게 짜여진 이미지는 조각조각 부서진 내러티브와 초현실적으로 조응합니다. 세속적인 동시에 몽환적인 ‘모래시계 요양원’은 아들이 요양원의 아버지를 방문한다는 가장 단순한 이야기의 틀만 유지한 채 모든 전개를 과감하게 해체해가는데, 그 과정에서 (요양원에 붙박인 아버지로 대표되는) 병든 세대와 (요양원을 방문하는 아들로 대표되는) 잠든 세대의 사이의 관계가 비현실적인 환상 속에서 줄곧 꿈틀거립니다. 그러나 이 두 세대의 갈등은 봉합되지도, 그렇다고 전복되지도 못합니다. 시공간을 섣불리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 초월적인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이 기묘한 여정을 밟아가는 동안, 동일한 공간을 다른 시간의 관점에서 반복 또는 변주하게 하는 기묘한 화술은 결국 모든 것이 끝없이 되풀이될 뿐이라는 서늘함만을 남깁니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등불을 든 눈 먼 인물’의 이미지가 극에서 호출되는 양상을 떠올리면 ‘모래시계 요양원’은, 영원히 모래시계를 뒤집듯 끝없이 회귀하는 피로한 운명의 굴레 속으로 자처해 걸어들어가는 것만 같은 처연함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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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 요양원 / The Hourglass Sanatorium (Sanatorium pod Klepsydrą, 1973)

dir. 보이체크 하스 (폴란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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