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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an 04. 2021

2020년 개봉작 BEST 12

쉽지 않았던 작년 한 해를 풍성하게 해 주었던 최고의 영화 열두 편

2020년은 어느 때와도 다른 한 해였죠. 영화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2019년은 개인적인 일로 매우 바쁜 한 해였기 때문에 개봉작을 많이 챙겨보지 못했는데, 2020년에는 그보다도 더 적은 수의 작품만을 극장에서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해와 비교하면 적지만, 제가 극장에서 한 해 동안 본 80편의 개봉작 중에서 가장 훌륭한 12편을 평소처럼 선정해 보았습니다. (재개봉작, 혹은 영화제나 기획전 등에서 관람한 영화들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작년에 본 168편+α 중에서 최고의 영화는 빔 벤더스의 1976년작 ‘시간의 흐름 속으로’가 되었을 거에요.) 그럼, 12위부터 한 편씩.






12위, <썸원 썸웨어> (세드릭 클라피쉬, 프랑스)

세드릭 클라피쉬는 유머 넘치면서도 섬세한 각본을 통해 청춘의 희노애락을 스크린에 펼쳐내는 데 능숙한 작가이다. 다소 아쉬웠던 ‘브루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이후로 만든 ‘썸원 썸웨어’는 그가 간만에 실력을 발휘한 수작이다. 이웃에 살면서도 서로 교류가 없지만 번번히 엇갈리는 두 남녀의 이야기는 얼핏 닳고 닳은 멜로영화처럼 운을 띄우지만, 결국 ‘썸원 썸웨어’는 흔한 사랑이야기 대신에 앞으로 계속 나아갈 실낱같은 희망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마치 옴니버스처럼 번갈아 진행되는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썸원 썸웨어’가 주목한 것은 두 사람의 상처입은 자아가 스스로를 성찰하고 치료하는 과정 자체일텐데, 그렇기 때문에 ‘썸원 썸웨어’는 ‘너’가 아닌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해야만 했던 두 ’나’의 자아가 어떻게 ‘너’에 대한 인연으로 가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성장드라마일지도 모르겠다. (Someone, Somewhere / Deux Moi, 2019)



11위,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대한민국)

윤단비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남매의 여름밤’은 잊지 못할 순간의 기억들로 가득하다. 소원했던 할아버지와 뜻밖의 여름을 보내게 된 남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드라마는, 남매의 시각을 빌려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사려깊은 구성을 통해 누구나 가지고 있을법한 유년기의 추억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로 전달해낸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모든 크고 작은 사건들은 마치 잊고 있던 사진첩을 한 장씩 넘겨보는 것과도 같아서, 한때는 세상의 전부였던 기억을 어느새 잊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발견한 것처럼 마음 속을 훑어나간다. 그것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나쁜 기억이든, 언제까지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던 좋은 기억이든, 보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가슴 한 켠이 따스해지는 느낌. ‘남매의 여름밤’은 그 제목처럼, 어느 여름밤마다 문득 떠오를 것만 같은 고마운 영화다. (Moving on / 남매의 여름밤, 2019)



10위, <마티아스와 막심> (자비에 돌란, 캐나다)

‘탐 엣 더 팜’ 이후로는 각본과 연출에 집중하던 자비에 돌란이 오랜만에 각본과 연출 그리고 연기를 모두 도맡은 ‘마티아스와 막심’은, 그의 영화에서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한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감정의 결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마미’와 ‘단지 세상의 끝’에서 보여주었던 일종의 영화적 실험을 잠시 뒤로 한 채, 자비에 돌란은 우정과 사랑 사이의 감정이라는 그의 예전 테마로 다시 돌아왔다. 여전히 클로즈업과 포커스아웃 등의 연출적 과장을 거듭 활용함으로써 인물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부딪히는 미묘한 감정을 시각적으로 실어나르려 하는 ‘마티아스와 막심’은 영화의 거의 모든 순간을 오로지 감각에만 집중시킨다. 이번에도 역시 ‘Song for Zula’를 위시한 스코어의 화려한 활용이 눈에 들어오고, 복잡미묘한 감정의 해소와 새로운 시작을 동시에 환기하는 엔딩이 역시나 인상적. (Matthias and Maxime / Matthias et Maxime, 2019)



9위, <테넷> (크리스토퍼 놀란, 미국)

‘테넷’처럼 고집스러운 블록버스터도 드물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여전히 천착하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작품답게, (‘인셉션’에서 꿈 속 시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시간의 지연’이라는 구체적 발상으로 풀어냈던 것처럼) ‘테넷’은 시간 속 여행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시간의 역행’이라는 구체적 발상으로 풀어낸다. 시간여행을 다루는 숱한 영화들에서 시간여행 전과 후의 간극을 무시했던 것과 달리 ‘테넷’은 그 시차 자체를 ‘인버전’이라는 소재를 통해 영화의 동력으로 삼고 있어서, 시간의 순행과 역행 사이에서 복잡하게 꼬인 플롯과 물리적 법칙을 거스르는 시각적 쾌감이 영화의 주요한 무기가 된다. 그러나 사실 ‘테넷’의 핵심은 시간 속에서 뒤얽힌 인물 간의 관계 속에 놓여있었다는 점이 후반부에 이르자 명확해진다. 그렇게, ‘테넷’은 정교한 구조 속 감상적 서사가 중심을 이루던 놀란의 다른 영화와 동일한 선상에 놓인다. (Tenet, 2020)



8위, <썸머 85> (프랑수아 오종, 프랑스)

에이단 체임버스의 소설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를 바탕으로 만든 프랑수아 오종의 신작 ‘썸머 85’는 사회적 편견과 억압보다는 개인이 경험한 강렬한 사랑에만 오롯이 집중함으로써 이렇게나 섬세하게 반짝이는 청춘의 고백을 완성한다. 영화 전체가 일종의 플래쉬백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는, 주인공이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큰 변곡점이 될) 본인에게 벌어진 사건을 글로서 회술해가는 극중극 시점을 채택함으로써 전체 이야기에 ‘되돌아본다’는 감각을 부여한다. 이런 이야기의 구조야말로 (‘썸머 85’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결심한) 작가로서의 오종의 자아가 담겨있는 지점일 것이다. ‘프란츠’, ‘두 개의 사랑’, ‘신의 은총으로’ 그리고 ‘썸머 85’에 이르기까지, 한 동안의 정체에서 벗어나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프랑수아 오종을 보면, 그의 근 20년 간의 필모그래피 중 내게는 최근 몇 년이 가장 흥미롭다. (Summer of 85 / Été 85, 2020)



7위, <마틴 에덴> (피에트로 마르첼로, 이탈리아)

고전적인 향취가 물씬 풍기는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마틴 에덴’은 시대의 풍랑에 휩쓸리지 않으려 했지만 온 몸으로 그 풍랑을 겪어내야만 했던 한 인물의 족적을 따라가는 드라마다. 거친 필름의 입자를 의도적으로 드러낸 것에서부터 ‘마틴 에덴’은 영화와 현실과의 거리를 최대한 벌리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어긋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분투했던 한 인물의 삶을 그려냄으로써 이상과 현실 사이의 필연적인 간극을 메울 수 있을지를 되묻는 영화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의 중심에는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루카 마리넬리의 연기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다. 거의 이 영화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을 그의 얼굴에는, 이미 굳어버린 사회의 틀을 부수고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이념적으로 고뇌하는 것을 넘어 현실적으로 행동하려 했던 자의 슬픈 피로가 그대로 묻어난다. (Martin Eden, 2019)



6위, <소년 아메드> (장-피에르 다르덴/뤽 다르덴, 벨기에)

다르덴 형제는 결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연민하되 결코 동정하지 않는 그들의 엄격한 윤리적 잣대는 ‘소년 아메드’에서도 여전하다. 이슬람 급진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배교자로 여겨지는 인물을 처단하려는 소년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특유의 건조한 다큐멘터리적 작법을 견지하는 와중에도 따스한 시선을 놓지 않는다. 현실적인 소재를 극화하는 지점에서 ‘소년 아메드’는 변화에 대한 태도를 중심에 두고 바라볼 때 흥미롭다. 극단적인 교리에 깊숙이 빠져든 소년이 다른 세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변화’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소년을 감싸안는 영화의 화법은 변해야 한다는 바람을, 소년을 따라가는 영화의 전개는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그리고 소년을 바라보는 영화의 결말은 변해도 된다는 응원을 전하고 있다. 감정적 과잉 하나 없이, 지켜보는 시선만으로도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인물을 보듬는다. (Young Ahmed / Le Jeune Ahmed, 2019)



5위, <페인 앤 글로리> (페드로 알모도바르, 스페인)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신작 ‘페인 앤 글로리’는 두말할 것 없이 그가 만든 가장 개인적인 작품일 것이다. 영화를 만드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내밀한 방백에 가까운 ‘페인 앤 글로리’는, 오롯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기 때문에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특별한 위치에 놓인다. 이제까지 숱한 작품을 함께했던 안토니오 반데라스와 페넬로페 크루즈를 각각 자신의 페르소나 그리고 어머니의 역할로 삼음으로써, 알모도바르는 이제까지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이 두 배우의 시각에서 다시 써내려가겠다고 다짐하는 듯 하다. 현재의 시점으로 과거의 사건과 인물들을 호출해서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이 영화의 화법은, 결국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만들어야 했던 것이 왜 ‘영화’였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게, 영화 안팎의 경계를 아름답게 허무는 ‘페인 앤 글로리’의 마지막 장면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뭉클한 장면 중 하나로 남게 될 것이다. (Pain and Glory / Dolor y Gloria, 2019)



4위, <1917> (샘 멘데스, 영국)

스토리에 대한 고집과 이미지에 대한 천착이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는 샘 멘데스의 ‘1917’은 그의 대표작으로 우뚝 자리매김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계속해서 이어오고 있는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와의 협업은, 영화 전체를 두 개의 시퀀스에 담아내겠다는 다짐과 만나 훨훨 날아오른다. 그러나 ‘1917’이 훌륭한 이유는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귀향’의 모티브가 절절하게 담겨있는 이 영화에서 오프닝과 엔딩의 대비가 담고 있는 바는 물론, 고된 여정의 가운데에서 잃어버린 것과 깨달은 것, 그리고 인물이 프레임에서 놓이는 위치에 이르기까지 ‘1917’은 이 이야기를 겪은 이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가져다주려는 진심어린 노력 그 자체의 산물이기도 하다. 샘 맨데스의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1917’이 쓰여졌다는 점이야말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이 영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역설하고 있기도 하다. (1917, 2019)



3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프랑스)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시종 우아하고 강렬하다. 구석구석이 세심한 터치로 가득한 한 점의 화폭처럼 느껴질 정도의 꽉 찬 밀도로 관객들을 압도하는 굉장한 멜로영화인 동시에, 이야기에 방점이 찍혀야 할 부분에는 과감한 필치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강약 조절이 정확한 멜로영화이기도 하다. ‘죽다mourir’와 ‘달리다courir’를 비롯해 인물 사이에 대조를 이루게 하는 어구들을 통해 두 주인공 사이의 관계를 정립시키는 대사도 훌륭하고, 상대방의 기억을 그림을 통해 간직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통해 사랑 자체를 감각화시키는 작법도 탁월하다. 신화 속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를 두 인물의 숨겨진 사랑에 대입시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지점에서부터 숨을 멎게 만드는 엔딩 시퀀스까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서로를 바라본다’는 시선의 의미를 가장 아름다운 영화적 방식으로 그려낸다. (Portrait of a Lady on Fire /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2019)



2위, <운디네> (크리스티안 펫졸트, 독일)

극의 제목부터 주인공의 이름까지 신화 속 ‘운디네’를 그대로 따온 이 영화에서, 크리스티안 펫졸트는 자신을 떠난 연인을 죽여야 하는 신화의 모티브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그 줄기 속에 본인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그러니까 운디네(파울라 베어)의 직업이 역사학자, 구체적으로는 베를린 도시개발 계획을 해설하는 큐레이터로 설정된 것도, 크리스토프(프란츠 로고스키)의 직업이 물 속 지하세계를 유영하는 산업 잠수부로 설정된 것도 그의 의도가 정확히 드러나는 설계일 것이다. 운디네의 강의에서도 재차 언급되는 베를린의 역사 속 옛 것과 새 것 사이의 관계는 운디네가 경험하는 두 번의 사랑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이 두 차례의 사랑은 어김없이 카페를 배경으로 끝나거나 시작되는데, ‘운디네’에서는 이 두 번의 사랑이 교차하는 시점의 기묘한 시차가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두 번째 사랑이 시작되려던 순간, 첫 번째 사랑이 끝났는지의 여부가 이후 이야기의 분기점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운디네’에 등장하는 카페에는 어항의 크기로 축소된 물 밑 세계가 존재한다. 물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인물들의 사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드러나자,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를 기묘하게 흐리는 ‘운디네’의 숨은 의도야말로 물 속에서의 원형적 관계를 물 밖에서 체현하려는 것임이 비로소 분명해진다. (Undine, 2020)



1위, <트랜짓> (크리스티안 펫졸트, 독일)

‘트랜짓’은 이미 화려하기 그지없는 크리스티안 펫졸트 필모그래피의 정점이다. 영화 외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의 나치 점령기와 21세기의 동시대가 뒤섞인 그 어딘가의 모호한 시간대를 극의 배경으로 설정함으로써, 현재의 난민 이슈를 역설적으로 강렬하게 환기한다. 영화 속 두 가지 시간대(1940년대 그리고 2010년대)의 배경을 의도적으로 문질러 흐리고 있는 ‘트랜짓’은, 그렇기에 과거의 만행과 현재의 과오를 동일시하는 지점에서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품어낸다. 영화 내적으로는 오인과 우연이라는 모티브가 극 속에서 자유자재로 활용되고 있어서, 인물이 상대방을 여러 차례 ‘다른 누군가’로 오인하는 상황이 생기는 한편 인물이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에 대해 무지한 채로 우연히 엇갈리는 관계에 놓인다. (그렇게 ‘트랜짓’은 그의 전작 ‘피닉스’와도 흥미롭게 연결된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트랜짓’은 중간자들의 운명에 관한 영화다. 어딘가에 머물기 위한 (극의 제목이기도 한) ‘통행증’을 얻기 위해서는 어딘가로 떠날 것이라는 증명을 해야만 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물들은 서로를 찾아 헤맨다. 수많은 인연의 고리들은 인물들을 느슨하게 연결하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연쇄하는 오인의 작용과 이에 맞서는 우연의 반작용은 ‘트랜짓’을 황홀하게 감싸안는다. (Transit, 2018)






네, 작년에도 좋은 영화들이 많았지만 저에게 있어 최고의 두 편은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사실 ‘바바라’와 ‘피닉스’ 이후 크리스티안 펫졸트는 저에게 있어 명실상부 현대 독일 최고의 감독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에, 올해 그의 영화 두 편—2018년 전주에서 관람했던 ‘트랜짓’과 2020년 부산에서 관람했던 ‘운디네’—이 나란히 국내에서 정식 개봉할 수 있었던 것은 (시국을 고려하면) 정말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 12편 중 거의 대다수가 현재도 극장에서 상영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관심이 가신다면, 작년을 풍성하게 해 주었던 이 영화들로 한 해를 시작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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