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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31. 2021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회고전

'여행자'에서 '24 프레임'까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품들을 다루고 있지만 (‘여행자’의 일부 내용을 제외하면)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 Through the Olive Trees / زیر درختان زیتون


서울아트시네마에서 5월-6월 동안 진행되었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회고전. 이미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뒤늦게라도 기억해두고 싶어서 이렇게 뜬금없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번 회고전에서 관람한 9편은 그의 초기작 ‘여행자’를 제외하면 모두 이미 본 작품들이었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스크린에서 그의 영화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어떤 영화들은 몇 번이고 볼 때마다 그 울림이 깊어집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모든 영화가 정확히 그렇습니다.


체리 향기 / The Taste of Cherry / ...طعم گيلاس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제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영화감독임은 이미 이 브런치에서도 여러 차례 밝혔던 것 같습니다. 그가 만든 모든 영화를 열렬히 좋아하지만, 특히나 ‘클로즈업’, ‘체리 향기’ 혹은 ‘사랑을 카피하다’는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를 꼽으라면 가장 먼저 떠올릴 영화들이기도 합니다. 그의 유작 '24 프레임' 역시 영화사 전체를 관통하는 기념비적인 걸작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작품들은 하나같이 진실(으로 대표되는 다큐멘터리적 실제)과 거짓(으로 대표되는 픽션적 상상)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세계를 오롯이 보여주는 작품들이기도 합니다.




현실과 영화 사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에 걸쳐 만든 영화들로, 흔히 지그재그 3부작 혹은 코케르 3부작으로 일컬어집니다. 시각적으로 보자면 구불구불 이어지는 이란 코케르 지방의 ‘길’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에 착안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겠지만, 사실 이 세 편 사이의 연결고리는 좀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바로 영화 밖에서 이 세 작품이 조응하는 지점입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 Where Is the Friend's Home? / خانه دوست کجاست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모종의 이유로 친구의 집을 찾아 이웃 마을을 헤매는 아이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로, 촬영지의 비전문 배우들을 캐스팅한 극영화였습니다. 그리고 4년 뒤에 제작된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지진이 발생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촬영지를 방문하는 감독의 이야기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본인의 역할로 전문 배우를 캐스팅했음에도 영화 전반적으로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형식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2년 뒤 제작된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라는 영화의 촬영장에서 벌어지는 실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로 보이지만, 그 실상은 극영화입니다. 그러니까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픽션,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픽션으로 위장한 다큐멘터리, ‘올리브 나무 사이로’는 다큐멘터리로 위장한 픽션입니다. 이 세 편은 서로가 말하자면 안고 안기는 관계에 놓여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 And Life Goes On / زندگی و دیگر هیچ


이 세 편의 영화는 이렇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흐리는 방법)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는데, 사실 3부작을 만드는 도중에 제작된 ‘클로즈업’을 포함해서 그의 다른 작품에서 등장하는 주제의식과도 동일한 선상에 놓여있습니다. 또한 세 작품에서는 공통적으로 인물의 지근거리에서 출발한 카메라가 서서히 멀어지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장면들은 모두 인생을 멀리서 관조하려는 듯한 시선을 통해 인물에게 역설적으로 깊게 다가가는 듯한 환상적인 영화적 경험을 선사합니다.




현실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대표작으로 많은 이들이 ‘클로즈업’, ‘체리 향기’ 내지는 ‘텐’을 꼽습니다. 저는 이 세 작품에 공통적으로 그가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현실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드러나 있다고 믿습니다. 우선적으로, 이 세 작품에는 (앞서 언급한 코케르 3부작과 비슷한 맥락에서) 공통적으로 다큐멘터리의 특성이 엿보입니다.


클로즈업 / Close-Up / کلوزآپ ، نمای نزدیک


‘클로즈업’은 극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지만, 극중에는 실제 상황을 재연하기 위해 극화해서 촬영된 장면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그 둘의 경계선상에 놓여있습니다. ‘체리 향기’는 다큐멘터리보다는 극영화에 가깝지만, ‘체리 향기’에 에필로그처럼 삽입된 장면을 보면 이 작품이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의식을 환기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텐’은 각본 자체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체의 기교가 들어가지 않은 건조한 작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얼핏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각본을 통해 촬영된 극영화입니다.


텐 / Ten / 10


그러니까 이 세 편의 영화는 그 정도가 다를 뿐 모두 극화된 부분이 존재하지만, 현실에 깊게 뿌리내린 문제의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던 영화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 편은 모두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애매한 경계선상에 놓여있습니다. 그렇다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영화(라는 픽션)와 현실(이라는 다큐멘터리)을 구분할 수 없다고, 혹은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영화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영화를 무엇으로 담아낼 것인가.


이번에 처음으로 본 ‘여행자’, 그리고 제 기억이 맞다면 이번에 극장에서 세 번째로 관람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그리고 2018년 전주국제영화제 이후 두 번째로 관람한 '24 프레임'. 이 세 편을 함께 바라보면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소회가 묻어납니다.


여행자 / The Traveller / مسافر


‘여행자’는 도시의 축구 경기에 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소년의 이야기 자체로도 좋지만, 사실 소년이 극중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촬영하는 척만 하는 가짜 카메라의 관점에서 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극중 사진을 찍기 위해 비용을 내는 사람들은 결과물이 아니라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행위 자체에 즐거워하며 삼삼오오 모여듭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수단이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에서 이란 시골 마을의 장례 문화를 기록하기 위해 마을을 방문한 다큐멘터리 감독은 카메라를 통해 담아낼 수 있는 영상물보다 더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카메라로 촬영하기 위해서 마을을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카메라를 여기저기에 내버려둔 채 다닙니다. 중요한 것은 카메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4 프레임'은 극영화의 형태를 철저히 배제한 실험영화에 가까운 동시에, 고정된 프레임 속에서 움직이는 동물들은 심지어 디지털로 합성한 결과물들입니다. (이와 동일한 작법은 그가 마지막으로 만든 단편 ‘집으로 데려다 주오’에서도 드러납니다. 이탈리아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축구공의 모험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고정된 프레임의 사진 속에서 공의 움직임을 의도적으로 합성함으로써 영화의 물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 The Wind Will Carry Us / باد ما را خواهد برد


결국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담아낼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담아낼 것인가’라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역설합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중요한 것은 매체가 아니라 진심입니다. 필름으로 촬영된 20세기의 마지막 영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그리고 디지털로 촬영된 21세기의 첫 영화 ‘텐’을 대조해서 바라보면 영화의 수단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에게 있어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더욱 더 자명해집니다. 결국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필모그래피는 데뷔작 ‘경험’에서 유작 ’24 프레임’에 이르기까지, 영화라는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진심이라고 믿는 그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결과물입니다.




24 프레임 / 24 Frames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 대해서는 할 말이 한참 더 남아있습니다. (이번 회고전의 상영작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던 ‘사랑을 카피하다’와 다른 작품을 연관지어서 보면, 그의 영화세계에서 중요한 키워드를 차지하고 있는 진실과 거짓의 대조에 대해서도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대한 시네아스트였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우리 곁을 떠나간지도 이미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가 만든 영화는 우리 곁에 남아 더욱 더 현실과 깊게 공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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