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작년 한 해 동안 가장 좋았던 열 두 편의 영화들
202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2021년 역시 2020년만큼이나 이상한 한 해였죠. 개인적 사정으로 늦여름부터 미국에 살게 되어서 한국에서 기대중이었던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회고전이나 크리스티안 펫졸트 기획전, 아랍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 전부 다 놓치고 말았지만, 한편으로는 국내 개봉 전인 다양한 작품들을 좀 더 일찍 만날 수 있어서 고맙기도 한 한 해였습니다. 다만 ‘아네트’나 ‘퍼스트 카우’처럼 한국과 미국 개봉 시기가 엇갈려서 아직도 보지 못한 작품들이 있어서 아쉽네요. 덧붙여 정말 궁금한 ‘드라이브 마이 카’ 역시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상황이 이런 만큼 이번에는 기존처럼 한국 개봉작 중에서만 선정하는 대신, 영화제를 포함해서 어떤 식으로든 2021년에 정식 공개된 영화들을 대상으로 가장 좋았던 12편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아쉽게도 리스트에서 빠진 작품들을 고르자면 데이빗 로워리의 ‘그린 나이트’, 미셸 프랑코의 ‘뉴 오더’, 엠마뉘엘 무레의 ‘러브 어페어: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 정도가 있겠네요. 그럼, 12위부터!
‘여자 없는 세상’, ‘토네르’, ‘7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일상 속의 잔잔함과 일렁임을 담아내는 데 특별한 재능을 가진 기욤 브락의 신작 ‘다함께 여름!’은 한마디로 청량한 영화다. 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고 보기도 힘들고 기승전결이 뚜렷한 것도 아니지만, 보는 내내 잔잔한 미소가 입가를 떠나지 않는 그런 매력을 지닌 영화. 영화 속 모든 좌충우돌이 사랑스럽다고 표현하면 적절할까. 얼핏 사소해 보이는 이런 이야기를 한 편의 영화로 옮겨낸 기욤 브락의 의도는 아마도 이 모든 순간들의 소중함을 포착하고자 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언급되듯 그의 영화세계 속에는 에릭 로메르 혹은 자크 로지에의 정서와 함께 기욤 브락 특유의 변주가 녹아들어 있다. ‘다함께 여름!’, 혹은 프랑스어 원제인 ‘전원 탑승’처럼, 한껏 달뜬 즐거운 기운으로 가득한 영화. (All Hands on Deck / À L’abordage)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최고작 중 한 편. 지난 십수년 간 마블 스튜디오의 강점은 항상 영민한 기획력에 있었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그 기획력이 절정에 달했다고 좋을 정도의 놀라움을 선사한다. 근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꾸준히 사랑받았던 ‘스파이더맨’ 영화 시리즈의 정체성과 그 시기를 함께 했던 이들의 추억에 보내는 헌사 그 자체이자,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깔끔하게 매듭짓고 새로운 시대를 위한 초석을 반듯하게 다듬는다. 다소 고개가 갸우뚱할 수도 있는 설정이나 더러 미흡한 플롯의 짜임새를 시리즈에 대한 애정으로 돌파해버리는 것만 같은데, 관객들의 기대감을 어떻게 활용하고 충족시켜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식상해질 법도 한 히어로 블록버스터를 보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차오르는 경험을 정말이지 간만에 느끼게 한 작품. (Spider-Man: No Way Home)
이반 트베르도프스키의 신작 ‘컨퍼런스’는 독특한 발상만 돋보이던 전작 ‘동물학’에서 한층 더 나아가, 절치부심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이야기의 잠재력과 세공력이 굉장하다.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실제 인질극을 소재로 삼은 뒤 사건 이후 십수년이 지난 이들의 ‘재회’를 통해서 과거의 트라우마를 굳이 점화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컨퍼런스’에서 중요한 것은, ‘잊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소위 ‘컨퍼런스’에 참여한 당사자들은 물론 관객들에게까지 사건 당시의 참상이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구체화되자, 결국 이 비극의 실상은 모두를 괴롭히는 기억이 되어 돌아온다. 그렇게 수면 위로 떠오른 기억들을 두고 ‘컨퍼런스’는 묵직하고도 예리한 시선으로 사건을 관찰하고 질문을 던진다. 과연 잊어야 하냐고,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면 어떻게 잊어야 하냐고. (Conference / Конференция)
야스밀라 즈바니치의 신작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촘촘히 짜여진 드라마이자,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의 참상을 진진하게 담아낸 고발극이다. 보스니아 학살의 전개와 그 여파를 아이다라는 캐릭터를 통해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는데, 아이다의 직업을 UN군 통역가로 설정함으로써 사건을 좀 더 깊숙히서 바라보는 동시에 그 상흔을 직접적으로 어루만지는 야스밀라 즈바니치의 의도는 정확하게 핵심을 관통한다.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과감하지만, 실제 역사의 희생자들이 품고 있는 상처를 보듬고자 하는 영화의 화법에 있어서는 이를 데 없이 세심하다. 결국 이 이야기를 세상에 재차 알리기 위해 영화는 아이다라는 존재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 현재진행형인 이 비극 가운데, 아이다는 어디로 가고 있냐고. (Quo Vadis, Aida?)
강렬한 오프닝과 잊지 못할 엔딩 사이를 숨도 쉬지 않고 달려가는 듯한 격정으로 넘치는 영화. 치밀하게 짜여진 각본과 곳곳에 놓인 소재를 영리하게 활용하는 동시에, 영화가 지닌 영상매체로서의 장점을 훌륭하게 이용할 줄도 안다. 이미 전세계적인 유명세를 지닌 동명의 작품을 제목으로 삼은 것은 여러 층위에서 이 작품이 기존 ‘레 미제라블’의 함의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임은 물론, 그 자체로 ‘비참한 이들’을 지칭하는 원제의 의미가 이 영화의 답답한 상황에 기가 막히게 들어맞기 때문일 것이다. 인물들을 점차 집어삼키는 갈등은 극이 고조될수록 혼돈을 향해 치닫지만, 누가 시작했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해결의 실마리마저 보이지 않는 딜레마를 다루는 영화의 시선이 탁월하다. 본인이 이전에 만든 동명의 단편을 장편 데뷔작으로 발전시킨 라쥬 리의 앞으로의 행보가 너무나도 기대되는 수작. (Les Misérables)
기묘하게 뭉클하고, 예리하게 따스하다. 초현실적인 소재가 가족드라마를 만나 탄생한 것만 같은 괴작. 상식을 가볍게 뒤흔드는 전개가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극의 흐름에 스며들어 익숙해질 무렵, 사건이 하나씩 더해지고 이 이야기의 정체는 점차 모호해진다. 3개의 파트로 구성된 ‘램’의 이야기는 일상에 불쑥 끼어드는 두 ‘침입자’의 존재를 바탕으로 바라볼 때 더욱 흥미롭다. 얼핏 평화로운 가족드라마 속 이야기를 뒤트는 역할을 하는 이 두 ‘침입자’는 다양한 측면에서 대비되는데, 이 두 존재를 인지한 채 다소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영화의 결말을 다시 떠올려본다면, 결국 이 영화가 단지 기괴한 분위기와 평온한 드라마의 대비 때문에 흥미로운 영화는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런 데뷔작을 내놓은 발디미르 요한손의 앞으로의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수작. (Lamb / Dýrið)
어느 지점에서 보더라도 웨스 앤더슨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이야기의 구조와 그 대칭 및 반복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세계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동시에, (이미 지나가버린, 그렇기에 동시대에 더 이상 속할 수 없는) 예술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의 최고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직-간접적으로 환기하고 있기도 하다. 이 영화는 (과거의) 죽음이라는 맥락 속에서 더욱 흥미로워진다. 극중극으로 짜여진 세 편의 에피소드에서 각각 다양하게 호출되는 죽음의 양상으로 보아도 그렇지만, (이 영화가 ‘신문’임을 일깨우는) 오프닝과 엔딩에서 드러나듯 ‘프렌치 디스패치’는 편집장의 부고에서 시작된 이야기였다. 누군가의 죽음을 다루는 순간, 그 이야기는 과거를 전제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그 쓸쓸함이야말로 얼핏 화려한 ‘프렌치 디스패치’의 핵심이다. (The French Dispatch)
스르단 고루보비치의 신작 ‘아버지의 길’은 우직한 한 아버지의 이야기다.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장치조차 작동하지 않는 비상식적인 사회를 상징적인 방식으로 비판하기 위해,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된 아버지라는 인물은 가족의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손과 발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시골 프리보이에서 수도 베오그라드로 향해 걸어가는 여정이 굳이 신체적 능력을 한계까지 시험하는 방식으로 극화된 것도, 주인공이 집을 비운 사이 벌어진 일을 수습하려 마을을 동분서주하는 주인공의 행동도 말하자면 (극중 대사처럼) 제도에 대한 나직한 항거인 동시에 일상을 되찾기 위한 간절한 염원이다. 결국 ‘아버지의 길’ 뒤에 남는 것은 제도에 대한 기나긴 탄식과 개인을 향한 자그마한 응원이다. (Father / Oтац)
크리스토스 니코우의 뛰어난 장편 데뷔작 ‘애플’은 기억에 대한 잔잔하지만 통렬한 일화다. 다소 기묘한 소재를 더 기묘한 방식으로 풀어낸다는 점에서, 그의 이전 커리어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조연출이었다는 사실이 곧바로 납득되는 것만 같다. 극도로 절제된 스토리 속에서 기억상실증을 겪는 주인공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은 결국 어떤 것을 기억으로 남길 것인가, 라는 기억의 선택이라는 질문과 직접적으로 맞닿는다. 심지어 영화의 제목이자 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과’라는 소재의 의미가 드러나는 순간, 이 영화는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선택’에 관한 영화임이 분명해진다. 그러니까 ‘애플’은 잃어버린 기억과 잊어버린 기억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는 인간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은 처연하리만치 뭉클하다. (Apples / Μήλα)
깊게 고민할 필요 없이 케네스 브래너 필모그래피의 최고작. 벨파스트에서의 실제 그의 유년시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자전적 영화는, 케네스 브래너이기에 만들 수 있었던 간곡한 감정들의 책갈피와도 같다. 이 영화는 (주로 셰익스피어 원작) 희곡 각색 이외에는 각본에 참여한 적 없었던 그가 처음으로 오리지널 각본을 쓰고 직접 연출한 작품이기도 하다. (고향을 떠나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던 감독이 흑백 영화라는 표현수단을 이용해서 자신의 유년시절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가 얼핏 떠오르기도 한다.) 가족과 유년이라는 추억을 되새기는 지점에서 마음을 뭉클하게 건드리고, 그 시절의 정서를 온 힘을 다해 전달하는 진심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각본가로서의 케네스 브래너의 진심과 배우들의 호연이 만들어낸 훌륭한 드라마 앙상블. (Belfast)
폴 토마스 앤더슨이야말로 어떤 소재로도 뛰어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다시 한 번 보상받는 놀라운 작품. 마치 ‘펀치 드렁크 러브’의 두근거림과 ‘부기 나이트’의 날카로움이 하나된 것만 같은 ‘리커리시 피자’는 한마디로 꿈 같은 영화다. 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감정선을 별 거 아닌 대화를 통해 한 치의 낭비도 없이 담아내고, 그들의 관계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적 배경을 극적인 사건 없이도 한 치의 오차 없이 풀어낸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전매특허이기도 한 유려한 롱테이크와 함께) 이번 작품에서는 유달리 트래킹 쇼트가 자주 활용되는데, 결국 이 쇼트에 담긴 달리는 두 인물의 모습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겠다. 서로에게 달려가는 시차를 어떻게 감정에 체화시킬 것인가, 라는 질문에 폴 토마스 앤더슨이 내놓은 영화적 대답. (Licorice Pizza)
샤흐람 모크리의 ‘수상한 범죄’는 기이하고도 간절한 걸작이다. 실제로 수백 명의 생명을 앗아갔던 이란의 극장 방화 사건을 바탕으로 극화된 이 영화는 세 개의 시간대를 (서로 다른 시점 쇼트를 사용해) 유려하게 뒤섞는데, 다소 산발적으로 배치된 이 영화의 플롯에 담겨있는 것은 영화(에서의 상상)와 현실(에서의 비극)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실제 방화 사건과 극화된 방화 사건, 그리고 동명의 극중극 '수상한 범죄' 사이 서로 다른 시점의 평행선이 뒤틀리기 시작하자, 설명하기 힘든 마법과도 같은 순간이 더러 찾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수상한 범죄’는 영화 전체가 마치 누군가의 몽상 같기도 하다. 영화가 운명을 거스를 수 있다는,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구해낼 수 있다는 간절한 믿음. ‘수상한 범죄’는 시네마의 힘으로 현실을 바꿀 수도 있(었)다고 믿는 영화다. (Careless Crime / جنایت بیدقت)
작년 한 해에도 참 좋은 영화가 많았습니다. 현재 시점으로는 이 중 네 작품이 국내 미개봉작인 셈인데, <컨퍼런스>, <수상한 범죄>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관람했지만 국내 개봉이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벨파스트>와 <리커리시 피자>는 미국 개봉이 작년이어서 볼 수 있었는데, 한국에도 올해 중으로 공개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올해에도 기대 중인 영화들이 많습니다. 작년에는 개인적인 일로 브런치에 거의 아무 것도 올리지 못했지만, 올해는 좀 더 부지런해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