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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an 02. 2023

2022년 BEST 12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작년 한 해의 최고작 열 두 편

분명 부지런히 글을 써 보겠다고 다짐한 것 같은데 결국 1년 만에 새 글을 올리게 되네요. 작년에 본 144편+α 중에서 가장 좋았던 12편을 골라 보았습니다 (물론 신규 공개/개봉작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이전에 공개/개봉된 작품 중 제가 작년에 처음 본 작품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작년에도 참 좋은 영화들이 많았는데, 12편을 고르다 보니 아쉽게 빠진 영화로는 '애프터썬' (샬롯 웰즈), '이니셰린의 밴시' (마틴 맥도나) 그리고 '벤전스' (B.J. 노박) 등이 있겠네요. 아직 한국에는 개봉하지 않은 영화도 더러 있는데, 아마 대부분 아카데미 시즌을 전후로 한국에도 개봉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럼 또 12위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12위,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요아킴 트리에, 노르웨이)

이제 새로울 것은 없어 보였던 사랑영화에 창의적인 숨결을 불어넣는다. 요아킴 트리에의 ‘오슬로 3부작’의 마지막 작품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이전 두 작품(‘리프라이즈’, ‘오슬로, 8월 31일’)과 마찬가지로 넓게 보면 관습을 따르지 않는 인물들의 일탈기이다. 12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 영화는 율리에(레나트 레인스베)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데, 그녀가 겪는 사랑의 행로는 어떤 귀결에도 이르지 못한다. 이는 상대방 악셀(앤더슨 다니엘슨 리)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다(흥미롭게도, 악셀의 캐릭터는 동일 배우가 연기했던 3부작의 이전 두 작품의 캐릭터를 묘하게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삶과 사랑에 있어서 이상적인 설명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이 영화는 어쩔 수 없는 굴곡의 순간들마저 긍정하는 의젓함에 대한 영화일 것이다.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 Verdens verste menneske)



11위, <메모리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태국/콜롬비아)

태국으로부터 망명한 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처음으로 만든 장편 ‘메모리아’는 콜롬비아에서 제작되었지만, 누가 봐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임이 분명하다. 그가 영화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은 영화가 담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영화 속에 담아내고자 하는 고집이라 할 수 있을텐데. ‘메모리아’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그 착점은 이번 경우에는 ‘소리’와 ‘기억’사이의 신비로운 관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의 근원을 파헤쳐가면서도 이것이 극의 줄기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전혀 알려주려 하지 않던 영화의 전개는 후반부 어느 순간에 이르러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는데, 그 순간부터 ‘메모리아’는 전혀 예상치 못한 신비한 체험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소리와 기억이 압도적인 에너지로 공명하는 순간에 대한 놀라운 포착. (Memoria)



10위, <EO>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폴란드)

로베르 브레송의 1966년작 ‘당나귀 발타자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신작 ‘EO’는 원작의 훌륭한 얼개를 그대로 차용한 뒤 그만의 독창적인 색채를 가미해서 만든 수작이다. 당나귀 한 마리(로 보이는 ‘익명’의 존재)를 중심으로 그가 겪는 온갖 수난을 우화의 형식으로 담아내는 이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 남겨지는 것은 몸서리를 칠만치 잔혹한 삶의 굴레와, 콧등이 시큰하리만치 서늘한 감정의 파토스이다. ‘당나귀 발타자르’ 이후 반 세기가 지났음에도 변함이 없는 그 무망한 순환의 알레고리를 집요하게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EO’의 착점일 것이며, 이미 1960년대부터 흥미로운 작품들을 줄곧 만들어왔던 노장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는 때로는 과감하고 파격적인 연출을 사용하면서까지 보란 듯이 그 목표를 성공시킨다. (EO)



9위, <탑건: 매버릭> (조셉 코신스키, 미국)

헐리우드라는 체계에 (그리고 극장에서의 경험에) 아직도 보여줄 것이 남았을 온 몸으로 증명하는 저력의 블록버스터. 토니 스콧의 영화사적 공로와는 별개로 그의 1986년작 ‘탑건’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무려 36년 만에 등장한 이 속편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전편을 넘어선다. 그리고 그 세월의 흐름 속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이름이 바로 톰 크루즈라는 배우(이자 제작자)의 아우라일 것이다. 사실상 그가 없었더라면 만들어질 수 없었을 이 속편은, 지극히 교과서적인 화술과 작법을 이용하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살려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다소 들쑥날쑥했던 조셉 코신스키 필모그래피의 최고작인 동시에, 이미 배우로서 거대한 성취를 이뤄낸 톰 크루즈라는 이름을 거론할 때도 앞으로 계속해서 회자될 작품. (Top Gun: Maverick)



8위, <더 페이블맨스> (스티븐 스필버그, 미국)

이제는 거장이자 노장의 반열에 올라선 스티븐 스필버그가 ‘미지와의 조우‘ 그리고 ’A.I.’ 이후 세 번째로 각본을 쓴 영화. 심지어 스필버그 자신이 어떻게 영화를 사랑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이쯤 되면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처음 간 극장에서 본 영화에 감명을 받아 비디오 카메라를 손에 쥔 그때 그 소년은 어떻게 스티븐 스필버그가 되었나. 자기 자신의 유년 시절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헐리우드라는 꿈의 공장을 대표하는 연출가가 되었는지에 대한 뒷이야기를 스스로가 쓴 각본으로 풀어내면서도 감정적 과잉과 기술적 과신에 빠지지 않고, 카메라 밖의 관찰자로서 따스한 시선을 건넨다. 입이 떡 벌어지는 카메오의 등장에 이어 올해의 엔딩이라 부를만한 재치와 기지 넘치는 마지막 장면까지. 앞으로도 그저 좋은 영화를 많이 만들어 주세요, 스필버그 옹. (The Fablemans)



7위, <하산의 일> (세미 카플라노을루, 튀르키예)

현대 튀르키예 시네마를 대표하는 이름 중 하나인 세미 카플라노을루의 새로운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 ‘하산의 일’은 뒤를 살피면서도 앞으로 우직하게 나아가는 드라마이다. 아내와 함께 떠날 성지순례를 위해서 착실히 준비를 해나가는 하산(우무트 카라다으)의 계획은 자신의 땅을 가로지르는 송전탑 건설에 휘말려 좌초하게 되고, 하산은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한다. 여기서 하산의 선택은 수많은 주위의 이해관계와 상충하고 교합하며 하산의 선의(처럼 여겨지던 무언가)를 딜레마에 빠뜨린다. 인물을 묘사하는 세심한 디테일과 사건을 조망하는 탁월한 조형술로 보아 여러 모로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또 한 편의 훌륭한 수작. 그러니 이 작품에 이어질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 기대될 수밖에. (Commitment Hasan / Bağlılık Hasan)



6위, <하늘을 본다, 바람이 분다> (알렉산드르 코베리제, 조지아)

알렉산드르 코베리제는 데뷔작 ‘그 여름은 다시 오지 않으리’부터 일상을 담아내는 데 있어서 전통적인 영화문법을 과감하게 파괴하는 데 집중해왔다. 그의 두 번째 장편 ’하늘을 본다, 바람이 분다‘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인생의 편린 혹은 하나의 사건을 담아내는 데 있어서 낯선 방법을 최대한 동원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화술은, 일반적으로 예측될 만한 흐름을 최대한 무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일반적인 보편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영화가 영화임을 의도적으로 일깨우는 이 작품의 일부분은 영화와 현실의 벽을 역설적으로 허문다.) 우연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하는 반복적인 화법, 전혀 관련이 없는 장면을 굳이 담아내는 느린 호흡도 이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의 작품들을 기대하게 만드는 수작. (What Do We See When We Look at the Sky? / რას ვხედავთ როდესაც ცას ვუყურებთ?)



5위, <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 일본)

21세기에 데뷔한 일본 감독 중 단연코 가장 인상적인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최고작. (그가 같은 해에 만든 ‘우연과 상상’ 역시 정말 좋은 작품이다.) 세 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 동안 마음 어딘가에 깊숙히 스며드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드라이브 마이 카‘는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에 대한 이야기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통의 계기가 소통의 단절로부터 야기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인물들이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택하는 방법이 홀로 일어서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극의 방점은 안톤 체호프의 극을 다언어극으로 상연하고자 하는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의 목표와, 그런 그의 삶에 잠시 흘러들게 되는 드라이버 미사키(미우라 토코)의 동행을 통해 다층적으로 강조된다. 그러니까, ‘드라이브 마이 카’는 홀로 일어서기 위해 마음 속 깊숙한 곳으로 함께 나아가는 소통의 로드무비다. (Drive My Car / ドライブ・マイ・カー)



4위, <헤어질 결심> (박찬욱, 대한민국)

박찬욱이기에 만들 수 있는, 달리 말하면 박찬욱이 아니라면 결코 만들 수 없는 사랑영화. 탐정영화의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토록 진진한 멜로영화를 만나기란 또 간만이다. 어디 하나 평범한 구석이 없는 이 놀라운 걸작은, 파도처럼, 안개처럼 밀려오고 쓸려가는 감정의 파고를 플롯에 담아내고, 그 속을 도무지 또렷이 들여다볼 수 없는 사랑의 정체를 감정의 미로 속으로 욱여넣는다. 서로 다른 언어로 소통해야 하는 두 주인공의 상황 속에서 세심한 대사의 결을 통해 담아내는 미묘한 일렁임이 일품이다. 세상 그 어떤 사람(사랑)이라도 만만하지도, 나쁘지도 않다고 말하는 이 영화는 ‘헤어질 결심’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되새기면 새로이 읽히게 되는데, 탐정영화와 사랑영화의 교묘한 중간지점에 서서, 미결로 남은 사건과 미결로 남은 사랑에 대해 곱씹게 하는 이 영화는 그저 마음 속에 사무친다. (Decision to Leave / 헤어질 결심)



3위,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다니엘 콴/다니엘 샤이너트, 미국)

한 마디로 제대로 미쳐버린 영화. 대체 어디까지 가나 싶을 정도의 심정으로 영화를 지켜보자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한발짝 더 깊숙히 들어간다. 감각적인 연출과 경이로운 편집은 그저 기술적 기교에 불과할 뿐, 한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멀티버스라는 소재를 통해 풀어내는 이 이야기 속에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너’를 향한 ‘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뭉클하다. 그야말로 관객을 자유자재로 웃고 울리는 이 작품은, 가장 황당한 소재를 가장 특이한 방법으로 풀어내면서 수많은 레퍼런스를 끌어오다가도 종국에는 관객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놓는다. 어쩌면 아직 시네마의 영토에는 무수히 많은 미답지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새롭고도 무서운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위, <히어로> (아쉬가르 파르하디, 이란)

아쉬가르 파르하디는 현존하는 감독들 중 가장 뛰어나고 가장 세밀한 각본을 쓰는 이 중 한 명이고, 이는 그의 신작 ‘히어로’에서도 자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활용되는 소재는 악인이 없는 상황 속에서 결국 인물들이 자충수라는 딜레마 속에 빠져드는 수렁 그 자체일 것이고, 이는 ‘히어로’에서도 마찬가지다. 악의라고는 없었던 한 줌의 거짓말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이 상황은 풀어낼 길 없는 근원적인 답답함과 동시에 어느 인물에게도 완전히 동조하기 힘든 얼음판같은 상황을 조성한다. 사건이 일단락된 뒤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지독한 딜레마를 명과 암을 통해 환기하기 위해 치밀하게 짜여진 극 전체의 구조까지, ‘히어로’는 다소 아쉬웠던 (그가 이란을 떠나 처음 만든 영화이기도 한) ‘누구나 아는 비밀’ 이후 그의 필모그래피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A Hero / قهرمان)



1위, <놉> (조던 필, 미국)

‘겟 아웃’이 흥미로웠고 ‘어스’가 굉장했다면, ‘놉’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놀랍다. 대체 이런 영화를 본 게 언제였는지를 곱씹게 만들 정도로 강렬하고, 신선하며, 완벽하다. 이 영화를 구상하는 데 있어 원형적 이미지였을 ‘말을 탄 흑인 기수’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사진’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역사를 환기하는 한 편, 미확인물체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미스터리 그리고 호러의 터치를 가미한다. 가리거나 숨김으로써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여타 미스터리 혹은 호러 영화의 작법과 정반대로, ‘놉’은 최대한 보여주려 하면서 특유의 서스펜스를 자아낸다는 점 역시 흥미롭다 (이 영화에서 미지의 대상은 항상 탁 트인 전경의 일부로 묘사된다). 미확인물체의 정체가 밝혀지자 영화를 매혹과 동시에 공포의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는데, 이 교묘한 신비로움이 이 영화를 무엇과도 대체 불가능한 장르영화로 만든다. 결국 조던 필은 ‘필름’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헌사를 익숙한 장르의 클리셰 비틀기를 통해 이렇게나 독창적인 걸작으로 만들어냈다. 어디서도 들은 적 없는 미스터리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호러, 그리고 (문자 그대로) 당신을 집어삼키고야 말 ‘필름’이라는 환상. (N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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