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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나메나 Jul 14. 2024

눈을 감아 아 아 아 아 아 말해봐 예~ 느껴봐 음 음


 설명도 필요 없는 뉴진스의 Hype Boy에 나오는 가산데, 오늘의 글 소재로 쓰려고 한다. 왜냐면 나는 뉴진스의 다니엘이 와서 내가 좋다고해도, (나이 차가 없다는 가정하에) 눈을 감고 느낄 수 없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왜냐면 우리에게 눈이란 기준과 같아서, 정말 너무나 다양한 기준이 생겨버린 나는 다니엘마저 저 위에 나이 차 어쩌구 하는 망언을 쏟아내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나는 정말 구제불능이 아닐 수 없다.


 한 전여자친구, 어쩌면 이전까진 항상 전여자친구라 글에 명시했는데, 이제는 한 전여자친구라 부르는 것을 보면 그녀의 사가가 조금은 끝난 듯한 느낌이 든다. 어쩄든. 그녀가 말하길 난 키가 커서 더 보이는 것이 많아 슬플 것이다. 라는 말을 전했다. 그래서 목이 길어 슬픈 짐승, 이란 말이 생겨난 것이라며. 상당한 고찰이 전해져오는 말이었다. 그렇게 보면, 눈이란 외면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또 심통을 부리고만 싶은 것이다. 적당한 외면도 능사인데 말이니... 나는 목이 너무 길어! 세상이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의 블루도, 사회의 해악도, 문화의 고저도... 나에겐 다 보인다. 그렇다보니 나는 오늘도 말을 삼가고 느낌을 가질 수가 없다. 오로지 내가 갖는 것은 불안 뿐.


 그렇게 기준들은 마치 성북동 주택의 담장들 마냥 높아지고 나는 담장의 경계를 허문 집에 산다고 하나 술 한잔을 걸친 뒤 택시기사와 술을 깨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돌아오는 길에 선 내 집이 너무 좋을 때. 현실이나 가상에서 고통받거나 고통받는 경험을 얘기하는 내 좋은 사람들을 볼 때, 아니면 나처럼 미천하지도 않는데 자리를 잡지못하는 사람을 볼 때면 정말 나는 높아진 만큼이나, 아니 그 높아진 만큼의 딱 두배 만큼이나 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뉴진스가 말했으니 따라야지 뭘 어쩌겠는가, 아무것도 모를 때가 좋았다고, 눈을 감고 말하고 느낄 때가 가장 좋았던 것을 내가 모르지 않는 것 또한 맞지 않나? 라고 생각해보니 내가 눈을 감았던 적이 있나 싶다. 내 20대는 불면의 밤이었고 30대는 마치 온탕과 냉탕을 오가듯 분주하지만 실속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여러번 말했듯이 나는 이제 다짐의 글쓰기를 쓰지 않겠다. 그렇다고 내가 싫어하는 류의 글들인 확신의 글쓰기 또한 쓸 수 없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냥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만한 제목을 붙인 뒤 마치 택시기사님에게 요즘 날씨 이야기 하듯 내 불안을 중언부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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