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흔히 들리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다 챗GPT가 해주잖아요.”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굳이 시간을 들여 배우고 익히는 일이 무의미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종종 ‘지식’을 무언가를 모아두는 행위로 오해합니다. 책장을 채우고 클라우드에 파일을 저장하듯 말입니다. 하지만 지식은 단순한 수집의 대상이 아닙니다. 지식은 뇌에서 재구성되고 재해석되는 유기적 작용의 산물로 시간과 경험 속에서 숙성되며 사고의 맥락에 스며들어 행동의 근거이자 미지의 상황에서 행동할 토대를 제공합니다.
검색할 시간이 없을 때 혹은 무엇을 물어야 할지조차 감이 오지 않을 때 결국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체화된 판단 기준과 사고 구조입니다. 이는 단순한 정보가 아닌 지적 발달의 결과로 순간의 판단과 감각 즉 내면화된 지식에서 비롯되어 있어야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는 정보의 양이 아니라 정보를 어떻게 결합하고 응용하느냐에 따라 갈립니다. 이 능력은 기계가 제공하는 정답을 복사해 붙여 넣는 방식으로는 기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질문과 질문 사이를 연결하고 모순을 견디며 사유하고 실패 속에서 다시 구축하는 반복의 과정을 통해 자랍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전히 배워야 합니다. 지식은 외부에서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숙성한 시간의 산물입니다. 그 시간을 통과하지 않고 얻은 정답은 쉽게 잊히고 쉽게 흔들립니다.
배움은 느리지만 바로 그 느림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듭니다.
이 점에서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가 들려준 이집트 신 테우스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상황을 놀랍도록 예견한 듯 보입니다. 테우스가 문자라는 놀라운 발명품을 인간에게 선물하자 지혜로운 왕 타무스는 그것이 단순한 축복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기억력은 쇠퇴하고 사람들은 겉보기에만 아는 듯 보이게 될 것이라 경고합니다.
“이 발명품은 그것을 배워 쓰는 사람들의 마음에 망각을 낳을 것이다. 왜냐면 사람들은 더는 그들의 기억력을 갈고 닦으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기억의 묘약이 아니라 상기의 묘약을 발명했다. 그대는 백성에게 참된 지혜가 아니라 지혜 비슷한 것을 제공할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생성형 인공지능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우리는 과연 진짜 지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지혜로운 척하는 기술을 손에 쥐고 있을 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