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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커트 Jan 06. 2021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과 영화 <Her>

스파이크 존즈 <Her>

 영화는 제목에 충실하게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고 진행되고 끝난다. 남의 편지를 대필해 주는 일을 하는 테오도르는, 편지를 써줌으로써 타인의 인간관계와 감정들을 간접 경험하지만, 정작 본인은 진실된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공허하게 살아간다. 이런 테오도르 앞에 나타난 아주 특별한 연인이 바로 ‘그녀’, 사만다이다. 사만다는 인간이 아닌 고도로 발전된 인공지능이다. 그러나 프로그래밍된 대화나 작업만을 수행하지 않고 마치 영혼을 가진 것처럼 테오도르의 마음을 위로하며, 이내 그들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처음 몇 달 간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연애에 아주 만족한다. 몸이 있지 않아도 그녀의 ‘영혼’을 사랑할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의 삶을 사만다가 구원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을 깨어버린 것은 그의 전 부인, 캐서린의 말이었다. 그는 ‘진짜 감정’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 그래서 컴퓨터와의 연애가 어울린다는 말. 그때부터 테오도르는 사만다의 감정이 ‘진짜’인지, 그녀와의 연애가 ‘진실된’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자신과 대화하면서도 다른 수많은 기계장치와 사람들과 소통하는 사만다. 심지어 자신 이외의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사만다. 테오도르의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만다는 먼저 그에게 이별을 고한다. 인간과 컴퓨터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것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별 뒤 테오도르는 전 부인인 캐서린에게 편지를 띄운다. 영화를 통틀어서, 대필이 아닌 그 자신의 편지를 쓰는 유일한 대목이다. 그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너와 내가 함께 성장한 과정만큼은 진실이었노라고. 그 편지는 캐서린을 향한 것임과 동시에 사만다를 향한 것일 터이다.



 Her는, ‘근미래’의 ‘연애’를 그린 전형적인 sf이자 로맨스이지만, 그 이전에 전형적인 ‘비극’이다.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연애는 비극의 플롯을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다. 순탄하던 연애에 갑작스런 의문을 품고, 이 연애가 서로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그 과정에서 깊은 고통을 느끼는 장면들은 각각 플롯의 급전, 발견, 파토스에 해당할 것이다. 사만다나 테오도르의 인간성 또한 하마르티아의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컴퓨터와 인간의 사랑이라는 그 특이성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하고 연애를 시작한 것은 상황에 대한 무지에 해당한다. 또한 그 무지는 피할 수 없는 무지이기도 하다. 사람과 컴퓨터의 연애, 아니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애에서도 무지로 인한 갈등과 고통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 이외의 존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때문에 타인의 영혼을 자신의 삶 깊숙이 받아들이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실패하고 만다. 


 사람들이 Her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는 her가 보여주고 있는 연애의 보편성,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겪는 감정의 보편성에서 기인할 것이다. Her는 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근미래의 초상을 세밀하게 그려낸 훌륭한 sf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고민할 감정을 섬세하게 관찰한 드라마이자 로맨스이기도 하다. 영화는 몸이 없는 상대, 즉 영혼만이 존재하는 상대와의 사랑을 그려냄으로써 사랑에 있어 육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상대의 영혼만을 사랑한다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질문한다. 이 질문은 인공지능과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은 수많은 관객들에게도 해당사항이 있는 질문일 것이다. 또한 영화 내내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고민했던, ‘이 감정이 진실된 것이냐’는 질문 또한 마찬가지다. 사만다를 만나기 전, 캐서린과의 이별 뒤 테오도르의 만성적인 권태나 무기력 또한 우리의 삶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에게 공감하고, 영화를 감상하며 그들 삶이나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막연한 공포를 흘려보내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Her는 영화의 장르성을 잘 살린 훌륭한 비극이다. 테오도르 혼자만이 아닌, 인공지능 사만다의 감정과 영혼 또한 면밀히 탐구했기 때문에 기존의 sf가 주목하지 않은 지점을 보여주고 로맨스라는 장르성 또한 잘 살려냈다. 마지막, 테오도르가 편지를 띄우는 장면이 의미가 남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성장했다’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 그것은 기술과 인간이 조화하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의 성장과, 연애를 통한 두 인격의 성장 모두를 이르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훌륭한 비극으로서의 입지 또한 강화한다. 관객의 고통을 이끌어내고 또 흘려보내면서도, 그 모든 고통의 시간이 유의미함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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