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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커트 Jun 16. 2021

모독의 역사

가스 그린웰 <너에게 속한 것>

잘못된 방식의 애도는 추모가 아니라 고인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모든 애도는 죽음 앞에서 이루어지지만 삶에 관한 것이기에, 결국 타인을 모독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의 삶을 ‘올바르게’ 애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변화를 겪고, 어딘가에 속했다가 빠져나오며, 누군가와 관계를 맺었다가도 그를 잃어버린다. 삶에 대한 애도는 그 모든 이별에 대한 애도이다. 과거에 내가 속했던 어떤 곳, 과거의 인연,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이별. 우리는 우리 자신과 타인을 모독하지 않기 위해 이별을 왜곡 없이 기억하며 존중하고 또 마땅히 슬퍼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무언가를 왜곡 없이 기억하려면 우선은 그것을 온전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온전한 이해’라는 것은 정확한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는 허구의 개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이해하려는 시도, 기억으로 간직하고자 하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모두 실패하여 모독이 되고 만다. 소설 ‘너에게 속한 것’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이 책을 내가 어떻게 감상하고 기억하든 그건 필연적으로 누군가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소설 자체가 그러한 모독의 역사에 관한 책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소설 속에서 화자는 ‘미트코’라는 청년과 맺은 짧은 인연, 자신의 유년 시절, 연인 R을 만나게 된 뒤로도 간헐적으로 지속되던 미트코와의 만남을 회고한다. 누군가에겐 가벼운 시절인연일 수 있었을 미트코와의 만남은 화자의 삶을 크게 흔들어 놓는다. 게이들의 만남 장소로 알려진 어느 화장실에서 미트코를 처음 본 화자는 그를 두고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그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는 더더욱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어떤 특징이, 자신을 갉아먹는 의심이나 존재에 대한 결벽성에서 자유로운 일종의 확신이 있었다. (16) 

    

미트코는 직업도, 거처도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불안정하게 살아가며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이용하곤 하는 인물이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거짓말도 서슴지 않으며 화자가 끝없이 베풀어 주는 호의에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화자는 이러한 미트코의 몰염치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 몰염치 때문에 더더욱 미트코에게 빠져든다. 언제나 자신이 ‘존재하는 곳에서 온전히 살아가지 못(234)’한다고 느끼는 화자는 남이 베풀어 주는 호의를 당연한 듯이 누리고,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확신에 차 있는 미트코에게 매료된 것이다.  


미트코와 화자의 관계는 간단하게 표현할 수 없다. 미트코의 말에 따르면 둘은 친구이지만, 둘 사이에는 화자가 대가를 지불하면 미트코가 그를 성적으로 만족시켜 주는 거래가 오가고, 화자는 대가 이상의 자선을 미트코에게 베풀면서도 그 자선이야말로 자기만족을 위한 행동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스스로에게 품는다. 둘의 불안정한 관계는 결국 오래지 않아 끊어지고 1장은 마무리된다. 2장에서 화자는 성 정체성을 이유로 가족과 친구들에게 거부당한 유년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3장은 두 사람이 헤어지고 한참 뒤, 미트코가 자신이 매독에 걸렸음을 알려 주러 화자를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화자 또한 미트코에게서 매독이 옮았으나 화자는 미트코를 질책하지 않고 오히려 미트코에게 치료비를 대 준다. 미트코가 건강이 너무 나빠져 1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하게 된 날, 그날마저 미트코는 화자를 협박하여 돈을 얻어내려 하지만 화자는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협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미트코는 마지막으로 화자가 준 얼마의 돈을 가지고 그를 영영 떠난다.


화자가 미트코에게 지속적으로 베풀어 주는 자선을 두고 그의 연인 R은 미국인인 화자가 경제가 무너진 불가리아 국민에게 갖는 우월의식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화자 또한 그 비난에 어느 정도 수긍하며 자신이 미트코를 구원할 수 있다는 착각으로 그를 모욕하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미트코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단순히 욕망과 동정심이 아니라, 자신과 미트코가 ‘이미 쓰인 이야기에 함께 등장하는 것만 같다(214)’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밝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연인 R과 달리 미트코는 불안정하고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며 언제나 혼자이다. 화자는 ‘세상 앞에 벌거벗고 세상과 접촉하고픈(57)’ 욕망을 지닌 사람이나 유년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가까운 이들에게 거부당해 왔고 어딜 가든 이방인인, 본질적으로 미트코와 다르지 않은 인물이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특성으로 묶인 둘은 결국 서로에게 ‘속하는’ 일마저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그저 어떤 관계가 파멸한 과정을 담은 실패담으로만 읽는다면 그것은 이 책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화자와 미트코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고, 그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단순하지 않은 것은 그들 개개인이 너무 여러 겹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미트코가 불가리아의 청년 실업자라는 한 겹으로, 화자가 미국인 문학 선생이라는 한 겹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너무 여러 겹의 정체성과 경험들을 옷처럼 입고 있어서 그들은 스스로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온전히 속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회고, 잘못된 애도, 그리고 필연적으로 모독이다.


소설에 미트코가 어쩌다가 이런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미트코의 생각이나 미트코의 생활에 대해서도 자세히 나와 있지 않고 그에 대한 화자의 추측 또한 거의 없다. 화자는 자신의 경험과 여러 가지 감정들만을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성 정체성 때문에 거부당한 큰 사건들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같이 누워 있었던 경험, 어머니와의 기차 여행에서 본 어린아이, 친구와의 전화 통화 등 자신에게 영향을 준 크고 작은 사건들을 세세하게 이야기한다. 그것들을 모두 읽고 나면, 화자를 하나의 이름으로 호명하거나 어떤 사람이라고 요약해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의 제목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닌 ‘너에게 속한 것’이다. 화자가 한 겹의 단순한 사람이 아니듯 미트코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화자는 암시한다. 그를 구성하는 정체성과 경험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더라도. 그러므로 영원히 불가해할 존재를 한때 껴안았고 기억하고 회고하는 화자의 애도는 아마 가장 애틋한 모독의 역사일 것이다.     


문득 나는 미트코 대신 분노를 느꼈다. ... 하지만 멀리서 봤을 때 미트코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 분노도 그저 내 생각뿐이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미트코에게,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했으나 그를 알고 지낸 세월 내내 이방인이었을 뿐인 이 남자에게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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