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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커트 Jan 06. 2021

찰나의 영원

F. Scott Fitzgerald <The Great Gatsby>

 개츠비와 닉은 아메리칸 드림으로부터 유리된 인물인가, 혹은 그것과 연결된 인물인가. 동부에 갓 정착하고 그곳 사람들과 막 어울리기 시작한 닉의 모습은 뉴욕을 개척했던 네덜란드 인처럼 새로운 꿈과 희망에 가득 차 있다. 작품 속에서 닉은 자기 자신을 두고 ‘a guide, a pathfinder, an original settler(p.33)’라고 표현한다. 닉이 아메리칸 드림을 가슴에 품고 상경한 개척자라면, 개츠비는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믿었던 것)을 이루고, 그것이 시들어 죽어버린 과정마저 봐버린 1920년대의 미국인이다. 그는 데이지와 함께 사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간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떳떳해지고 싶어서 5년간 그녀를 떠나 돈을 벌었고, 그녀가 결혼했는데도 그녀 곁을 맴돌다 결국 그녀와 재회한다. 그러나 개츠비는 그녀와의 사랑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깨닫는다. 처음에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깨닫는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5년 전과 같은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다. 결국 데이지는 개츠비를 떠나고, 개츠비는 총에 맞아 죽음을 맞는다. 간절히 바랐던 사랑의 퇴색을 경험하고, 버림받고 쓸쓸한 죽음을 맞은 개츠비의 모습은 언뜻 보면 스스로 품었던 꿈에 배신당하고 낙오된 실패자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닉은, 그런 그를 실패했다고 기록하는 대신 위대했다고(great) 기록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었다. 그의 삶의 목표였고 꿈이었고 구심점이었다. 마치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과 성공을 꿈꾼 이들의 가슴에 가득했던 아메리칸 드림처럼. 개츠비는 데이지와의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50년도 15년도 아닌 5년 만에 그 사랑은 시들어 버리고 말았다. 불가능한 영원을 믿고 그것만을 위해 살아간 그의 모습은 맹목적이고 미련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츠비가 스스로 품은 사랑, 혹은 꿈에 배신당한 실패자는 아니다. 그는 단 한 번도 물러서거나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이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내 안에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 사람들은 모두 그 감정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모든 사랑은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난 뒤에는, 누구에게든 쉽게 영원을 약속하지 못할 것이다. 무언가가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조차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 믿음은 가장 순수했던 시절 짧게 머무르다 떠나간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믿음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때, 마치 영원히 사랑할 것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개츠비가 그러했듯이.



 개츠비의 유한한 육신은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이 났지만, 그의 영혼은 쉼 없이 전진했고 어쩌면 죽음 뒤에도 무한히 전진해 나갔을 것이다. 그는 숨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 변할 사랑이라 생각해 데이지를 일찍 포기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전진이다. 아메리칸 드림 또한 마찬가지다. 미국은 약속의 땅도 아니었고 배금주의와 인종차별주의로 수많은 사람들을 낙담시켰다. 하지만 미국을, 모두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은 회의주의가 아닌 믿음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모두가 꿈을 이룰 거라는 믿음. 아마 영원하지 않겠지만, 그 믿음 속에서 사람들은 전진해 왔고, 또 전진해 나갈 것이다. 책의 끝에 닉이 덧붙인 전언처럼.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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