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길을 닮은 공간, 영감의 서재
인풋이 없으면 아웃풋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 들어봤는가? 보고 느끼는 것이 없으면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쉽지 않다는 의미다. 그렇게 우리는 창조성을 키우기 위해 이리저리 헤맨다. 인사이트, 낯선 경험, 신선한 자극을 만나다 보면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고 희망하면서.
나에게도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반복되는 일상과 뚜렷하지 않은 미래로 무기력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나의 활력을 되살려줄 것이 어디 없을까- 하던 찰나, 흥미로운 공간이 오픈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영감의 서재'라는 이름의 큐레이션 체험 공간이었다.
예전에 공간 디렉터분 인터뷰를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기에, 그의 안목을 믿고 덜컥 예약을 했다. 캘린더에 오랜만에 새로운 일정이 적혔다는 사실 만으로도 괜히 설레는 기분이다. 이름만 들어도 왠지 영감이 솟아나는 하루가 펼쳐질 것 같지 않은가.
막상 예약한 날짜가 되자, 몸이 조금 무거웠다. 요 며칠 연속으로 외출을 해서일까? 분명 일주일 전에는 신이 나고, 들뜬 마음이었는데 이날은 약간의 귀찮음이 앞섰다. 그래도 예약을 해 두었기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고, 길을 헤매다 살짝 늦게 도착했다.
그렇게 문을 열고 영감의 서재에서는 이전의 마음은 온 데 간 데 사라진 체, 그 공간을 오롯이 느끼느라 바빴다. '역시나 귀찮음을 무릅쓰고 오길 참 잘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영감의 서재가 위치한 신아 기념관은 1930년대 민간 건물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한편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붉은 벽돌은 차분한 정동길과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영감의 서재 내부 집기들 역시 이러한 건축적 특징을 반영하여 조성했다고 한다.
공간에 한쪽 벽을 차지라고 있는 나무색 책장은 따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LP 박스, 테이블 역시 원래 이 건물에 있던 마냥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작지만 알찬 이 공간을 즐기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곳곳에 숨겨져 있는 즐길 거리가 넘쳐나기 때문. 5월의 주제는 'Modern'으로 이와 관련된 책, 음반, 브랜드, F&B 등을 제공하고 있었다. 눈이 즐거운 인테리어, 그 안에 숨겨진 브랜드와 콘텐츠,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는 재미까지.
처음에는 어떻게 공간을 이용하는 게 좋을지 몰라서 쭈뼛거리기도 했지만 잔잔한 재즈 음악, 그리고 공간 디렉터님과 스태프분의 친절한 안내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감각적인 친구 서재에 놀러 왔다는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우선 웰컴 티를 마시며, 보고 싶었던 인테리어 잡지를 펼쳐봤다. 공간이 위치한 정동, 그리고 근대를 상징하는 건물에서 영감을 받은 큐레이션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 안내문도 찬찬히 읽어내려 본다. 근처 학교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봄의 계절감을 담은 인센스 향은 코끝에 맴돈다. 구하기 힘든 브랜드 북을 꺼내 보고, 어색한 타자기를 꾹꾹 눌러보며 온전히 이 공간이 주는 기운을 느꼈다.
길다고 생각했던 2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니, 감도 높은 잡지 한 권 속에 들어갔다 온 기분이었다. 활자와 사진으로만 만나던 것을 오감으로 체험하면서 권태로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던 시간. 그 안에서 이것저것 낯선 것들을 만나고 시도하는 경험은 그 자체로 나에게 영감이 되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새로운 감정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이 공간에서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정성'이었다.
SNS가 발달한 이래, 사진을 찍었을 때 예쁘게 나오는 '인스타그래머블'한 공간이 우후죽순 늘어고 있다. 예쁘긴 하지만 불편하고, 힙한 분위기는 있지만 깊은 고민은 없는 공간들. 새로운 공간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나이지만, 가끔 '인스타 감성 샷'이 전부인 공간을 마주할 때면 적잖이 실망했다.
영감이라는 말은 참 편리하지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뭔가 대단한 게 툭하고 튀어나오는 것 같잖아요? 하지만 결국 고민의 시간이 차이를 만드는 거랍니다. 답이 나올 때까지 고민하는지, 하지 않는지. 결국 그 차이죠.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영감의 서재에도 눈을 사로잡는 멋진 장면을 만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디렉터님이 여행을 다니며 직접 수집하셨다는 오브제,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보관해온 책들, 환경까지 고려한 섬세한 가드닝은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이 공간이 탄생하기까지 쌓인 시간의 농도는 아마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진하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섬세하게 매만진 공간 안에서 나의 색을 있는 힘껏 더하며 즐기는 시간, 참으로 소중하지 않은가.
공간을 떠나기 전, 혹시 이용하면서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물어보고, 작은 것 하나라도 더 제공해 주고 싶어서 눈을 움직이는 스태프 분의 모습에서는 기분 좋은 배려가 묻어났다. 영감의 서재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고민의 시간이 만들어낸 차이였다. 마치 매력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독자를 생각하며 정성스레 한 권의 잡지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막연히 나에게 ‘영감’을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방문했던 곳에서 예상치 못한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득 채워갈 수 있었다. 새로움을 만나고자 했지만 그보다 큰 것을 얻고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밖으로 나와서는 목적지만 찍고 오느라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던 정동길을 눈에 꼭꼭 담아두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지만 정겨움이 넘치는 길, 역사가 담긴 건축물, 바람에 흩날리는 초록빛 나무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씰룩 올라간다.
'내가 이 공간처럼 정성스럽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앞으로 나는 어떤 차이를 보여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이런 고민을 하며 가는 나의 발걸음은 제법 신이 난 상태였다.
영감의 서재
서울 중구 정동길 33 신아일보
목-토요일 2시, 4시 반 (시즌별 예약제, 인스타그램 참고)
Instagram @inspiration.102
* 2021년 5월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한 글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