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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Mar 18. 2021

" 행복하고 싶다는 생각 "

어쩌면 갈망.

아직도 답은 잘 모르겠어.


행복하다는 게 뭘까,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행복이 찾아올 줄 알았다. 그러니까, 이십 대 후반 정도가 되어 직장도 가지고, 돈도 생기고, 안정된 삶을 살게 되면 당연하게 행복할 줄 알았다. 살고 있던 공간을 벗어나 아주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 모든 게 '이젠 달라졌어'하곤 삶이 일순간에 바뀔 줄 알았었다. 그게 곧 행복의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그런 삶을 위해서 꽤나 큰 노력을 했었다. 편법 없이 부끄럽지 않은 방법으로 남들 못지않게 열심히 살아오면서 말이다.


올해가 되면서, 나의 삶은 변했다. 직장인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꽤 큰 변화였다. 고정적이지 않던 내 삶에 일정한 루틴이 생겼고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멀어졌다. 고향을 떠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나는 그 기분에 취해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어느 정도 흔적은 두고 왔어야 하는 건데, 뒤도 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떠나고서는 그리워하는 꼴이라니. 맞다, 나는 지금 그리운 걸지도 모른다. 내가 평생 그리워하지 않을 것 같던, 직장인 이전의 삶을 벌써부터 그리워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은 있었지만, 그에 비례할 만큼 큰 기회를 쥐고 있었고 설령 슬픔에 빠지더라도 하루를 같이 보내줄 사람들이 있었다. 행복할 수 있는 이유가 군데군데 퍼져 있었고 그걸 너무 당연하다고 느끼고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최근에 봤던 영화에서처럼 그런 것들은 그냥 거기 있었던 게 아닌데 말이다.


영상일을 하면서, 나는 늘 뒤처져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남들은 저만치 가는 것 같은데 나는 자꾸 제자리에 맴돌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것 같았다. 때론 생계 그 자체가 되기도 했고, 나의 능력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으며, 나의 고질적인 고집이 이유가 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괜찮을 거라고 믿어왔다. 나는 내 수준에 비해 노력했으니까, 내가 가진 모자란 것들에 비해 열심히 하려고 했으니까. 하나, 어느 순간부터는 '열심히'라는 말에 큰 회의감이 든다. 어쩌면, 내가 노력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보잘것없다면? 만약, 애초부터 승부가 갈린 거였다면? 아니 어쩌면, 내가 그토록 생각하는 데 비해 애초부터 노력하지도 않았던 거라면?


얼마 전에 일을 하다가 혹독한 경험을 했다. '구 PD 님은 감이 없는 건지, 노력을 안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 날 나는 하루 온종일 굉장히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이번 파트가 조금 어려워서요 같은 말로 상황을 무마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날, 나는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아주 많이 울었다. 지하철을 두 어번 정도 건너뛰어 보낼 정도로 아주 많이 울었다.


하루를 보내면서 자꾸 나는 작아져만 간다. 일이 힘든 것 만이 모든 이유는 아니다. 내 능력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과 더불어, 내가 정말 잘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이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절망이 자꾸만 나를 외롭게 만든다.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과 이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갈망만 자꾸만 늘어가는 것이, 내 불안의 근원이 되어가는 듯하다. 회사생활을 한다는 건 나 스스로를 깎아 내려가는 일이다. 내 인생과 삶이 네모 라면 동그란 틀 안에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잘라내야 한다. 과정이 고통스럽고 슬픈 건 당연하다지만, 동그래진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다.


혼자 살게 되면서, 나의 외로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있다. 외로움이라는 게 단순히 혼자 남겨졌다는 것 만을 의미하진 않는 듯하다. 외롭다는 감정은 많은 것들을 동반한다. 그건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순간이 되기도 하고, 오랜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는 기분을 의미하기도 한다. 혼자 사는 법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 없이 사람으로 산다는 건 애초부터 성립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나는 친구들에게 농담처럼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라고 자주 이야기했었다. 가능하다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을 다 지워버리고 싶다고 말이다. 삶은 이미 시작되었으니, 그런 건 불가능하더라도 그냥 모든 흔적을 지우고 산속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사는 건 어떨까 같은 꿈도 여러 번 꾼 적 있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좋으니까, 속세니 가족이니 친구니 꿈이니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냥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존재조차 없었던 것이 될 수 있다면, 내가 지금껏 겪어온 불행과 고통, 행복하고 싶다는 갈망까지 전부 없던 게 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에 본 다큐멘터리에서 '인간증발'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본 적 있다. 일본 사회에서 스스로 사라지기를 자처한 사람들이 경력, 이름, 유대관계 모든 것들을 끊고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야반도주 같은 건데, 이를 대행해주는 업체가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이런 현상의 근원이 도피일까, 아니면 도시가 밀어내기 바쁜 걸까.


이 도시는 자꾸 나의 존재를 옅게 만드려고 애쓰는 것만 같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말이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걸까. 내가 바라는 게 성공이긴 한 걸까. 아니면 그저 남보다 조금 더 괜찮은 삶인 걸까. 어쩌면 내가 불행한 이유를 모두 탓으로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채워져가고 있으니까. 올해 누군가가 어떤 성과를 이뤘는지, 어떤 삶을 사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눈에 띈다. 나는 보여줄 게 없어서 비참해져 가는데, 누군가는 오늘을 어떻게 재밌게 보냈는지 알려주기 바쁘다. 뉴스를 틀면 하루 단위로 자살 소식이 들려온다. 그뿐인가, 사회는 자꾸 20-30대를 보채고 다그친다. 이런 세상 속에서 어쩌면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게 아이러니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친한 고등학교 친구가 결혼을 했던 게 엊그젠데, 얼마 전에는 딸을 낳았다. 친구는 별소리 없이 사진을 올리고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카톡에 답장을 하지 못하다가 시답잖은 농담과 함께 축하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건, 그 친구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른다. 좀 더 안정된 공간에서 내 시간 속에 있으면, 친구가 진정으로 행복하길 바라게 되니까.


내가 위로받지 못할지언정, 누군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마음 언저리에 늘 불행을 껴안고 산다. 슬픈 일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나로 인해 고통받지 않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나는 행복하고 싶다. 지나치게 갈망하는 것이 문제라면 그렇게 표독하게 갈망하지 않을 생각도 있다. 그냥 흘러가듯 받아들이는 게 행복의 전부라면, 나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다. 근데 나는 지금 도통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루를 버틴다는 생각으로 온전하게 하루를 마치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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