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실, 나는 단 한 번도 프로듀서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살아오지 않았다.
스무 살, 갈 대학이 없어 헤매던 중 어찌어찌 성적을 맞춰 입학하게 된 곳이 영상학과였다. 지금에야 모든 콘텐츠에 영상이 빠질 수 없기 때문에 영상 콘텐츠가 주를 이루는 시대지만, 당시에는 영상이라는 전공 자체가 그리 인기 있는 전공은 아니었다. 꿈을 접고, 비전이나 미래도 찾지 못한 채 얼떨결에 들어간 대학인데 열심히 살 턱이 없었다. 나는 1년 반에 가까운 시간을 코 풀듯 흥청망청 써버렸고, 쫓기듯이 군에 입대하고 돌아온 뒤로부터 본격적으로 영상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실질적으로 영상을 공부한 시간은 2년 반 밖에 되지 않았다. 2년 반 동안 다큐멘터리, 광고, 뮤직비디오, 영화 등 다양한 영상을 촬영하고 만들어봤긴 하지만, 그게 남들에 비해 정말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사실 미지수이다. 때론 남들이 '선배님은 영상 진짜 많이 하셨고, 잘하시잖아요' 같은 소리를 해도 막상 집에 와서 생각해보면 딱히 그럴만한 실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2년 반이란 시간 동안 정말 열심히는 했었다. 단편영화를 찍는 때에는 갑작스럽게 촬영감독이 되어서 하루에 세 시간을 자는 강행군 촬영을 하기도 했었고, 적은 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외주를 받았으며,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서 몇 날 며칠 머리를 싸매고 기획서를 써보기도 했었다. 하루는 '한솔 씨는 너무 가벼운 사람'이라는 말에 상처를 받아 한동안 영상을 그만둬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도 했었지만 이대로 포기하는 건 아깝고 분하다는 생각에 몇 달을 미친 듯이 몰두해서 영상을 하기도 했었다. 결국, 성장했다는 인정을 받고서야 마음을 놓을 정도로 열정적인 때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결코 내가 실력 있는 사람임을 입증해주지는 않는다. 열심히는 했겠지만, 나처럼 열심히 한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때문에, 나는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어찌어찌 흘러가는 대로 몸과 마음을 맡기다가 촬영하는 때가 오면 신나서 카메라를 들고 뛰어다닐 뿐이었지, 단 한 번도 '프로듀서'가 되어보겠다고 생각하고 촬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직장을 다니고, PD님이라고 불리면서 가끔 나는 이 직책 자체에 대한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회의감도 아니고 책임감도 아니고 '내가 진짜 PD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인가?' 같은 의문에 조금 더 가깝다. 그냥 호칭일 뿐인데 너무 깊은 생각을 하는 걸까, 그냥 호칭이라고만 하기엔 피디님 소리, 명함 앞에 PD 글자가 너무나도 선명해서 부담스럽게 느껴지곤 한다.
예전에 PD라는 타이틀을 보면 정말 멋진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좋아하던 것들은 대부분 성공한 것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영화부터 다큐멘터리와 예능까지, 무의 영역에서 시작해 사람들의 삶을 유한히 파고드는 콘텐츠를 만든 사람들. 얼마나 멋진 삶인가. 그래서 PD라는 직업은 거대한 동경이었다. 너무나도 거대해서 동경밖에 할 수 없는 그런 직업 말이다. 그럼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의 나는 PD가 맞는가. 기획도 하고, 촬영도 하고, 편집도 하고, 회의도 하는 내가 정말 PD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인가. 잘 모르겠다.
영상을 만드는 일이 재밌냐고 물으면, 그건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 촬영을 하고 편집을 거쳐 뭐가 됐든 간에 몇 분 짜리 콘텐츠를 만드는 일. 삭제하지 않는 이상, 평생 어디 간에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영상을 꼭 만들어야만 하는 이유가 되곤 한다. 내가 살아오면서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진 않으니까 말이다. 또, 끊임없는 아이디어 싸움에서 결국 승리한 것처럼 결과물을 쥐어오기 까지의 과정은 늘 나에게 벅찬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창작의 과정안에서 한 단계 성장하고, 배워나가는 것. 삶은 끊임없는 배움의 연속이라 하면 이 직업이 가장 잘 맞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재미있는 일만 있는 건 분명 아니다. 아니, 오히려 슬프고 버거운 일들이 더 많이 찾아온다. 프로듀서로 어떤 팀에서 일하게 되면 나의 가치관과 팀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과정을 맨몸으로 겪어야 할 수도 있다. '내가 추구하고자 했던 게 정말 이런 영상들인가' 같은 생각이 드는 순간 모든 걸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두 번 한 건 아니었다. 이뿐만인가, 끝없는 피드백의 연속에서 컨펌을 찾아내기란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고 반대로 피드백 없는 결과물이 너무 쉽게 통과될 때에 밀려오는 허망함도 빼놓을 순 없다. 섭외를 위해 머리를 조아리고, 재능에 대해 끊임없는 의심과, 밀려오는 자기 연민에도 키보드를 놓칠 수 없다는 끔찍한 책임감. 이게 프로듀서의 진 모습이다. 정말 행복해 보이는가?
만약 다음 생에 직업을 선택하는 순간이 있다면, 다시는 영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야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울며 겨자 먹기로 꾸역꾸역 해보겠다마는 다음 생에도 그럴 자신은 없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어떤 직업에 대해 선택한 것에 후회하긴 하지만, 사실 나는 후회라기보다 자기 연민에 가깝다. 이런 일을 하면서도 해야만 한다는 책임감을 함께 짊어지고 사는 삶. 그 삶에 대한 연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