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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Mar 27. 2021

<화양연화>

티켓이 한 장 더 있다면, 나와 같이 가겠소?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에는 왕가위의 영화만이 남아있다.


시간이 지나도 오래도록 사랑받는 감독이 있다. 수많은 감독들이 있지만 그중 눈에 띄는 감독이 바로 '왕가위'다. 90년대 홍콩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면모를 이끌어낸 이 감독의 작품이 최근 리마스터링 되어 개봉했었다. 얼마나 인기가 많았으면 왓챠 플레이에도 감독의 작품이 특집으로 셀렉 되었다. 사실, 90년대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홍콩 영화에 대해서는 깊이 알아본 적이 없다. 보았어도 아마 몇 편 되지 않았으며, 제목조차 기억에 남지 않는 걸 보니 아마 그저 그런 영화들을 위주로 봤었던 것 같다. 물론 <영웅본색>이나 <무간도> 같은 굵직한 작품들을 본 적 있긴 하지만, 느와르 장르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보니 따로 기록에 남겨두고 싶을 만큼 선명하게 본 적은 없었다. 그런 입장에서 홍콩식 멜로 영화의 대가 왕가위 감독의 작품의 재개봉은 큰 흥밋거리가 되어주었고, 재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 보게 된 소감이라면 90년대 특유의 로맨스 중, 진중하고 씁쓸한 맛을 강조한 영화가 바로 이 작품에 담겨 있지 않나 싶다. <화양연화> 이름만 익숙한 이 영화가 첫 시작이라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90년대 영화의 진정한 묘미는 빈티지다. 어딘가 낡고 모자란 느낌, 투박한 색. 옛날 영화가 주는 매력은 생각보다 무궁무진하다.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고,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알게 된다. 무엇보다,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는, 관객이 가진 성숙함에 맞아떨어지는 매력이 가장 크다. <화양연화>는 2000년대 개봉작으로 20년이 넘은 작품이다. 20년이 넘었는데도 다시 보는 사람들이 찾는 이유라면 아마 그 시절이 가지고 있는 향수가 꽤나 진하게 묻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과거의 분위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투박하지만 섬세하고, 촌스럽지만 세련된 역설적인 매력이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제목 <화양연화>가 사람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어서는 아닐까 싶다. 사람은 늘 과거에 아름다움에 늘 추억하고 사는 법이니까.




아름다운 현대극의 로맨스를 생각한다면 아마 당신의 기대치가 풍비박산 나버릴지도 모른다. 시놉시스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이 영화의 주제는 근원적으로 '불륜'에 맞닿아있다. 수 리첸(장만옥 분)과 차우 모완(양조위 분)은 같은 날에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오게 되고 각각의 배우자가 서로 바람을 피우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들은 배우자의 바람의 시작을 알기 위해 만남을 시작하고 묘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줄거리를 대충 요약해보자면, 불륜한 배우자들의 당사자들이 다시 불륜의 길로 발을 내딛는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물론, 극단적인 예시겠지만 가장 명확하고도 깔끔한 정리다. 전형적인 '내로남불 로맨스'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영화의 결말까지 향한다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이 영화는 진득한 인내심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지루하다는 평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영화를 본 편이다. 장면마다 굉장히 긴 호흡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몰입력이 강렬하다. 한 장면마다 길게는 몇십 초씩 장면을 이끌어가는데 이 장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관인 순간들이 분명히 있긴 하다. 하지만, 동시에 편안한 듯 섬세한 카메라 앵글과 미장센들이 화면 곳곳을 넘나 든다. 한 장면에 긴 호흡을 넣었다는 건, 그만큼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불륜에 맞닿은 이들의 사랑은 어느 정도의 절제가 전제적으로 깔려있다. 감정을 섣불리 드러내서도 안되고, 사랑한다고 부둥켜안고 껴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대사를 길게 내뱉지 않는다.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말 같지만 주인공 둘은 감정을 표현하거나 쉽게 말을 내뱉지 않는다. 이처럼 장면마다 이들의 감정과 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무수히 고민을 한 흔적들이 조금씩 엿보였다.




영화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스토리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음악과 색감, 장면을 구성하는 기법까지. 영화의 연출을 위해 사용된 모든 것들이 영화에 대한 몰입도를 높여준다. 영화 속에 같은 음악이 상당히 자주 반복되고, 보았던 장면이 또 본 것처럼 반복돼서 연출된다. 심지어 후반부에는, 자칫 보았던 장면이라 지루할 수 있을 틈에 음악을 집어넣고 갑작스레 끊기를 반복한다. 관객은 깊숙이 몰두해있다가도 끊긴 음악과 장면에서 순간적으로 벗어난다.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인지는 모르겠으나, 상황이 급속하게 변할 때마다 여유롭게 즐길 틈 없이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때문에, 영화에서 자칫 지루할 것만 같은 틈마다 환기점을 둔다. 이뿐만이 아니라, 홍콩 영화가 가진 전체적인 낭만의 분위기와 무채색과 대비되는 강렬한 색감들이 환상적일 만큼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조용한 분위기지만 멍하니 볼 수 없도록 말이다. 때문에 나는 굉장히 영화를 몰입해서 본 편이다. 지루하다는 평에 동의는 하지만, 적어도 영화를 세세하게 살펴보는 나로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미장센 이야기가 나와서 덧붙이자면, 왕가위 감독 스타일의 진지하고도 느린 미장센이 정말 군데군데 많이 보이는 듯했다. 영화를 보면서 '지금 이 장면 이런 의도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른 사람들의 해석과 맞아떨어지는 걸 보니 굉장히 뻔하고 친절하면서도 전형적인 장면들을 그렇게 느껴지지 않도록 담아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시로 주인공을 화면에 담는 과정에서 특히나 거울이 자주 보이는데, 분명 주인공이 같이 있는 공간에서 둘을 떨어드려 배치함으로써 마치 다른 배경에 있는 것처럼 담아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에 대한 간접적인 표현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끝내 수의 슬픔이 분출되는 과정이 되어서야 그들의 모습이 한 거울 안에 잡혀 들어오는 걸 보니 아마 예상이 맞을 듯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불륜을 저지른 배우자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데 이는 각 주인공들의 모습을 투영하기 위해서 아닐까 생각한다. 프레임 속도가 끊겨 보이게 만든 것도, 영화 내내 시종일관 같은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는 것도 모두 다 미장센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처럼 감각적인 미장센이 영화의 퀄리티를 한 껏 끌어올린다. 이처럼 매력 있게 미장센을 구상하려면 대체 얼마나 감각적인 사람이어야 할까. 진심으로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양연화>의 사랑은 시끄럽게 이야기하고 쓰다듬으면 연신 사랑한다는 말을 내뱉지 않는다. 몸짓과 눈짓, 가벼운 미소로 그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불륜을 저지른 배우자들처럼 되지 않겠다고, 그들과 같아지지 않기 위해 일종의 '선'을 둔다. 어쩌면 이들은 도덕적인 완벽함을 추구하기 위해 어떤 '선'에 아슬하게 서있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배우자들의 불륜을 통해 고통받은 내면적 상처를 외면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끝내 부정할 수 없이 깊어진 서로의 감정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이별하기로 결정한다. 가녀린 체구를 떨며 여린 눈물을 흘리는 수와 그런 그녀를 담담한 듯 위로하는 차우의 모습을 통해, 결국 그들이 원했던 완전한 사랑이 되어갈수록 이별에 더욱 가까워지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맞다, 애석하게도 이 영화는 사실 배드 엔딩에 가깝다. 다만, 그건 우리가 느끼는 배드 엔딩이고 이들의 사랑이 어떤 경로로든 해피엔딩이 될 수 있었을까 그건 의문이 남는다.




마지막 대사에서 '티켓(배표)'라는 단어가 굉장히 아슬아슬하게 등장한다. '나예요, 티켓(배표)이 한 장 더 있다면 나와 함께 가겠소?' / '나예요, 배표가 있다면 나를 데려가지 않을래요?'. 타이밍이 맞지 않는 것처럼 아쉬운 대사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들의 감정은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사회 관념과 그들이 지키려는 선(배우자와 같은 존재가 되지 않기를 원하는)은 그들이 인정하는 감정 그 자체를 더욱 뛰어넘는 듯했다. 때문에 둘 사이의 사랑은 어쩌면 순수하고 순박해 보이기까지 한다. 시간을 같이 보내고, 하룻밤을 지내기도 하지만 그들 사이에 육체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로맨스 영화에서 뻔하게 등장하는 키스신 한 번 없고 그저 조용하게 손을 맞잡을 뿐이다. 그마저도 굉장히 조용하게 말이다. 이는 결말까지 향하는 그들의 사랑을 단적으로 암시하는 하나의 복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화양연화>는 이처럼 진지하고 무거운 작품관을 담고 있다. 다른 작품은 보지 못했지만, 다른 이들이 왕가위 감독의 작품 중 이 영화를 단연 최고라고 칭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불륜은 안된다? 사랑의 끝은 이별이다? 낭만적이고 합리적인 상황에서 사랑의 형태는 변화하며 인정받을 수 있다? 사실, 어느 한마디로 정의하기 굉장히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인 나로서 주인공들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주관적인 느낌이라면 이들의 사랑이 20대 같지만 좀 더 완숙한 의미의 사랑에 닮아있다는 것. 이들은 유치하게 서로를 지나치고, 소극적이게 서로를 내보인다. 과정에서 오는 고통과 연민을 쓰다듬어 주지 못하고 그저 유유자적하게 흘려보내려고 노력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결말부에서는 우연하게 엇갈리기도 하고, 끝내 비밀을 지키겠다는 지조를 보인다. 앙코르와트 사원 구멍에 비밀을 털어놓고 유유자적히 길을 나서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이들의 사랑이 미완성이기에 완벽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사랑이 피어오르면 언젠가 사그라들겠지만, 결국 추억처럼 한 구석에 놓고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화영연화>가 명작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다. 감각적인 미장센이 그렇고, 영화 내내 깔리는 두 가지의 음악 'Yumeji's Theme'와 'Quizas, Quizas, Quizas', 비극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이들의 이야기가 주로 그 이유가 되겠다. 현대에 들어와서 이 영화를 유난히 지루하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어디서 봤던 것 같은 장면과 뻔해 보이는 클리셰들이 어쩌면 눈에 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의 탄생연도는 2000년도다. 이러한 방식의 클리셰가 정착되는 시기 말이다. 당신이 봤었던 장면이라고 느끼는 건, 이 영화가 그런 장면들의 시초여서가 아닐까 같은 생각이 든다. 앞서 말했듯, <화양연화>는 소란스럽게 사랑하지 않는 영화다. '당신을 사랑해요' 같은 대사보다 '인정하게 되었어요'라는 대사가 좀 더 어울리는 영화 말이다. 때문에 더욱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비치는 걸지도 모른다. 영화가 예술적이라고 칭찬하고 싶진 않지만, 마음 한편에 뭔가 묵직한 감정이 남게 만드는 로맨틱한 영화라고 정의해두고 싶다.




사진출처 : <花樣年華> In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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