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is most beautiful in the rain.
누구나 과거를 그리워하기에, 또 누구나 낭만이 있기에.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보기까지 아주 미뤄뒀었던 편이다. 솔직히 말하면, 미뤄뒀다기 보다 별로 보고싶지 않은 영화에 오히려 가까웠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첫번째로 시놉시스가 그렇게 마음이 들지 않았고, 두번째로는 작품을 만든 우디 앨런 감독의 기괴한 행보 때문에 그닥 보고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추천해주는 사람이 아주 많았지만, 아주 오랫동안 미뤄두다가 마침내 꺼내보게 되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는 영화 모임을 진행하면서 어떤 영화를 봐야할지 고민하던 중에 덜컥 집어들게 되었다. 포스터에만 해도 적혀있는 좋아하는 배우들의 노고를 인정하고 싶었고, 코로나 때문에 미뤄둔 여행길이 갑자기 그리워진 것도 큰 이유였다. 이왕 보게 된 거 선입견을 지우고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늦은 밤에 영화를 틀어놓고 한참을 파리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파리의 안 쪽에 아주 안쪽까지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미뤄뒀다는 게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 하기 전, 꼭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 영화가 가진 풍경에 대한 매력이다. 지금껏 많은 영화들에 대한 풍경을 이야기 해왔지만 이 작품은 유럽 속 프랑스 그 자체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좋았다. 우선, 오프닝 시퀀스에만 해도 우리가 '파리'하면 떠오르는 장면들이 가득 담겨있다. 에펠탑과 개선문, 르부르 박물관과 노트르담까지 ... 파리의 풍경을 차례로 나열한 영화의 시작은, 환상적이고도 몽환적인 여행의 출발을 알리는 것만 같다. 파리를 다녀온 사람에게는 회상을, 다녀오지 못한 사람에게는 동경을 심어주는 풍경들이 참 많았다. 아무래도 우디 앨런 감독이 추구한 근현대 예술에 대한 동경이 영상에 그대로 담겨진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영화 스토리가 진행되는 중에는 이런 풍경을 자주 볼 수 없지만, 오히려 배경으로 비춰지는 듯한 파리의 풍경들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듯 하다.
본격적으로 영화에 들어와, 앞서 말했듯 내게 그리 신선하게 느껴지는 시놉시스는 아니었다. 글을 쓰는 평범한 남자가, 아내와 함께 온 파리여행에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는 조금은 뻔하게 들리는 줄거리였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 타임슬립이라는 소재가 워낙 흔해빠지게 된 이유도 이유지만, 비약적이게 비현실적인 요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내용 자체를 뜯어보면 이리 단순한 내용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줄거리보다는 영화가 주는 의미, 색감, 풍경 그리고 배경에서 더 많은 매력을 느끼는 듯 하다. 영화의 러닝 타임은 총 1시간 40분, 기승전결을 만들어내기엔 적절하고도 알맞은 딱 적당한 시간인 듯 하다.
지루하게 느껴지는 도입부 파트를 넘어서면 영화가 가진 정체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오래된 푸조 차량을 타고 과거로 가게 된 주인공이 만나는 첫번째 인물은 바로 젤다(알리스 필 분)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톰 히들스턴)이다. 근현대 예술이나 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름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인물의 등장으로 영화의 전개는 한순간에 뒤바뀐다. 어딘가 지루해보이는 파리의 풍경에서, 낭만적인 예술의 시대로 붕 하고 뛰어넘어 오게 되는 것이다. 설령 피츠제럴드란 이름도 모를지언정 <위대한 개츠비>를 모를리는 없을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가진 인물의 등장은 우리에게 친숙함을 선사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어 나도 아는 사람이야' 같은 감정을 들게 함으로써, 멀게만 느껴졌던 영화의 의미를 관객의 마음 앞으로 가까이 끌어당기도록 유도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코리 스톨 분), 살바도르 달리(에이드리언 브로디 분), 폴 고갱(올리비에 라보딘 분), 피카소(마르시알 디 폰소 보 분) ... 이름만 들어도 어딘가 익숙한 예술인들의 끈임없는 등장으로 관객은 숨돌릴 틈 없이 반가움을 만끽한다. 더군다나 배우들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싱크로율을 자랑하고, 동시에 꽤나 친숙한 배우들이 예술인들의 역할을 대신한다. 사실, 내게는 이런 요소들이 사실 매력적으로 느껴졌지만, 그렇지 않을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 같다. 나도 잘 알진 못하지만 근현대 서양문학이나 예술에 관한 어느정도 지식이 있어야만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이야기가 쉽게 이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통해서 영화가 표현하려는 부분의 당위성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인고 길(오원 윌슨 분)이 달리를 만나는 장면에서, 달리가 추구했던 초현실주의의 의미를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다면, 주인공이 2000년대에서 왔음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별 신경을 쓰지 않는 태도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요소가 영화의 호불호를 명확하게 가르는 듯 하다. 영화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는 인물과 배경에 환호하는데 반면 누군가에게는 전체적인 내용이 너무 억지스럽게 느껴질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조연 인물들이 중요한 역할을 제공하는데 조연 인물의 배경조차 이해할 수 없다면 영화에 흥미를 잃는 것은 당연지사인 일이다. 그래서 사실 이 영화를 보려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드의 기초적인 배경관 정도만 이해하고 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그래야만, 영화가 가진 묘미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미드나잇 인 파리> 제목에서부터 프랑스 예술을 가득 담고 있으니 조금의 귀찮음을 감수한다면 아마 영화가 가진 예술적 면모에 흠뻑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아주 긴 서론을 지나, 영화의 주요 인물 중 현재 시간의 아내 이네즈(레이첼 맥아담스)와 길의 관계도 굉장히 재미있는 요소 중 하나였다. 낭만적인 길에 비해 지나치게 현실적인 이네즈의 모습은 부부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어긋나 보였다. 물론 사람 개개인마다 가치관의 차이가 있겠지만,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만나 어떻게 지내왔는지가 굉장히 궁금하게 느껴졌다. 비록, 백스토리로만 확인할 수 밖에 없지만 이들의 태도를 대충 읽어보면 후반부의 결말도 어느정도 예상이 가게 된다. 다만, 두 인물 모두 잘못을 저지른 인물로 나오기 때문에 둘 싸움에 대한 어느 편을 들기도 어려운 거부감 없는 전개가 이어지게 된다. 이네즈가 허영심이 많고, 짜증을 자주 낸다는 점을 활용해 길의 바람을 어느정도 묵인하게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다. 허영심과 사랑, 프랑스 그 자체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 후반부는 거의 개판에 가깝다. 장인은 사위를 의심해 감시하고, 장모와 아내가 뒷담화를 나누며, 둘은 다투고 성내기 바쁘고. 후반부 장면에서 호텔 안의 씬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다. 이런 장면을 연속적으로 배치한 건, 아마 시간여행을 통해 보여주는 과거와 대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낭만적인 과거에서 주인공은 사랑에 빠지는 남자가 된다. 동경하던 모든 것들 앞에서 그저 시간이 흐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모습으로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하다. 이처럼, 현실과 과거의 극적인 대조를 통해 주인공의 성격과 인물구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를 그리워하는 존재이다. '그랬었다면' 하고 지나치는 기억을 뿌리치지 못하고 빠져살기도 한다. 하지만, 후반부의 장면들을 통해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향수의 그리움이 과연 모든 것을 더 낫게해주는지에 대한 물음을 가져다준다. 과거를 그리워해서, 과거에 살게 되었다고 그 삶에 과연 만족하며 살 수 있게 될 것인가하고 질문한다. 길은 아드리아나(마리옹 코티야르)와 함께 더욱 깊숙한 과거로 빠져든다. 아드리아나가 그토록 동경하는 황금시대로 말이다. 과거에 그리움으로 밤을 기다리던 길은 그 순간 자각한다. 과거에 대한 집착이 어떤 결말을 맞게 될 지 말이다. 때문에 길은 아드리아나에게 과거 속에 영원히 살 수 없다고 말하지만, 이미 과거로의 맹신에 빠진 아드리아나는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닮아보이기만 하던 두 인물의 극적인 태도가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당신이라면 어떨까, 원하는 시대에 원하는 인물과 평생 살아갈 수 있다면 남을 것인가? 아니면 현실로 돌아올 것인가?
영화 초반부에 교수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과거에 대한 향수는 부정이야, 고통스러운 현재의 부정' 어느정도는 맞는 말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삶이 불만스럽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향수를 덧대어 '그때는 나았을텐데' 같은 자기위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이 영화의 초점을 단순히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아라' 정도로 단정짓고 싶진 않다. 앞서 말했듯, 사람은 누구나 과거의 순간을,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존재이니까.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에 대한 부정을 말하기 보다, 과거의 순간을 끌어안고 살아서만은 안된다는 것이 아마 이 영화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아드리아나와 같은 맹신에 빠지기 보다, 길처럼 영원한 낭만을 간직하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과거와의 선을 긋고, 현실에 돌아와 다른 삶을 살았던 것 처럼 말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제목처럼 새벽에 보기 좋은 영화였다. 파리의 전경, 낭만적인 색감, 여유롭고도 평안한 분위기까지 ... 방안에 불을 꺼두고, 아주 작은 불을 켜두고 보고싶은 그런 영화, 동시에 '노스텔지아'라는 단어의 정수를 엿볼 수 있는 아주 잔잔하고도 매력적인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스토리 뿐만 아니라, 영화의 연출적인 요소들도 모두 좋았다. 따듯함을 강조한 노란 계열의 색감을 사용해서 전체적으로 낭만적인 풍경을 덧대었으며, OST도 재즈나 클래식 음악이 많이 사용되어 분위기를 한 층 더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과거로 돌아가면 어느 시대에 머물 것인가, 또 누구를 만나게 될 것인가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이왕이면 2000년대 초반쯤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설레서 어떤 이야기를 해야할지 상상을 했었다. 당신의 삶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가. 과거인가 현재인가, 아니면 둘 모두를 껴안고 있는가.
사진 출처 : <Midnight in Paris> In Mov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