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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아티스트 Sep 19. 2019

개인의 비극이 사회적 폭력을 낳다.

연극 킬롤로지 리뷰



킬롤로지. 다소 무거운 연극을 보았다.  

세 남자의 독백이 차례로 등장한다. 주인공들은 모두 뭔가 잔뜩 날이 서있다. 시니컬한 표정으로 독백을 이어나간다. 그들은 각기 나름의 상처가 있는 인물들이었다. 자신의 삶을 담담히 설명하다가 어느 순간 감정이 치닫는다.


무대는 갑자기 조명이 바뀌고 절정의 소리를 더하며 분노하는 감정을 전체로 이끌어낸다. 그리고 암전. 정적, 긴장감이 흐른다. 공포물도 아닌데 뭔가 무서운 스릴러, 공포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몰입을 불러일으키는 무대 구성으로 2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연극은 세 남자의 비극을 보여주며 사회에 만연한 폭력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킬롤로지는 폴이 만든 컴퓨터 게임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을 담아 최대한 잔인하게 살인하게끔 유도된 게임으로 경제적인 부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데이비는 그 게임에 사용된 방법으로 살해당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알란은 처절하게 고통스러워하며 그 게임을 만든 폴에게 가서 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하려고 한다. 세 주인공은 모두 가해자의 모습도 피해자의 모습도 지니고 있다. 절대 악이라는 게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지 누구의 잘못만을 꼬집어 이야기할 수 없는 쫀쫀한 구성을 더했다. 사실 이게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세 사람에게 공통점으로 부족한 것은 인정과 사랑이었다. 그들은 계속 보살핌을 바랬고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원하며 성장해왔다. 그러나 계속 부모와 사회로부터 거절당했고 결국 아버지로써 책임을 다하지 않다거나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모해갔다.


하지만 폴의 절규에서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로부터의 사랑을 갈구했을 뿐이라는 것을. 부모가 가진 경제적인 부유함도 한 아이의 감정적인 욕구를 채워주진 못한다. 아이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부모의 따듯한 미소와 지지이다. 나 역시 아버지로부터의 원망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뒤섞여 비슷한 감정을 느껴봤기에 폴의 광기가 이해가 되었으며 그의 절규에 같이 슬퍼졌다.  


개인의 감정적인 비극에서 비롯한 게임은 폭력적인 내용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 폭력의 가해자들이 폭력을 게임처럼 재미로 생각을 하며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사실 연극을 보기 전에는 게임의 폭력성이 사회적인 문제가 된다는 것에 대한 책임을 제작자에게 물을 수 있을까 싶었다. 폴도 설명했듯이 많은 유저들이 참여하여 진화하고 있는 게임의 특성상 누구 한 사람의 잔인함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인 아이디어가 게임에 녹아들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폴은 분명하게 말했듯 나도 이렇게 생각했다.    


이건 게임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게임을 한다는 걸 알아요. 게임에서 마법을 쓰면 돼지가 날아다니죠. 그렇다고 현실에서도 돼지가 날아다닌다고 생각합니까? 무슨 바보천치도 아니고.


그렇지만 분별력이 없는 나이대의 아이들이 쉽게, 그리고 오랫동안 폭력적인 장면에 노출되다 보면 폭력을 쉽게 여기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갑자기 작년 미국 플로리다 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하여 총 17명이 사망한 사건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같은 학생이 총으로 다른 아이들을 사살했다는 사건에 대해서 꽤 충격을 받았었는데, 당시 매트 베빈 켄터키 주지사는 이 사건의 원인으로 게임의 폭력성을 지목하기도 하였다.


과거에도 미국인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지만 학교에서 이런 사고가 발생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연극을 보고나니 이 말에 일리가 갔다. 주변에 게임 유저들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으면 게임을 하면서 사람을 죽이고 쾌감을 얻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게임회사에서는 교모하게 더 중독성 있고 잔인한 요소들을 첨가하여 우리의 뇌를 마비시킨다. (현질도 그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게임은 폴의 말처럼 재미를 위한 가상의 세계일뿐이다. 그러나 킬롤로지를 보면서 어린아이들에 대한 사회적인 규제는 강화되어야 된다는 생각에 적극 동의한다.


그리고 결국은 모든 문제가 사랑에 관한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아이를 돌보기 힘든 환경도 문제지만 그보다 필요하고 절실한 건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깊은 사랑의 말 ‘폴 넌 뭐든 할 수 있어.’같은 말 한마디이다. 연극은 무게감 있게 개인과 사회의 역할을 상기시키며 다소 비극적으로 마무리했다. 오히려 그런 씁쓸한 결말이 어설픈 해피엔딩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모든 연령대가 봐야할 연극이라 생각된다.



#아트인사이트 #문화는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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