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숲사진가 Jun 27. 2024

[ICELAND] 암초 (EP.9)

위험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나를 덮친다

위기는 예기치 못한 순간, 순식간에 나를 조여왔다
결코 내 얘기가 아닐 것만 같았는데, 차가 눈밭에 빠지고 말았다.


2022년 12월 22일 오후, 1번 국도 동남부 해안선 구간


갓길에 잠깐 차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던 그곳은 사실 깊게 쌓여 있던 눈밭이었고 차는 그곳에 빠져 바퀴를 헛돌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황당한 마음뿐이었다.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현재는 날씨가 비교적 잠잠하고 하늘도 비교적 맑은 괜찮은 기상조건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아이슬란드 날씨라면 30분만 지나도 여기에서 다른 처지로 뒤바뀔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행이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요즘 유행하는 말로 소위 '원영적 사고'가 아직 살아 있어서 잠시 차에서 내려서 공기를 쐬며, 눈밭에 처박혀버린 내 차의 인증샷(?)을 위와 같이 찍어줄 수 있었다.




사건의 전말을 되짚기 위해서는 이로부터 약 2시간 전 시점으로 다시 되돌려야 한다. 아이슬란드 동부로 떠나는 길로 막 들어선 나는 험준한 산세와 반대쪽으로 펼쳐지는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며 감상에 젖은 채 계속 차를 달리고 있었다. 끝없는 지평선으로부터 계속 나타나는 길들은 이대로 계속 달려야 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중간에 잠시 경치를 즐기며 멸치볶음 주먹밥이라는 성찬도 먹었겠다, 앞으로 남은 일은 뒤이어 펼쳐지는 동남부 해안선 구간을 즐기며 에이일스타디르에 도달하는 일뿐이었다.


이런 거대한 그림을 이루는 작은 점 하나가 되어 나는 그 안을 누비고 있었다
동남부 해안선의 겨울바다는 마치 사나운 맹수 같았다


거대한 산세를 끼고 달리며 보는 풍경에 푹 빠져 있을 틈도 없이 이내 시야에 있던 너른 풍경들이 바다로 눈앞에서 변해가기 시작했다. 달리고 있던 도로 양옆이 점점 좁아지면서 해안 절벽을 끼고 달리게 되었다. 지금은 강풍도 없고, 풍랑도 비교적 온순하고, 시야도 잘 확보가 되는 맑은 날이었기에 즐겁게 이 구간을 달릴 수 있었지만, 만약 이 구간에 도로 결빙까지 되어 있고 풍랑에 강풍까지 심했다면? 심지어 눈보라가 흩날려 시야까지 앞을 가렸다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을 구간이었을 것이다. 


자칫 하다간 차와 함께 저 바다 아래로 수장될 수도 있는 구간이니까, 길에 아무 이상 없음에도 괜스레 서행을 하게 되는 길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기록 욕심은 한결 같이 투철해서 이 해안 절벽 구간 도로의 갓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이 길의 앞과 뒤, 그리고 저 멀리 펼쳐져 있는 기나긴 길까지 함께 담았다. 위험하고 쟁취하기 어려운 만큼 자연은 그에 상응하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언제나 그러한 자연의 법칙에 예외는 절대 없었다.


겨울에 타기엔 너무나도 아찔하고 위험했지만 그만큼 아름다웠던 길도 없었다.


이후 구간부터는 바다, 해안절벽이 이루는 경관, 하늘에 끼어 있는 석양 등이 어우러져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풍경을 내게 선사했다. 에이일스타디르까지 갈 길은 계속해서 상당 거리 남아 있는 채로 전진했지만 '어차피 오늘은 에이일스타디르에만 들어가면 되는걸'이라는 생각에 수시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고, 다시 이동하고의 반복이었다. 이동일에는 꼬박 하루를 다 써야 했기 때문에 이렇게 천천히 풍경을 뜯어보며 즐기는 것도 묘미라고 그 순간에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날의 날씨가 너무나도 완벽했다. 아이슬란드에 처음 들어온 순간부터 태풍에 거센 눈보라에, 남부까지 오는 길만 해도 비교적 매우 안전하다는 남부 지역의 1번 국도 구간도 모조리 통제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 날의 청명한 하늘과 극지방의 짧은 낮이 물들인 붉은빛 하늘과 구름들이 이루는 조화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겨울에 링로드를 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였고, 보통 남부까지만 도달했다가 회픈에서 다시 되돌아서 레이캬비크와 서부로 넘어간다고 했지만 다수의 군중들이 말하던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동부로 향하는 해안선 도로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이 정도면 솔직히 스즈키 회장도 감탄할만할 것 같은데
동남부의 이 해안선의 힘찬 역동감을 감상해 보시라

'그래 날씨만 좋고 하늘이 얌전하면 이렇게나 이쁜걸'이라는 생각을 내내 하며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정차한 내 차 사진도 찍어가며 '이 정도면 스즈키 회장이 봐도 좀 좋아하지 않을까'라는 실없는 생각들도 좀 곁들여 가고 있던 차였다. 


레이캬비크에서 링로드에 오른 이후에 처음으로 마음을 놓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마 이런 광경과 감정을 가져보기 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을까. 첫 번째 오로라도 만나고 자신감도 생기고, 목표도 제법 이뤘다면 이뤘겠고 오로라 이외에 나머지도 너무나 멋지게 채워 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운전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푹!'


그리고 그것이 아마도 마음을 놓은 나머지 잠시 방심까지 해버린 내가 마주해야만 했던 결과였다. 또다시 갓길에 차를 세우려던 찰나 무언가 깊게 처박히는 소리가 나며 바퀴가 크게 헛돌았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소리임을 깨닫고 풀악셀을 밟았지만 차는 요란하게 비명을 지를 뿐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랬다. 갓길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이 실은 눈이 아주 깊게 쌓여 있던 곳이었던 것이다. 함정에 빠진 순간이었다.



이렇게 멀쩡한 길들도 극히 일부만 보이게 도로 곳곳이 눈으로 뒤덮혀 아예 길 자체가 보이지 않는 길도 있다.


잠시 운전석에 굳은 채로 아무 생각 없이 약 3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 직후부터 이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몇 번의 풀악셀을 더 밟아본 결과 이 행동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행동임을 깨닫고 시동을 껐다. 목적지인 에이일스타디르까지는 아직 100km 남짓 남아있는 상태였으니 주유소도 없는 이 구간에서 난방을 돌리는 것은 사치였다.


자연이 파놓은 함정 앞에서는 4륜이고 윈터타이어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없으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우선 주변을 둘러본 결과 민가나 인기척이 전혀 없었고, 지나가던 차 한 대를 불러서 상황을 설명해 보았지만, 그 차를 운전하던 현지인도 뾰족한 수가 없어서 미안하다며 그대로 지나가버렸다. 그것 참, 사람이 조난을 당했는데 여기선 이런 일이 예삿일이 아닌 건지 워낙 사람들이 무덤덤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레이캬비크 마트에서 삽이라도 한 자루 샀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지라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하며 손으로 앞타이어 쪽의 눈을 조금이라도 파내던 의미 없는 행동까지 할 때쯤, 더 멀리 다른 차 한 대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 차가 날 발견했는지 비상등을 켜며 내 차 바로 근방에 세우는 것이 아닌가. 나이가 내 또래쯤으로 되어 보이는 남자가 차에서 내려 내게 다가왔다.


"안녕! 괜찮니?"


"안녕, 보다시피 상황이 나빠, 갓길인 줄 알고 여기 차를 세우려 했는데 눈밭에 빠졌지 뭐야."


그 순간의 내가 체감하던 실상은 사실 나쁜 것 그 이상이었는데 그 친구의 말투가 워낙 밝아서 그랬을까. 나도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위기일수록 침착했던 건지 그냥 사태파악이 아직 덜 되었던 건지, 아이슬란드여서 지나치게 낙천적일 수 있었던걸지 아직도 이 순간을 생각하면 신기하다는 생각을 한다.


"지나가다 널 발견해서 다행이야. 마침 내 차에 밧줄이 있는데, 아마 널 견인해 줄 수 있을 거 같아."


"어.... 정말?!"


마치 아이슬란드에서는 다들 짐칸에 견인용 밧줄 하나쯤은 가지고 다니지 않겠느냐는 그 친구의 쾌활한 이야기에 순간 너무 황당한 나머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천운이란 이런 걸까? 다행히 구원의 손길이 날 반겼다. 이내 그 친구가 트렁크에서 밧줄을 꺼내와 내 차 앞범퍼 쪽에 단단히 묶었다.


"운전석에 들어가서 시동을 켜고 너 차의 기어를 중립으로 놔주면 될 것 같아. 내게 신호를 주면 내 차 쪽에서 엑셀을 천천히 밟아볼게!"


이 모든 과정과 기적적인 도움을 마주함을 떠나 내 차가 눈밭에 아주 지독하게 빠졌던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시도에서는 밧줄이 끊어져서 실패했고 세 번째 시도만에 차가 겨우 빠져나왔으니 말이다. 천신만고 끝에 눈밭을 빠져나와 다시 도로 위로 올라올 수 있게 된 내 차가 퍽 힘겨워보였다.


 "정말 고마워. 사실 에이일스타디르로 가던 길이었거든. 덕분에 무사히 갈 수 있게 됐어!"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야. 나도 에이일스타디르로 마침 가던 길이라 아마 계속 같은 방향으로 운전하겠네."


감사 인사를 건넬즈음 나는 비로소 그가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비니를 쓰고 있음을 깨달았다. '두유노 지성팍'과 같은 한국인이 해외에서 할 수 있는 식상하고 뻔한 질문이 내 머릿속에 순간 스쳐가며 그에게 농담삼에 질문을 던졌다.


"지금 보니 너 맨유 팬이구나. 그런데 말이야, 너도 박지성 선수가 맨유 레전드라는 것에 동의하니?"


"물론이지. 큰 경기에서 아주 중요한 골들을 많이 넣었잖아? 의심의 여지가 없어." (내 생각 이상으로 아주 진지하고 엄숙하게 대답했다)


조난도 무사히 벗어났겠다. 실없는 대화로 다시 웃음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지금에 다시 회상해도 이 순간의 대화가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유쾌했던 순간 중 하나였다. 어쨌든 그렇게 진심으로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건네며 나는 그와 헤어졌다. 여행을 회고하는 시점에서 그의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고, SNS 정도라도 교환할걸 하는 생각에 아쉽다는 생각이 크지만 내 마음속 가장 극적이었고 고마웠던 순간 중 하나가 되어 자리 한 곳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1번 국도에 무사히 오를 수 있게 되었고, 나는 내 시야 범위에 저 멀리 앞에서 먼저 달리고 있는 그의 차를 보며 에이일스타디르로 다시 향하기 시작했다. 





위기를 벗어나니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다. 시야에서 보이던 친구의 차도 전방에서 점점 멀어지다가 이내 앞서가며 사라졌다. 더 이상 위험할 수 있는 샛길로 진입하거나 갓길에 정차를 안 했을 뿐 여전히 나는 풍경을 즐기며 가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고, 그 여명의 마지막 한줄기 빛까지 모두 사라지는 순간까지. 동남부 구간의 1번 국도는 그만큼 위험했지만 여전히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수많은 풍파에 맞서 날카롭게 벼려진 산봉우리들은 모든 걸 뚫어낼 듯한 기세로 예리한 모습으로 여명이 물들어가는 하늘 끝에서 반짝였다. 이들이 만약 눈으로 덮여 있지 않는 모습이라면 또 어떤 감탄이 나올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에이일스타디르에 도착하기도 전에 해가 지게 되었지만 그 큰 위기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게 어디냐는 생각으로 넉넉하고도 안도하는 마음을 계속 곱씹고 있었다. 위기를 겪은 지 불과 몇 시간도 안 지난 자의 마음치고는 너무 풀어지는 것 아닌지, 그래도 무사하면 된 것 아닌가라는 두 개의 마음이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싸우고 있었지만, 오늘은 후자가 이겼다. 적어도 여기에서만큼은 한국에서의 나 자신처럼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지 않기로 했다. 그런 생각들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계속 운전을 하고 있었고, 어느덧 줄어들지 않을 것만 같던 내비의 남은 거리가 1km씩 천천히 줄어들어 가고 있었다. 



2022년 12월 22일 저녁, 에이일스타디르 시내


해가 떨어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마침내 끝이 없을 것만 같던 1번 국도가 잠시 멈추며 에이일스타디르로 들어서는 초입에 다다랐다. 도시로 들어서는 초입부터 도로가 이미 레이캬비크와 남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두꺼운 눈으로 뒤덮여 난장판인 것을 보았지만, 민가와 사람이 있는 곳에 들어선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격스러웠다.


도착하자마자 이곳에 있는 마트 네토에 들려서 장을 봤다. 이번에는 크리스마스 기간이 걸쳐 있는 기간을 앞두고 있어 충분히 감안하고 넉넉하게 장을 봤다. 특히나 에이일스타디르를 벗어나서 중간에 미바튼 호수가 있는 구간을 지날 때는 그다음 도시인 아큐레이리로 가지 않는 이상 큰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임을 직감했다. 크리스마스 기간에 미바튼 쪽을 지나며 먹을 식량까지 넉넉하게 장을 봤다.


이렇게 어렵게 에이일스타디르에 도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사히 장을 봤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했다.
위기를 넘긴 이후의 작은 행운. 숙소 방 업그레이드를 해줬다.

에이일스타디르 숙소에 도착해 체크인을 무사히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을 할 때는 거의 눈물까지 나올 뻔했다. 그리고 위기를 무사히 넘긴 이후에는 작은 행운도 따라온다 했던가, 이 기간 이 숙소에 머무는 사람이 많지 않아 내 방을 5-6인실로 업그레이드를 해줄 수 있게 되었다며 리셉션 직원이 귀띔해 줬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게 별거 없다. 오늘 같은 날 이런 행운이 아마 엄청난 선물일 것이다.


엄청난 하루를 보내고 온 것치고는 꽤나 조용하고 단란한 저녁이었다. 물론 겨울에 에이일스타디르를 찾는 사람은 많지 않아 도시 자체가 워낙 조용했던 것도 한몫했다. 저녁을 후다닥 해 먹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밤하늘의 상태를 살핀다. 고요하고 잠들어가는 도시 위로 약간의 눈이 내리고 차분한 밤하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날 하루 지쳐있던 내 마음 한 구석에서 나 자신에게 물어오는 질문을 듣는다. "그 난리를 겪고도 지금 밤에 나갈 궁리를 하는 너라고?"


불과 위기를 넘긴 것이 몇 시간 전이었지만, 그럼에도 위축되어 있는 것은 허락할 수 없었다. 기록에 미쳤던 자가 끝을 보기 위해 이곳에 온 이상 내가 품고 있던 의미란 그랬다. 결국 에이일스타디르 주변의 지도와 지형을 살피고, 밤하늘과 오로라 예보를 확인하던 나는 이내 옷을 단단히 여미고 카메라 장비를 챙겨서 다시 밖으로 나섰다. 행선지는 에이일스타디르 외곽에 있는 거대한 강, 라가르플요트(Lagarfljót)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ICELAND] 분기점 (EP.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