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는 크게 빗나갔던 동부에서의 첫 일정들
자연은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순간의 최선을 보여줄 뿐
2022년 12월 23일 새벽, 에이일스타디르 1번 국도 반대편 북부 방면
그새 기운을 차리고 제법 씩씩해진 나는 숙소에서 나와 차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아이슬란드로 출발해 오기 전부터 이곳 에이일스타디르에 대해서는 제법 조사를 많이 해두었다고 생각했었다. 아이슬란드 동부 최대의 거점 도시로서 레이캬비크에 비해서는 그 규모가 현저히 작은 편이지만, 이곳을 기점으로 동부의 피요르드들을 구석구석 둘러볼 수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세이디스피요르라는 마을은 이스트 피요르드 중에서 으뜸으로 꼽힌다. 또한 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 라가르플요트는 일명 '네스호의 괴물'이 산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했다.
남부를 지나친 순간부터의 아이슬란드는 한층 더 험한 날씨와, 그 날씨로 인해 갖고 있던 본연의 모습 상당수를 내게 보여주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묘하게 이 동부에서 보낼 시간은 기대가 되었다. 중간에 눈밭에 빠지는 악재가 있었지만 동부로 넘어오는 해안선 도로가 너무 아름다웠던 것이 그러한 나의 감정에 더더욱 불을 지폈던 것이다. 악재를 겪었음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밤에 또다시 발걸음을 재촉하게 할 만큼 이곳의 아름다움은 치명적이었다.
남부로부터 도시로 들어온 초입에서 반대쪽 1번 국도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즉, 나중에 북부로 떠날 길의 초입 방향으로 길을 잡은 것이다. 에이일스타디르를 기준으로 라가르플요트는 내륙 방면으로 더욱 깊숙이 찔러 넣은 듯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 방향으로 흘러나가는 물줄기는 바다와 만나 이스트 피요르드의 차가운 겨울바다와 만나게 되는 지형이었다.
숙소에서 나와 내가 내린 결정은 이 라가르플요트를 동쪽에서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을 초입을 벗어나자마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깊은 어둠이 나를 감싼다. 다시 길 위에는 불빛 한 점 없이 내 차가 뿜어내는 헤드라이트 불빛뿐이었다.
2022년 12월 23일 새벽, 라가르플요트(Lagarfljót) 동쪽 방면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오로라를 이날 밤에도 만났고, 동시에 어마어마한 방해꾼도 함께 만났다. 구름이 잔뜩 낀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호수의 동쪽은 사진적 관점에서 내가 원하는 극적인 배경이 생각보다 잘 연출되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펼쳐진 채 눈으로 뒤덮인 평지와 언덕의 연속이었다.
두세 차례 이동하며 몇 장을 담아본 후 길가에 차를 세우고 구름이 행여나 걷힐까 잠시 기다렸지만 도저히 걷힐 구름이 아닌 듯했다. 구름만 없으면 배경에 대한 불평불만을 지울 만큼 아름다운 그림이 나왔을 것 같은데, 불과 몇 시간 전에는 조난당해서 도시에도 못 들어온 채 낙오될 뻔했던 주제에 그 새 불만을 늘어놓고 있는 나 자신이 꽤나 여유만만해 보였다.
회픈과 스톡스네스에서 만났던 깔끔한 오로라를 보기에는 아무래도 어렵다는 생각을 자정이 넘은 시간쯤에 확신하고 결국 철수를 결정했다. 아쉽지만 날이 밝고 나면 좀 더 이곳의 호수와 이스트 피요르드 주변을 둘러보며 다음 날 밤을 기약할 수 있는 촬영 스팟을 찾기로 다짐하며 숙소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2022년 12월 23일 아침, 에이일스타디르 숙소 ~ 세이디스피요르
다음 날 아침, 어김없이 숙소에서 일찍 눈을 떴다. 폭풍 같았던 남부를 지나왔던 탓인지, 동부에서는 마음의 안정감이 들며 고요한 겨울 숲 속에 있는 듯한 말끔한 감정을 느끼며 눈을 떴다. 4-5인실을 나 혼자 쓰고 있었기에 이불속에서 가만히 천장만 응시하고 있던 내 주변에는 거대한 적막뿐이었다. 그렇게 딱 5분 정도만 이불속을 지키다가 다시 힘차게 이불속을 부스스 빠져나왔다.
여행의 절반쯤 지나온 이 시점이 되어서는 익숙해질 법한데, 여전히 아침에 번쩍번쩍 눈을 뜨고 바로 침대 밖으로 나설 수 있는 나 자신이 나도 여전히 놀라웠다. 동기부여 된 인간은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마 한국에 돌아가서도 이런 동기부여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속으로 되뇌며 아이슬란드 이스트 피요르드의 차가운 아침 공기와 맞닿을 준비를 했다. 레이캬비크와 남부를 지나온 이 시점부터는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고 있음을 피부로 직접 체감하고 있었다.
에이일스타디르에서 1번 국도를 타지 않고 93번 국도로 빠지면 세이디스피요르로 가는 길이었는데, 운전으로는 30분 거리였다. 하지만 문제는 거리나 시간이 아니라 목적지까지 가는 길 그 자체였다. 에이일스타디르에서 세이디스피요르로 가기 위해서는 침식지형으로 이루어진 깎아지른 고갯길을 넘어야 했던 것이다. 93번 도로로 들어서는 초입부터 이 길이 심상치 않은 상태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마치 한국의 구 미시령 고갯길과 같은 느낌이었고 눈이 전혀 제설도 되어 있지 않았으며, 심지어 구불구불 이어지는 절벽 도로에는 가드레일 하나도 없이 그저 밧줄만 쳐져 있는 길이 이어져 있었다.
겨울철에는 아무도 이곳을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과연 정말이었다는 것을 생사가 걸린 이 운전에서 몸소 느끼고 있었다. 사실 이 93번 도로의 중간에는 세이디스피오르에 도착하기 직전 피요르드 지형과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절벽으로 통하는 샛길도 있었지만 이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길은 눈으로 온통 뒤덮여 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였다. '거길 올라가긴 무슨! 세이디스피요르나 무사히 들어가자고.'라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며 수동기어 조작을 연신하며 거북이처럼 눈 덮인 도로를 느릿느릿 내려갔다. 위태로운 운전과 수십 분간 씨름하자 마침내 내리막길이 끝나고 마을 초입이 나타났다.
에이일스타디르를 처음 봤을 때의 첫인상은 마치 학교에서 구석 자리에 앉은 말 없는 친구를 보는 기분이었는데, 겨울철 여행객의 발길이 거의 전무한 세이디스피요르의 아침은 흡사 유령도시 같았다. 거리는 온통 발목 높이까지 오는 눈들로 가득했고 정말 드물게 돌아다니는 마을 사람들 외에 유일하게 소란한 존재는 마을을 돌고 있는 제설차뿐이었다. 적막한 도시에 걸맞게 제설차 운전하는 아저씨 표정도 무뚝뚝함 그 자체였는데,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되돌아오는 인사는커녕 표정의 미동도 하나 없이 그대로 스쳐 지나가버리셨다. 약간은 허무한 감정이다. 이것이 정녕 내가 아이슬란드 동부의 정점이라 생각했던 그 장소가 맞았던 걸까.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변화무쌍한 아이슬란드 날씨처럼 어느새 그 적막에 적응해 버린 듯했다. 차를 항구에 세워두고 항구 주변을 먼저 둘러보았다. 바다를 품고 있는 피요르드 지형. 부둣가의 주변으로는 험준하고 높은 산세가 그대로 이곳까지 파고 들어온 바다를 감싸 안은 모양새였고, 그렇게 품에 안긴 채로 바다는 겨울바람에 리듬을 맞춰 정박한 배들과 함께 끼익 거리는 소리를 내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항구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정박된 배들의 선실 안쪽으로부터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불빛은 혼자서 유일하게 평온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지만 언젠가 봄이 다시 돌아온다면 이 배들도 다시 밧줄을 풀고 출항하겠지'라고 혼자 되뇌며 항구가 맞이한 이 겨울에 홀린 듯 사진을 담았다. 피요르드의 거대함을 모두 담을 수는 없었지만 (광각렌즈로 하려면 할 수 있었겠지만 억지로 그 거대함을 담아내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멀지 않은 거리의 밖에 안개가 끼어있어서 산세를 모두 담는 것은 포기하고, 이 사진을 언젠가 다시 보며 회상하게 될 나 자신이나 다른 이들의 상상에 그 웅장함의 발현을 맡기기로 했다. 대신 그 안개의 신비로움과 겨울의 적막, 정박한 배들의 침묵을 기록에 담았다. 그렇게 이스트 피요르드에서의 아무도 없던 항구에서 내 감정과 그 순간의 분위기를 눌러 넣었다.
마을 안쪽으로 발걸음을 돌려보았다. 게스트하우스 간판이 달린 건물도 마을 중앙부에서 발견했지만, 교통 자체가 사실상 끊긴 이 시점에 아마도 운영하고 있지 않을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건물이 마치 어릴 적 읽었던 스웨덴 동화책에서 나올 것만 같았던 그런 건물이었다. 아마도 봄이나 여름에 이곳에 하룻밤 머물며 밤에 피요르드와 항구 근처를 거닐 수 있다면 꽤나 근사할 것이었다. 특별히 이유는 없었지만 마을 내의 교회와 근처에 붙어 있던 이 게스트 하우스 건물이 묘하게 마음에 들어서 사진 속에 붙잡아 두었다.
다만 사진과 별개로 아쉬운 것은 이곳 세이디스피요르 마을에서 반대로 마을을 감싸고 있는 이 해안절벽들의 웅장함을 한 장에 담아낼 수가 없었다. 사실 360도 캠이나, 초광각 렌즈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해냈겠지만, 그간의 사진을 해오며 나 자신이 '무리한 왜곡'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느 날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사진 세계에서 성장해 온 나는 이곳까지 와서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억지로 꾸며낸 기록을 하지 않고 있었다. 때로는 사진에 보이지 않는 프레임 바깥에 있었던 존재에 대해서 상상하는 재미도 있을 테니까.
마을의 서쪽인 높은 둔덕으로 가는 길까지 올라가자 어느 지점까지 도달하니 눈이 허리까지 쌓인 곳이 가로막아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지만, 충분히 더 넓은 시야로 마을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 장면을 놓치면 아마 이 여행에 두고두고 후회할 순간이겠지'라며 기꺼이 나는 셔터를 넉넉하게 눌러댔다. 아마도 꾸며냄 없이 광활함을 담아낼 수 있는 한계가 이 장면이었을 것이다. 해안절벽의 날카롭게 벼려진 끝, 그 아래에 자리 잡은 주택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 그리고 그보다 앞에서 언제든 출항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는 고요한 겨울 항구의 모습. 많은 것들을 응축해서 한 장으로 만들어낸다.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는 마을에서 구경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무사히 마을에 눈길 운전을 뚫고 와서 이 정도 둘러본 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감사하기로 했다. 지나친 욕심을 내려놓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감사할 줄 아는 것을 배우는 것도 이 여행이 나 자신에게 주고 있는 지혜였다. 그리고 이곳까지 와서 둘러봤지만 아직 해가 떠있는 시간은 한참이나 남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다시 차에 올라타 왔던 고갯길을 되돌아가기로 했다.
2022년 12월 23일 이른 오후, 에이일스타디르 ~ 라가르플요트
세이디스피요르를 뒤로하며 남은 하루를 부지런히 사용하기 위해 조심스럽고도 서둘러 고갯길을 넘었다. 마지막까지도 끝내 마을 방향으로부터 눈길을 거두지 못한 채였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투덜거렸으면서도 결국 떠날 때는 아쉬운 마음이었다. 사납게 뒤덮은 눈도 마을의 모든 아름다움을 가릴 순 없었다는 것이 아마 그 이유였을 테다. 결국 그 사실을 나는 마을을 떠나는 순간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되돌아 넘어올 때는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었기 때문에 고갯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에이일스타디르와 라가르플요트가 한눈에 보였다. 빙판 일색에 안전장치 하나 없는 고갯길은 돌아올 때도 너무나 위태로웠지만 그 순간 그곳으로부터 내려다 보이는 다음 목적지 라가르플요트가 아주 길고도 거대하게 걸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옆으로 늘어트려놓은 듯한 에이일스타디르 도시의 모습은 너무나도 작고 미약해 보였다.
'바로 지금 향하고 있는 다음목적지도 저렇게 거대하네.', '저 너머에는 더 험난한 북부가 기다리고 있겠지. 어떤 곳일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곳에서의 나는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일순간 동시에 스쳐간다. 그러면서도 그 아찔한 순간에도 기록 욕심은 여전히 넘쳐흘러서 고갯길 중턱에 차를 세우고 내려다 보이는 저 거대한 세상을 찍었다. 내가 결국 나아가야 할 저 거대한 세상이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큰 위기를 넘기며 무사히 세이디스피요르까지 다녀와 다시 에이일스타디르로 들어선 나는 도시의 반대편 방향 외곽으로 향하고 있었다. 행선지는 다시 라가르플요트. 간밤에 찾아 갔을 때는 어둠 속에 숨었고, 조금 전까지는 아주 먼발치에서만 나를 지켜보고 있던 그곳을 마침내 내 눈앞에 또렷하게 대면하러 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