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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숲사진가 Aug 18. 2024

날 것

최대한 무편집에 가깝게 써보는 올여름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날 것의 표현이 어렵다는 것을 문득 다시 느꼈다
2024년. 여름. (FUJIFILM X-H2)

"사실 우리가 아무런 편집과 가공을 거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표현을 콘텐츠로 담아낸다는 것은 정말 어렵잖아요. 그걸 모두가 보는 공간에 그대로 내보내는 일이니까."


최근 새로 합류한 모임이 있다. 각자의 자기 관리 / 계발에 대한 내용을 각자가 목표를 세우고, 그것들을 해나가는 과정과 결과를 서로 공유하는 일종의 스터디 모임이었다. 이 모임을 하지 않았어도 내가 나의 삶을 그대로 살았을 것은 변함없다. 하지만 신선함과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좁은 곳에 갇혀버릴 수 있는 나 자신의 시야를 계속 더 멀고 깊은 곳을 보도록 붙들어준다. 사람들도 모두 각자의 길에서 최고를 향해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기에 아마 정을 붙일만한 모임이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 모임이 최근 처음으로 오프라인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위의 가장 첫 문장은 그 모임 도중 나온 이야기였다. 콘텐츠와 늘 밀접하게 사는 나 자신의 생각을 문득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말이었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며칠간 곰곰이 생각에 잠기게 하는 이야기였다.


깊은 고민 끝에 저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스토리텔링과 진중함이 강점인 텍스트 콘텐츠라고 해도 결국은 나의 가장 깊은 마음속 근원에 자리한 모든 마음속 이야기까지 다 드러내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무엇을 만든다고 해도 우리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것을 하고, 의도에 맞게 배제할 것들을 추려내고 재가공을 한다. 

우리가 이따금 정말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이야기를 따로 보관하고 싶을 때는 개인 메모장 등을 사용하는 것이 이런 이유일 것이다.


이미 사진에서도 느껴지는 뜨거움. 카메라를 거의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정신을 못차린 여름이었다.

2024년도의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나 스스로 더위를 잘 견딘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어디 한번 버텨보시지'라고 하는 듯 무시무시한 더위와 습도가 이번 여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물론 날씨 이외에도 대부분의 내 시간들은 지금도 힘든 시간의 연속이다. 이 또한 나의 시간이니까 딱히 부정할 마음은 없다. 지난 회사로부터 퇴사를 한 이후 약 11개월째 나는 새로운 자리를 다시 손안에 잡아낼 듯하면서도 아슬하게 한 끗 차이로 미끄러지며 번번이 놓치는 중이었다. 여름은 내게 늘 즐거운 계절이었지만, 올여름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지 못했고, 세상의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 나 자신의 시계만 멈춰 있다는 생각은 끊임없이 날 괴롭혔다.


그럼에도 이 여름의 기록이 의미 있을 이유는 나의 시계와 이 세상의 시계가 서로 엇갈리는 동안 기억하고 싶은 감정의 교차점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완벽하지 않겠지만 이 것들을 최대한 '날 것' 그대로 남기며 기억해보고 싶었다. 




#1


매년 한강 반포대교 부근에서 여름 이맘때쯤 늘 찍게 되는 사진이 있다, 석양이 정말 아름답게 걸리는 기간이 여름에 한 번쯤 꼭 생기는데 올해도 그 순간을 만났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도중에 급하게 세워 아이폰으로 빠르게 담아내었는데, 카메라가 없던 것이 정말 아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수단이 아쉬울 뿐 기록이 갖는 가치는 언제나 변함없었고, 그 자리의 그 순간이 매년 보여주는 모습도 언제나 그대로였다.


이 시기의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인 것들에게는 감사하고, 피치 못하게 멀어지는 존재들에게는 그들을 원망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았지만 동시에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가장 즐겁고 근심이 없는 상태일 때 그 즐거움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이들이 있었고, 내가 가장 곤경에 처했을 때 같이 술 한잔 하며 후일의 도약까지도 함께 기약할 수 있는 변함없거나, 뜻밖의 의외인 존재들도 있었다. 생각보다 남의 불행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이 지난 몇 년간 터득한 지혜였다.


당연히 그 모든 서사들에는 평화를 지켜내지 못한 나의 잘못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지지를 보내주는 이들에게는 더욱 감사하게 되는 마음을 갖게 되는 시간이었다.


올여름 가장 좋아했던 사진
매년 여름 한강 반포 지구에는 꼭 이런 석양이 걸리는 때가 있다. 올해의 그 순간을 다시 만나서 얼른 담았다.




#2


얼마 전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 알법한 대기업으로부터 면접 연락이 왔었다.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준비를 하고 갔었고, 지난 경력이 무색하게 굉장히 긴장한 상태로 면접장에 들어갔다.


이 날의 면접은 현장에서 면접이 끝나기도 전에 보기 좋게 탈락을 하게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합불 여부보다도 그날의 면접관이었던 그룹장이라는 분이 내게 해주신 이야기였다. 첫인상은 대단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면접장에 들어오셨지만, 이야기를 시작하니 내 이력의 모든 것들과 심지어 포트폴리오의 작은 항목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훑은 채로 나와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그룹장이라는 분은 눈썰미도 대단히 날카로워서, 내가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전업하기에는 두려워서 마케터의 길로 갔다는 것도, 무언가에 빠지면 몰두하는 성격이라는 것, 내가 생각보다는 약아빠지지(?) 못했다는 성격적 결점 등등 미세한 디테일까지도 모두 꿰뚫어 본채 면접장에 마주 앉은 나를 상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치 손에 쥐고 있는 내 카드패를 모조리 읽혀버린 채 카드게임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에 정말 분한 마음뿐이었지만, 그분이 나를 놀리거나 얕잡아보는 것이 아닌 나라는 사람과 캐릭터 자체에 꽤나 흥미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당신은 영어통번역학과를 전공했는데, 나중에는 콘텐츠를 만들겠다고 크리에이터로 뛰어다녔고, 그러다가 또 마케터를 했네요? 굉장히 확률 낮은 게임만 골라서 하셨네."


"정말 재밌네요. 무언가에 빠지면 그걸 끝장을 봐야만 하는 성격이신가?" (정확했다)


"브런치도, 스냅사진도 꽤나 재밌어 보이는데, 왜 이걸로 계속 파고 나갈 생각은 안 했어요?"


"굉장히 재밌는 사람이네요, 요즘 애들처럼 영악한 것도 없고, 근데 당신은 이런 기획 포지션보다는 사실 당신의 크리에이티브를 살릴 수 있는 제작에 가까운 쪽이 훨씬 더 어울릴 거 같아요. 잘 생각해 봐요. 나와 맞지 않는 조직에 소속된다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니까. 당신에게도 조직을 선택할 권리는 있잖아요."


이 날의 면접이 끝난 직후의 나는 이미 하루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버린 탓에 기진맥진 한 채로 면접장을 나왔지만, 그날 한 가지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잘하는 것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언가 한 가지에 굉장히 몰두하는, 그것에 미쳐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의 나를 보았을 때 상대도 내가 경쟁력 있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나 스스로를 다스리고 방향성을 잡는 척도로 한동안 중요한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가장 사랑하는 일을 하세요


그리고 이 이야기를 어느 날 주말 저녁 범바스틱과 한강 잠수교 북단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그대로 풀어놓고 있었고, 그 역시 이 이야기를 꽤나 흥미로워하며 '내가 좋아하는 일을 미쳐서 하는 상태일 때의 나'에 대한 견해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날의 우리 역시 좋아하는 일을 하던 중이었다. 범바스틱이 참여한 영상 공모전을 위해 같이 촬영 중이었고, 나 역시 틈틈이 그날을 기억할 수 있는 반포대교 무지개분수가 보이는 야경을 담았다.


무엇보다도 이 날의 기록 중 백미는 야경 반대편 동작대교 방면에 아주 크게 걸려있던 붉은빛 달이었다. 때 마침 망원렌즈를 챙겨갔던 덕에 내가 범바스틱의 장비로 찍지 못한 신을 몇 개 담았고, 영상 공모전에 꽤 근사한 씬으로 반영이 될 수 있었다. 내가 농담으로 '그래도 버스 탈 뻔한 거 0.8인분 정도는 해냈다'라며 웃었는데 그 정도로 제법 근사했던 그날 밤 동작대교 위의 달이었다.


저 달 역시 지면 다시 새로운 해가 뜨고, 새로운 하루의 시간이 흐른다. 그날 면접 자리에서 그룹장이 이야기했던 '나에게 맞는 조직'은 어디로 정의되어 새롭게 나타나게 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그날 밤 던져보았다.


초망원렌즈는 역시 여행가에게 없어선 안될 존재





#3


세상의 시간은 그대로 흐르고, 나의 시간만 멈춰버린 그 사이에 여행에 대한 나의 갈증은 고이고 계속 커져가고만 있었다. 


매년 한번씩은 떠나는 별을 보러 가는 것, 섬으로 떠나는 여행, 올해 목표로 했던 히로시마 여행, 대구에 한 번쯤은 야구 보고 돌아오는 일, 새로 알게 된 동생들과 창원에서 보기로 했던 약속, 충주로 캠핑 가고 싶다고 했던 이야기 등. 아마 별 일이 없었다면 이미 저 중 상당수를 올해 다녀와 지금쯤 가득 쌓인 사진들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번 여름의 초입쯤, 대부도에 친구들과 드라이브를 갔을 때 하늘에 지나가던 비행기를 보자마자 거의 병적에 가까운 집착으로 곧바로 위의 사진을 담았다. 나는 예전부터 늘 기차나 비행기 사진을 담아내는 것을 좋아했는데, 여행을 출발할 때 느껴지는 그 설렘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싶은 나의 바렘이었다.


X-H2로 카메라를 바꾸고 자주 쓰지 않았어서 그런지, 여전히 고화소의 성능에 놀랄 때가 많다.


이런 내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을 엄마가 일하시는 도서관의 연휴 일정과 나의 소강상태인 시점 즈음에 겹쳐 간단한 지방 여행이라도 다녀오자고 했을 때가 비로소 올해 내가 누릴 수 있었던 첫 여행이었다. 물론 이 여행은 이전에 내가 느꼈던 임팩트를 엄마에게도 선물해드리고 싶었던 탓에 지난날 방문 했던 구례 곡전재를 선택하며 오히려 엄마의 힐링 여행이 되어버리긴 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떠나보는 게 어디냐 싶은 생각이었는데, 지난날 방문했던 겨울을 넘어 여름에 다시 찾게 된 구례 곡전재는 내게도 꽤 신선한 리마스터링이 되어줬다. 특히 이 여행에서 사용한 색 레시피가 '리코 GR3' 카메라에 들어간 포지티브 필름 색상을 흉내 낸 세팅 값이었는데, 특별히 색 고민 없이 바로바로 뽑아내고 싶다는 나의 욕심도 한몫했다. 그리고 이런 고택에는 또 그런 색 끼얹는 게 이쁘지 않겠나 싶기도 했고.


구례 화엄사의 오픈런(?)의 기록. 사람 없는 화엄사를 담을 수 있는 건 흔치 않다.


내가 구례와 곡전재를 처음 만났을 때의 임팩트 이상으로 엄마가 꽤나 즐거워하셨다. 특히 곡전재에서 지내는 하루동안 엄마는 "이런 한옥같이 나와 기운이 맞는 곳에서 하루 보내면 얼마 안 자고 굉장히 개운하고 그래"라고 하셨는데 이 순간에도 문득 그 면접에서 들었던 '나와 어울리는 조직'이라는 그 이야기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서 스스로가 퍽 우스웠다.


한편 이 여행 마지막 날 새벽에 화엄사를 꼭 가고 싶다는 부탁도 꽤나 우리 엄마다운 이야기였는데, 화엄사에서 결국 날 위한 기도를 하셨다.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엄마도 그냥 엄마를 위한 기도를 하고, 엄마를 위한 일을 더 많이 해도 될 텐데 엄마는 끝까지 내 생각이 가장 많다. 아마 이렇게 내 시계가 멈춰 있는 시간이 가장 괴로운 이유 중 하나도 이런 장면에서 느낄 수 있는 죄송스러움이 그 이유일 것이다. 동시에 그때의 나에게 아이슬란드가 간절했던 것만큼 엄마의 소원 속 여행지인 북유럽에 함께 가는 것도 반드시 같이 모시고 가야겠다는 큰 목표가 아이슬란드 여행 이후 제법 크게 마음속 한편에 자리 잡게 되었다.




#4


모든 '날 것'의 이야기들을 마음속에만 품고 있다가 "이걸 오늘 글로 써봐야겠어"라고 결심할 즈음에 오늘 마주친 것이 바로 이 만개 직전의 연꽃이었다.


거센 소나기를 한 차례 맞았기에 꽃과 이파리 부분에는 아직 미처 떠나가지 못한 빗방울들의 흔적이 가득한 채였고 제법 싱그러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발견한 지금 이 순간의 의미를 담은 기록을 믿기로 했다.


결론은 어떻게든 날 것이며, 이번 여름도 훗날에는 한편의 기억으로 추억하게 될 것이다. 쥐고 있던 카드패를 다시 뭉치 속에 넣고 섞은 후 다시 집는 것과 같이 많은 것이 바뀌고 새로 쓰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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