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로 향한다. 두려움과 설렘 사이에서 달린다.
여행이 반환점을 돌았다. 북부로 떠날 시간이었다.
2022년 12월 24일 이른 아침, 에이일스타디르
전날 밤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에 없었다. 하지만 여행의 가장 완벽한 오로라를 보았고, 그 오로라에 함께 반짝이던 강가에서 함께 기뻐하던 기억만은 선명했다. 길게 남아있던 여운과 함께 기분 좋게 숙소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동행 하나 없었고 맞이하는 의미야 좀 다를지라도 이 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동부를 떠나 더 거대한 미지의 영역인 북부로 떠나는 날이다. 하루를 조금 더 기운차게 시작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물론 의미와 기분과는 별개로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서 중요한 과제를 하나 해결해야 했는데, 바로 어제저녁부터 차 계기판에 나타난 타이어 공기압 경고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국이었다면 사실 매우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였지만, 아이슬란드에서 레이캬비크도 아닌 이곳 에이일스타디르에,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날 아침에 여는 자동차 수리점이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목적지인 미바튼 호수 인근에는 이곳보다 시설이 더 열악할 것이었기에 수리를 한다면 반드시 이곳에서 해야만 했다.
구글맵 기준으로 영업 중인 자동차 수리점 몇 곳을 찾아서 전화를 해보니, 다행히도 마침 내가 떠나가는 길 근처에 한 곳이 영업을 한단다! 그것도 무려 아침 7시부터. 해뜨기 전부터 움직이면서 해가 떠 있는 시간 1분 1분을 귀하게 아껴야 하는 내게는 너무나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선물이라는 게 사실 별 다른 거 없이 이런 게 선물이라는 마음을 가지며 호스텔에서 짐을 들고 나와 차에 실었다.
2022년 12월 24일 이른 아침, 에이일스타디르 1번 국도 진입 전, 자동차 수리점
에이일스타디르를 벗어나 북부로 가는 1번 국도로 다시 오르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며 도시와 멀어지게 된다. 떠나기 전에 잠시 한번 도시를 뒤돌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겨울의 동부에 별 볼거리가 없다고 하겠지만 나에게 이곳은 모든 의미와 기적이라는 단어를 놔둔 채 떠나는 곳이 되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이 도시에 뜨거운 작별을 건네며 자동차 수리점에 차를 세웠다.
자동차 수리점은 정말 도로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채 좀 황량한 느낌마저 주는 곳이었는데, 도착해서 아무 인기척이 없기에 다시 전화를 하니 곧 출근자가 그쪽으로 도착할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그럼 물론이지 오늘 같은 날에 그 정도 기다림이야'라는 마음으로 잠시 차를 놔두고 주변을 15분 정도 산책했다.
이 날 아침의 기온은 약 영하 25도에 육박했고 지면과 공기 중으로부터 올라오는 한기는 방한 장비들을 비웃으며 매섭게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북부로 출발하는 방면에 보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너무 추운 나머지 강으로부터 물안개가 올라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사실 문과라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침의 강물 위로 피어오르고 있던 것은 분명 뿌옇게 올라오던 물안개였다.) 각오를 단단히 했지만 이후의 일정이 순탄치 않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잠시 걷다가 다시 수리점 쪽으로 돌아가니, 이내 사람이 금방 도착해서 자동차 수리점의 문을 열고 셔터를 올려주었다. 이런 날의 이런 시간에 사람이 올 줄은 몰랐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의 한 젊은 남자였다. 타이어 공기압 점검을 위해 왔다니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차와 차키를 맡겨달라고 했다. 전날 밤부터 걱정을 한 바가지 했던 게 너무 우스워질 만큼 타이어 공기압 재조율은 순식간에 끝났고, 혹시나 해서 내가 비용 지불을 해야 하냐고 물으니 그냥 가면 된다고 한다. 한국이랑 똑같이 여기도 펌프 정도는 그냥 쓰게 해 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사 인사를 하고 나왔다.
과정이야 어쨌든 시기적절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던 것은 크리스마스이브날에 여행자인 내게 찾아온 나름의 행운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에이일스타디르와 정말로 마지막 작별을 했다. 언젠가 한 번쯤은 다시 올 수 있겠지 하는 마음 한 조각을 남겨둔 채.
2022년 12월 24일 이른 아침, 1번 국도, 미바튼 호수 방향
타이어로 손 봤으니 본격 이동일의 여정을 이어간다. 오늘의 행선지는 북부의 미바튼 호수로 정했지만, 이 시점부터는 이 여행의 그 어떤 것도 확언하거나, 단정 지어 이야기할 수 없었다. 날씨와 눈보라는 더욱 사납고 거세질 것이며 그로 인해 숙소를 잡는 일 또한 미리 예약하지 않고 이동 중간중간에 상황에 따라 즉흥으로 결정하며 움직이기로 하였다. 미바튼과 북부의 핵심도시 아큐레이리 주변에서 이틀밤을 보낸 후, 서부의 스네이펠스네스 반도로 이동하면 될 것이었다.
에이일스타디르가 등 뒤로 완전히 사라져 갈 무렵 Jökulsá á Dal útsýnispallur 이라는 곳에 내비를 찍어둔 지점에 도착했다. 요쿨사아달 (Jökulsá á Dal)이 강 이름인 듯했고, 그 강 이름에는 '요쿨사(Jökulsá)'가 들어간 것으로 보아 아마도 아이슬란드 내륙 만년설로부터 발원한 강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강은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이곳 아이슬란드의 동북부를 지나 이스트피요르드가 있는 바다로 흘러나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흐른다.
그 흐르는 강을 품고 있는 협곡이 지금 내가 차를 주차하고 잠시 내린 이곳이었다. 아이슬란드의 협곡들 역시 기암괴석으로 유명했고, 그 협곡과 강이 흐르는 길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다리가 있는 곳으로 지도에서 확인했다. 레이캬비크나 남부에서는 흔하게 볼 수 없는 협곡 지형이기도 하고 어차피 미바튼 호수까지 가는 동안 하루가 다 가버릴 것이기 때문에, 중간중간 볼거리들은 천천히 즐기며 갈 생각이었다.
차 문을 열려고 하자마자 강풍이 내 차 문을 홱 잡아채려 달려드는 게 느껴져 얼른 힘을 꽉 쥐었다. 아이슬란드에서 차를 빌릴 때는 실제로 이런 부분에 대한 내용도 차 보험에 포함이 되고, 주의 사항으로도 고지가 되었다. 차 문을 열 때 바람에 밀려 순식간에 세게 열려버리면 차 문 경첩이 반대 방향으로 꺾여버릴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겨우겨우 차 문을 바람과 역방향으로 우겨 닫은 후에 협곡 중간의 다리를 향해 걷기 시작하는데, 정말이지 너무나도 추웠다. 안에 히트텍을 입었고, 털이 달린 방한바지와 깔깔이까지 입은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순식간에 방한 장비를 뚫고 들어오는 추위였다. 그 와중에 어제 헬기 포스 폭포에서 겪은 경험이 생각나, 카메라 배터리를 얼른 분리하여 내 몸 안주머니에 넣었다. 배터리를 잠깐이라도 따뜻하게 했다가 찍을 때만 다시 장착하여 진행할 요량이었다.
추위에 압도당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협곡의 양옆 절벽으로는 거대하면서도 날카롭게 벼려진 고드름들이 잔뜩 달려 있었고, 흐르는 강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흰 눈만이 강이 흐르는 길 위에 가득 덮여있었다. 다리까지의 실제거리는 아마 70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겠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는 것이 이미 천근만근이었다. 겨울이 압도해 버린 협곡은 그 모습대로 아름다웠다고 할만했지만 그 아름다움을 10분도 제대로 만끽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놓칠 수는 없었던 그 비경을 재빠르게 수십 장 가량의 사진으로 기록한 채 (그 와중에도 사진에 핀이 나갔는지에 대한 체크는 했다는 게 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슬슬 시리다 못해 감각이 없어지고 있던 발을 재빠르게 움직여 차로 돌아갔다.
2022년 12월 24일 이른 아침, 1번 국도, 미바튼 호수 방향
에이일스타디르와 미바튼 호수 사이의 거리는 사실 약 160km가량으로, 200km가 채 되지 않아 지금까지의 이동일에 달려야 하는 거리 중 가장 짧은 거리였다. 타이어 공기압도 일찌감치 해결했고, 차 안에서 히터와 함께 몸이 녹고 있으려니 비로소 한숨은 돌렸다고 할만했다. 비록 겨울 북부의 도로를 달린다는 것은 소름 돋을 정도로 사람하나 보이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끝없는 설원과, 나 혼자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어둠 속에서 이내 눈이 익으면 주변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듯, 혼자 있는 시간도 나름 잘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금방 적응할만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끝내 북부의 추위는 도저히 웃어넘길만한 그것이 아니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쯤 왔을까 싶을 때쯤 잠시 미바튼 호수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발견하고 중간에 잠시 차를 세웠던 순간이 있었는데, 보이는 이정표마다 모조리 서리가 끼어있었고, 제설해 놓은 양옆의 눈밭들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일지언정, 밟는 순간 어느 정도 깊이까지 나를 집어삼킬지 가늠조차 가지 않았다. 시리도록 푸른빛으로 담아낸 이 기록들은 지금에는 웃으면서 감성 넘치는 기분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찍는 순간에는 정말 쉽지 않다고 느꼈던 감정들이 가득했다. 그 치명적인 추위가 빚어낸 설원과 1번 국도가 어우러진 장관들은 자주 차를 세우고 연신 내게 셔터를 누르도록 만들었지만 밖에서 조금이라도 오래 있었다간 냉동창고에 있는 참치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할 것만 같았다.
이 길을 지날 무렵부터 나는 여행이 반환점을 돌았다는 사실을 넘어 '여행이 점점 깊어져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동부로 들어갈 때는 '여기부터는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곳'이라는 생각에서 그쳤다면, 북부로 들어선 지금은 추위도, 공기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도 점점 나를 압도하는 기분이 들었다. 성난 북부의 겨울이 나를 압도하며 짓누르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점점 말이 없다가도, 이따금씩 나 자신에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차를 몰다가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만나면 차를 잠깐 세우고 감상하는 것을 반복하며 아무도 없는 북부의 설원을 감상했다.
고요함 속에 공존하던 중압감에 휩싸여가던 나를 잠시 환기시켜 준 곳은 생각지도 않게 마주친 어느 한 휴게소였다. 사실은 휴게소가 아닌 투숙객을 받는 여관의 기능을 하는 곳이었지만 간단한 다과와 먹을거리도 팔고 있었으니 한국인인 내 입장에서는 '숙박도 가능한' 휴게소와 진배없는 곳이었다.
화장실을 들리기 위해 세웠던 곳이지만, 분위기상 화장실만 사용하고 쌩 가버리기에는 괜히 미안한 마음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후 핫초코를 한 잔 같이 시켰다. 주문을 받아준 분은 아마도 이 여관 주인인듯한 거구 장신의 할아버지이셨는데, 겨울철 서릿발 같이 무뚝뚝한 인상으로 내 주문을 받아 들더니 고목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묵묵히 코코아가루 통을 꺼내 들고 물을 끓이러 부엌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주인 할아버지가 부엌 안쪽으로 사라져 있는 동안 나는 안쪽에 들어가 넓은 홀의 한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이 여관에 투숙하는 사람들이 식사를 할 수 있게 마련된 식당 같은 공간인 듯했다. 곳곳에 귀여운 크리스마스와 겨울테마 장식들이 꾸며져 있었고 한쪽 구석에 있던 소파에 한 꼬마아이가 앉아 놀고 있었다. (아마도 여관 주인집 꼬마아이였을 것이다) 이내 나온 핫초코 한잔을 받아 들고 성난 겨울을 헤쳐 나오던 시간을 잠시 벗어나 그들과 이 따스한 공간을 지긋히 바라보며 여유를 즐겼다.
핫초코 잔이 천천히 비워질 동안 북부를 지날 여정이 어떤 결과로 끝난 채 내가 서부로 향하고 있을지를 상상해 본다. 그리고 그 감정은 설렘일지, 두려움 속에 헤매게 될 나의 나약함이 될지 양극단 기운이 충돌에 소용돌이칠 때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핫초코 잔도 어느새 바닥을 보였고 미바튼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있었다. 짧은 겨울 해는 기다려주지 않을 테니 다시 떠나야 했다.
미바튼 호수까지의 남은 거리를 확인하면서 다시 주차장으로 나가기 위해 현관문을 나서려고 할 때쯤, 좀 전의 세상 무뚝뚝해 보이던 여관 주인 할아버지가 내 뒷모습에 대고 인사를 건네주셨다. "메리크리스마스!"
'아니 생각보다는 따뜻한 분이셨잖아?' 하는 생각에 나도 얼떨떨에 같이 어색한 인사를 건네며 차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어쩌면 이 할아버지의 모습과 같이 아이슬란드 북부의 성난 겨울도 그 추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이 따듯해지게 해 줄 모습들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그 순간 잠깐 해보았다. (물론 실제로 매우 뜨거운 화산도 곧 만날 예정이었다!) 좀 전의 여관 식당에서 이 미답지(未踏地)를 마주하며 느끼던 설렘과 두려움의 뒤섞임 사이에서 아직은 가보지 못한 땅을 새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설렘의 감정을 더 믿어보기로 하며, 그 감정을 더 크게 지펴서 두려움을 넘어서자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하며 다시 1번 국도 위에 올랐다.
아직 목적지는 미바튼 호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