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 신뢰가 무너지는 풍경
인류의 역사는 늘 굶주림과 전쟁, 권력의 전횡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되어 왔다. 국가는 공동체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서로의 폭력을 제어하기 위해, 그리고 공공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세워졌다. 사람들은 권력에 세금을 바치고, 그 대신 권력은 그들에게 보호를 약속했다. 그러나 보호의 약속이 무너지는 순간, 국가는 단순한 행정조직 이상의 의미를 잃는다. 2025년 가을, 세계 곳곳에서 전해진 세 편의 기사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한 장면 같았다. 네팔, 프랑스, 한국. 세 나라, 서로 다른 역사와 상황 속에서 같은 균열이 벌어지고 있었다.
먼저 네팔. 한때 ‘가난해도 행복한 나라’라 불리며 히말라야의 풍광과 미소 짓는 국민으로 관광 홍보에 쓰이던 나라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청년들의 삶은 점점 옥죄어 왔다. 수도 카트만두의 좁은 거리에서 마스크를 쓴 청년들이 정부 청사 앞에 모여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피켓이 들려 있었고, 목소리는 분노로 갈라졌다. 발단은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몇몇 고위 관료와 정치인 자녀들이 소셜미디어에 올린 사진이었다. 명품 가방, 외제차, 해외여행, 고급 주택에서의 파티. 네팔의 청년들이 하루 종일 땀 흘려 벌어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삶이, 그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주어진 듯한 사진들이었다. 그 순간 청년들은 자신들이 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정부가 수십 년간 국민에게 요구해 온 ‘인내’와 ‘희생’은 권력층의 특권과 부패로만 귀결되고 있었다.
네팔의 1인당 GDP는 2022년 기준 1,458달러. 국민 대부분이 월 200달러 수준의 수입으로 산다. 해외로 나가 노동을 하고, 벌어들인 외화를 송금해 가족을 먹여 살리는 구조가 국가 경제의 한 축을 이룬다. 그런 나라에서 정치인의 아들이 럭셔리 클럽에서 찍은 사진은 그저 ‘젊은이의 일탈’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체제의 부패와 불평등, 그리고 약속의 파기를 상징했다. 거리의 청년들은 말했다. “우리가 세금을 내고, 우리가 노동을 하고, 우리가 이 나라를 지탱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너희만 다 누리느냐.” 그들의 분노는 단순히 생활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정당성 자체를 묻는 것이었다.
프랑스로 시선을 옮겨보자.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30대 직장인 니콜라 헨리가 언론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는 고소득 전문직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만족이 아니라 피로와 불만이 깔려 있었다. “나는 매달 고액의 세금을 낸다. 소득의 절반 가까이가 세금과 사회보장 부담으로 빠져나간다. 그런데도 나는 부자가 될 수 없다.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비용은 감당하기 어렵다. 국가는 부채를 늘리고 복지를 확대하지만, 그 비용은 고스란히 내 월급에서 빠져나간다.” 그는 자신을 HENRY라고 불렀다. High Earners, Not Rich Yet. 고소득자이지만 결코 부자가 아닌 세대. 이 말은 곧 서구 선진국 중산층의 자화상이었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복지국가의 모델로 불렸다. 그러나 그 복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재원은 대부분 근로소득세, 사회보험료, 연금 분담금 형태로 걷힌다. 프랑스의 근로소득세 부담률은 OECD 최고 수준이다. 영국도 다르지 않다. 2024년 영국 중산층이 낸 세금은 9,000억 파운드를 넘었다. 미국에서는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같은 전문직들이 “나는 부자가 아닌데 왜 부자 취급을 받으며 세금을 내야 하느냐”고 항변한다. 이들은 국가가 지출을 늘리고 부채를 상환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주머니가 ‘자동인출기’처럼 쓰이고 있다고 느낀다. 복지의 수혜는 피부로 느껴지지 않고, 자산 축적은 불가능하며, 남는 것은 무거운 조세 부담뿐이다.
한국의 상황은 또 다르지만, 결국 뿌리는 같다. 2023년 기준으로 연봉 1억 원 이상을 받는 근로자는 139만 명에 달했다. 전체의 6.7%에 해당하는 숫자다. 언뜻 보면 고소득자가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 젊은 세대는 집을 살 수 없다고 느낀다. KB국민은행 통계에 따르면 상위 10% 가구의 평균 주택 가치는 12억 5,500만 원에 달하지만 하위 10%는 3,100만 원에 불과했다. 서울의 평균 아파트 가격은 14억 원을 넘었다. 청년이 아무리 연봉을 올려도 진입장벽은 너무 높았다. 국민연금 보험료는 점점 올라가고, 건강보험료도 매년 인상된다. 세금을 제외한 가처분소득은 줄어들고, 상대적 박탈감은 커졌다. 젊은 세대는 스스로를 ‘노력해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게임’에 갇혔다고 생각한다.
이 세 나라, 서로 다른 상황에서 나타나는 공통의 분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뿌리에는 지난 10여 년간 이어진 세계적 유동성 확대가 있다. 금융위기와 팬데믹을 거치며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막대한 돈을 풀었다. 미국 연준의 양적완화, 유럽중앙은행의 초저금리 정책, 한국은행의 저리 대출 지원, 이 모든 것은 시중 화폐량을 폭발적으로 늘렸다. 그러나 풀린 돈은 실물경제가 아니라 자산시장으로 먼저 흘러들었다. 주택, 주식, 토지 가격이 먼저 치솟았다. 임금은 느리게 오르고, 세금과 보험료는 경직적으로 인상됐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자산 인플레이션, 임금 정체, 조세 부담 증가라는 삼중고였다.
경제학자 리처드 칸티용이 설명한 효과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새로운 돈은 언제나 특정 경로를 따라 흘러들어간다. 은행, 자산시장, 정부 조달 부문에 먼저 도착한다. 이 과정에서 먼저 돈을 접한 계층은 상대적 이익을 얻는다. 반면 임금으로 나중에 돈을 받는 계층은 이미 오른 물가와 자산 가격을 감당해야 한다. 네팔에서 청년들이 본 명품 인증샷, 프랑스에서 니콜라 헨리가 느낀 조세 부담, 한국 청년이 체감한 주거 절벽은 모두 같은 메커니즘의 산물이었다.
제2부 – 국가와 신뢰, 사상가들의 경고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흔히 군사력이나 경제력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 바로 ‘신뢰’다. 사람들이 세금을 내고 법을 지키는 이유는 단순히 강제 때문이 아니다. 세금이 공정하게 쓰이고, 법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믿음이 깨지는 순간 국가는 아무리 튼튼한 성벽을 쌓고 최신 무기를 갖추고 있어도 순식간에 무너진다. 고대 사상가에서 현대 학자에 이르기까지, 이 점을 반복해서 강조해 왔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국가 권력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서로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사회계약’을 맺고 권력에 복종한다고 했다. 그러나 홉스가 말한 전제 조건은 ‘보호’였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순간, 복종의 정당성은 사라진다. 네팔 청년들의 분노는 바로 그 지점에서 터졌다. 그들은 자신이 낸 세금과 노동이 권력층의 사치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국가는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홉스가 경고한 사회계약 파기의 순간이 눈앞에서 재현된 것이다.
로크와 루소는 홉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로크는 과세의 정당성은 ‘대표성’에 있다고 강조했다. 의회가 동의하지 않은 세금은 정당하지 않으며, 국민은 저항할 권리가 있다. 루소는 국민 주권과 일반의지 개념을 통해, 권력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 행사되지 않는다면 그 권력은 불법적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프랑스와 영국, 미국의 HENRY 세대가 느끼는 불만은 바로 이 전통과 맞닿아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낸 세금이 부채 상환과 복지 확대에 쓰이지만, 정작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혜택은 미미하다고 느낀다. 과세는 있지만 대표성은 희미하다. 루소의 언어로 말하자면, 세금은 일반의지에서 멀어지고 특정 정치적 계산의 도구로 변질되었다.
슘페터는 『조세국가의 위기』에서 현대 국가는 세금을 징수하는 능력으로 존속한다고 말했다. 군사력이나 영토가 아니라, 세금을 걷어내는 능력이야말로 국가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능력은 단순히 세무서 직원의 수가 많다는 의미가 아니다. 국민이 세금을 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문화, 즉 세금에 대한 정당성 인식이 기반이다. 이 정당성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탈세, 조세 회피, 해외로의 자산 이전 등으로 대응한다. 네팔의 부패, 프랑스 중산층의 세금 반발, 한국 청년의 조세 불만은 모두 슘페터가 말한 ‘조세국가의 위기’ 신호다.
맨커 올슨은 『권력과 번영』에서 국가를 ‘약탈자’로 설명했다. 유목민 약탈자가 한 지역을 점령하면 처음에는 약탈하지만, 곧 정주 약탈자로 변한다. 정주 약탈자는 장기적으로 주민을 착취할 수 있기 위해 일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세금을 걷는다. 하지만 그 세금이 일정 수준을 넘어 주민들의 생산 의욕을 꺾거나, 권력이 단기 이익에 집착해 수탈로만 나아가면 국가는 쇠퇴한다. 한국에서 젊은 세대가 국민연금, 건강보험, 각종 준조세를 ‘강제 착취’로 느끼기 시작한 것은 올슨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장기적 신뢰가 무너지고 단기 수탈로 기울 때 국가는 스스로 기반을 무너뜨린다.
역사가 니얼 퍼거슨은 『문명의 충돌』에서 국가의 붕괴는 서서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순간에 일어난다고 말했다. 마치 지진이 누적된 압력을 한순간에 폭발시키듯, 불만과 불신은 보이지 않게 쌓이다가 임계점을 넘어설 때 폭발한다. 네팔의 거리 시위는 그렇게 찾아온 임계점이었다. 전날까지도 평범한 일상을 살던 청년들이 SNS 사진 몇 장을 계기로 갑자기 거리로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쌓여온 불평등과 불신이 작은 불씨로 폭발한 것이다.
중세의 역사가 이븐 할둔은 아사비야, 즉 집단의 결속 개념을 통해 국가의 흥망을 설명했다. 집단 내부의 결속이 강할 때 국가는 번성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권력층이 사치와 특권에 젖어 결속을 갉아먹으면 국가는 몰락한다. 그는 특히 과도한 조세와 특권을 국가 몰락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네팔의 권력층 자녀들이 보여준 사치는 바로 아사비야의 붕괴를 상징했다. 국민이 함께한다는 감각이 무너질 때 국가는 종이처럼 약해진다.
이 사상가들의 경고는 단지 이론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입증되었다. 바이마르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과도한 화폐 발행으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사람들은 빵 한 덩어리를 사기 위해 수레 가득 지폐를 가져가야 했다. 국가의 신뢰는 무너졌고, 그 공백을 나치가 채웠다. 베네수엘라는 석유 수익에 의존하며 복지를 남발했지만, 국제유가 하락과 부패, 무분별한 화폐 발행으로 경제가 붕괴했다. 사람들은 화폐 대신 달러나 암호화폐로 거래했고, 국가 기능은 마비됐다. 2022년 스리랑카는 외채 위기와 물가 폭등으로 대통령이 해외로 도피했다. 연료와 식량이 바닥나자 국민은 궁정으로 몰려들어 정부를 무너뜨렸다. 이들 사례는 모두 하나의 패턴을 보여준다. 화폐 팽창 → 인플레이션 → 불공정 체감 → 신뢰 붕괴 → 정치적 붕괴. 지금 네팔, 프랑스, 한국의 사례는 이 패턴의 초입에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3부 – 화폐와 부채, 인플레이션의 그림자
돈은 어디에서 오는가. 은행 계좌에 찍힌 숫자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이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국가와 경제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지난 10여 년간 세계가 경험한 사건들―2008년 금융위기, 2020년 팬데믹, 이어진 경기침체와 공급망 붕괴―는 모두 이 질문의 답과 연결된다. 정부와 중앙은행은 위기를 막기 위해 막대한 돈을 풀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양적완화(QE)를 통해 자산을 매입하며 달러를 시중에 공급했고, 유럽중앙은행은 마이너스 금리까지 도입했다. 한국은행 역시 기준금리를 낮추고 저리 대출을 확대했다. 결과는 단순했다. 시중 화폐량, 즉 M2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화폐량이 늘어나면 무엇이 일어나는가. 교과서적 설명은 이렇다. 화폐량 증가 → 총수요 증가 → 물가 상승. 하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풀린 돈은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는다. 은행, 금융기관, 자산시장에 먼저 닿는다. 그곳에 접근할 수 있는 계층은 제한적이다. 주식과 부동산을 이미 보유한 계층은 더 큰 이익을 본다. 반대로 월급을 통해 늦게 돈을 받는 계층은 이미 오른 집값과 물가를 감당해야 한다. 바로 칸티용 효과다. 네팔에서 권력층 자녀가 명품을 휘두르는 동안 청년은 하루 5달러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프랑스에서 고소득 근로자는 세금으로 소득의 절반을 내야 했지만, 자산 축적은 요원했다. 한국 청년은 연봉이 늘어도 아파트 가격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돈의 경로가 불평등을 심화시켰던 것이다.
부채는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팬데믹 기간 각국 정부는 대규모 재정지출을 단행했다. 국민에게 현금을 지급하고, 기업을 살리기 위해 보조금을 풀었다. 그 비용은 국채 발행으로 충당됐다. 국채는 결국 미래 세대의 부담이다. 이자 비용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잠식한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세 가지다. 첫째, 지출을 줄인다. 그러나 복지 지출을 줄이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둘째, 세금을 올린다. 그러나 조세 저항이 커진다. 셋째, 인플레이션을 통해 실질부채를 줄인다. 역사적으로 많은 정부가 세 번째 선택을 택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금이다. 화폐 가치가 떨어지면서 저축과 임금 생활자가 피해를 본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HENRY 세대가 느낀 분노는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됐다. 국가는 빚을 갚겠다고 하지만, 그 비용은 중산층의 세금에서 빠져나간다. 복지 혜택은 충분히 체감되지 않고, 자산 가격은 이미 치솟았다. “나는 부자가 아니다. 그런데 왜 부자 취급을 받으며 세금을 내야 하느냐.” 그들의 외침은 경제 메커니즘이 불공정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한국 청년이 국민연금과 건강보험료 인상에 분노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 제도는 원래 미래를 위한 안전망이지만, 지금 세대는 자신이 낸 만큼 돌려받지 못할 거라고 믿는다. 인구구조 변화로 인해 그 믿음은 합리적이다. 따라서 보험료 인상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불공정의 상징이 된다.
네팔의 상황은 다르게 보이지만, 본질은 같다. 원조금과 국가 재정이 투명하게 쓰이지 않고 권력층으로 흘러들어간다. 화폐와 부채가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분노를 낳는다. 거리에 나온 청년들은 “우리가 일하고 우리가 세금을 내는데, 왜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느냐”고 외쳤다. 이 외침은 프랑스 니콜라 헨리의 불만, 한국 청년의 좌절과 다르지 않다.
이제 국가의 해체 가능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는 어떻게 무너지는가. 군사적 침략이나 자연재해 때문일 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내부의 신뢰 붕괴다. 세금이 공정하지 않고, 부채가 불공정하게 전가되며, 화폐가 가치를 잃으면 사람들은 국가와 사회계약을 포기한다. 세금을 내지 않거나, 자산을 해외로 옮기거나, 심지어는 다른 나라로 이주한다. 남은 사람들은 더 큰 부담을 떠안게 된다.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과정은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고대 로마 제국은 과도한 세금과 군사비로 시민의 불만을 샀다. 화폐 가치를 떨어뜨려 군인 월급을 충당하려 했지만, 그 결과 인플레이션과 불신이 확산되었다. 명나라도 말기에 은 유출과 세금 불공정으로 농민 반란이 이어졌다. 1990년대 일본의 버블 붕괴 역시 부동산과 금융 자산의 과열, 뒤이은 신용 경색이 원인이었다. 국가가 직접 해체되지는 않았지만, 사회 전체가 장기간 침체에 빠졌다.
오늘날 네팔, 프랑스, 한국은 각기 다른 국면에 있지만, 같은 길 위에 있다. 네팔은 국가 신뢰가 이미 거리에서 무너지는 단계다. 프랑스와 영국, 미국은 세금 부담과 부채 전가에 대한 불만이 제도권 정치로 표출되는 단계다. 한국은 자산 인플레이션과 세대 불평등이 사회 전반의 좌절로 이어지는 단계다. 이 과정이 누적되면, 퍼거슨이 말한 것처럼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붕괴가 찾아올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는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선택지는 분명하다. 투명성을 강화하고, 자산시장 진입 장벽을 낮추며, 세대 간 부담을 공정하게 배분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가 단기 수탈에 몰두한다면, 국가는 스스로 기반을 허무는 길을 걸을 것이다.
제4부 – 미래의 시나리오와 국가의 갈림길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길을 선택하는지는 단순히 경제 지표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적 의지와 사회적 결속,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민이 느끼는 정당성에 달려 있다. 지금 세계가 직면한 상황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네팔의 거리 시위, 프랑스 중산층의 세금 반란, 한국 청년의 주거 절벽은 모두 다른 맥락이지만, 그 뿌리는 하나다. 신뢰의 위기.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길이 펼쳐질 수 있을까.
첫 번째 시나리오는 ‘점진적 개혁’이다. 정부가 위기를 인식하고, 투명성과 공정성을 강화하는 길이다. 세금이 어디로 쓰이는지 명확히 공개하고, 부패를 철저히 단속하며, 자산 시장의 불평등을 완화한다. 예를 들어 한국 정부가 청년 주거 지원을 확대하고,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며, 세대 간 연금 불평등을 완화한다면 청년 세대는 다시 제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세제 개편이 이루어지고, HENRY 세대가 체감할 수 있는 복지 혜택이 강화된다면 그들의 불만도 줄어들 것이다. 네팔에서 국제 원조금이 투명하게 쓰이고, 권력층의 특권이 억제된다면 청년 시위는 제도적 변화로 수렴할 수 있다. 점진적 개혁은 어렵지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 길은 정치적 용기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권력층이 스스로 특권을 내려놓고, 단기적 이익 대신 장기적 신뢰를 선택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이 길을 택한 국가는 많지 않았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포퓰리즘과 분열’이다. 정부가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를 이용해 단기적 지지를 얻으려는 경우다. 정치인은 특정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고, 대중의 분노를 외부로 돌린다. 네팔에서는 외국 자본이나 특정 소수집단이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이민자나 유럽연합이 표적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세대 간 갈등이나 특정 계층이 희생양이 될 수 있다. 포퓰리즘은 단기적으로 대중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지만,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오히려 분열을 심화시키고, 신뢰를 더 빠르게 갉아먹는다. 역사적으로 나치 독일이나 차베스 이후의 베네수엘라가 이 길을 걸었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급격한 붕괴’다. 불신과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 제도 자체가 무너지는 경우다. 스리랑카에서 대통령이 해외로 도피한 사건은 그 전형이다. 국가가 더 이상 기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면 국민은 거리로 몰려들고, 권력은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네팔의 시위가 제도적 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그 나라는 스리랑카와 같은 길을 걸을 수도 있다. 프랑스와 영국, 한국은 더 튼튼한 제도를 갖추고 있지만, 결코 안전지대는 아니다. 불신이 누적되면 민주주의 제도도 빠르게 무너질 수 있다.
이 세 가지 시나리오 중 어떤 길을 택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의 경로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화폐량 증가는 계속될 수 없고, 부채는 언젠가 갚아야 한다. 인플레이션은 단순한 경제 지표가 아니라 사회적 신뢰를 갉아먹는 독이다. 그렇다면 어떤 정책적 대안이 있을까.
첫째, 투명성의 강화. 국민은 자신이 낸 세금이 어디로 쓰이는지 알고 싶어 한다. 프랑스 중산층은 세금으로 국가 부채를 갚는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공정한지 알지 못한다. 한국 청년은 국민연금을 내지만, 그 돈이 어떤 구조로 운용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네팔 국민은 국제 원조금이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지 못한다. 세금과 재정, 복지 지출의 실시간 공개와 철저한 감사는 신뢰 회복의 첫걸음이다.
둘째, 자산 시장의 정상화. 단순한 규제는 효과가 없다. 공급 확대, 정보 투명화, 거래 공정성이 필요하다. 한국의 경우 청년 세대가 진입할 수 있는 주거 사다리를 마련해야 한다. 프랑스와 영국은 중산층이 자산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네팔은 해외 원조금과 투자금이 공정하게 분배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세대 간 공정성. 연금과 복지 제도는 세대 간 계약이다. 지금 세대가 내는 부담이 미래 세대에게도 동일한 혜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제도는 붕괴한다. 국민연금 개혁, 건강보험 개혁, 조세 구조 개편은 모두 세대 간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
넷째, 정치적 신뢰 구축. 부패와 특권은 신뢰를 가장 빠르게 무너뜨린다. 정치인과 권력층이 스스로 투명하게 자산을 공개하고, 이해충돌을 방지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네팔의 청년이 분노한 것은 단순한 생활고가 아니라 권력층의 특권이었다. 프랑스와 한국의 청년도 마찬가지다.
다섯째, 재정의 책임성. 국가는 빚을 내어 단기적 위기를 넘길 수 있다. 그러나 그 빚은 언젠가 국민이 갚아야 한다. 부채를 단순히 세금으로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 성장을 위한 투자와 연결해야 한다. 부채가 미래 세대의 사다리를 무너뜨리는 순간, 국가는 신뢰를 잃는다.
이 정책적 대안은 모두 어렵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는 않다. 문제는 정치가 단기적 유혹을 버릴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당장의 혜택만 뿌리려 한다면, 국가는 스스로를 갉아먹을 것이다. 반대로 장기적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개혁을 선택한다면, 국가는 위기를 넘어설 수 있다. 역사는 그 차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제5부 – 신뢰라는 이름의 화폐
국가는 종종 화폐와 세금, 법률과 제도로 설명된다. 그러나 그 본질을 꿰뚫어보면, 국가는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자산 위에 세워져 있다. 화폐도 사실 신뢰다. 한 장의 지폐는 종이일 뿐이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교환수단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세금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이 기꺼이 세금을 내는 이유는 그 돈이 공정하게 쓰이고, 공동체의 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신뢰 때문이다. 법 역시 신뢰다. 법이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될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사람들은 법을 지키지 않는다. 결국 국가는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화폐를 발행하는 존재다.
네팔 청년이 거리에서 외친 분노, 프랑스 니콜라 헨리의 절규, 한국 청년의 좌절은 모두 이 신뢰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돈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세금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문제는 돈과 세금, 제도가 더 이상 공정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체감이다. 네팔에서는 권력층이 원조금을 사적으로 전용하고, 프랑스에서는 중산층이 자신이 낸 세금이 공정하게 쓰이지 않는다고 느끼며, 한국에서는 청년이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집을 살 수 없다고 절망한다. 이 체감이야말로 진짜 위기다.
사상가들이 경고했듯, 국가는 물리적 힘이 아니라 신뢰로 유지된다. 홉스가 말한 보호의 약속, 로크가 강조한 대표성, 루소가 주장한 일반의지, 슘페터가 지적한 조세 정당성, 올슨이 경고한 정주 약탈자의 위험, 퍼거슨이 설명한 급격한 붕괴, 이븐 할둔이 분석한 아사비야의 붕괴. 이 모든 것은 결국 신뢰라는 단어로 수렴된다. 국가가 신뢰를 잃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국가가 아니다.
역사는 반복해서 그 사실을 보여주었다. 바이마르 독일은 신뢰를 잃고 극단주의가 들어섰다. 베네수엘라는 화폐와 제도의 신뢰를 잃고 사회가 무너졌다. 스리랑카는 부채와 인플레이션 속에서 정부 자체가 붕괴했다. 로마 제국은 세금 불공정과 화폐 가치 하락으로 시민의 결속을 잃었다. 명나라는 부패와 은 유출로 민중의 신뢰를 잃고 농민 반란으로 무너졌다.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 장기간 신뢰의 회복에 실패하며 잃어버린 30년을 겪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길 위에 서 있는가. 네팔의 청년 시위는 신뢰 붕괴의 직접적 장면이다. 프랑스와 영국, 미국의 중산층 불만은 조세국가의 위기다. 한국 청년의 주거 절망은 세대 간 불평등의 상징이다. 이들은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내가 낸 대가와 얻는 보상이 정당한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국가는 신뢰를 잃고 무너질 것이다.
미래는 세 가지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 첫째, 점진적 개혁을 통해 신뢰를 회복하는 길. 둘째, 포퓰리즘과 분열로 더 깊은 위기에 빠지는 길. 셋째, 급격한 붕괴로 제도가 무너지는 길. 우리는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선택은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뢰를 회복하지 않으면 어떤 길도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이다. 신뢰는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국가 존속의 조건이다.
정치인과 권력자는 단기적 이익에 눈이 멀기 쉽다. 선거 주기와 권력 유지는 신뢰보다는 단기적 혜택을 추구하게 만든다. 그러나 역사는 단기적 이익을 위해 신뢰를 희생한 국가가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보여준다. 신뢰는 한 번 무너지면 되돌리기 어렵다.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세금도, 법도, 화폐도 힘을 잃는다.
결국 신뢰는 경제 지표로 측정되지 않는다. 국민이 세금을 내며 “이 돈이 제대로 쓰일 것이다”라고 믿는 마음, 청년이 “노력하면 집을 살 수 있다”고 믿는 희망, 시민이 “법은 모두에게 공평하다”고 믿는 확신, 이것이 바로 신뢰다. 이 신뢰가 회복되지 않으면 국가는 무너진다. 네팔 청년의 분노, 프랑스 중산층의 절규, 한국 청년의 좌절은 우리 모두에게 경고한다. 지금이 바로 신뢰를 회복할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국가는 서류 한 장으로 해체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뢰가 조금씩 뜯겨 나가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질 수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세 장의 사진은 바로 그 전조다. 그리고 그 전조를 무시한다면, 역사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가혹한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