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 정맥주사관인 피스(piss)를 교체하러 서초동에 있는 00 센타로 이동 하는 엠블런스를 탄지 5분이 못되어 엄마가 한마디를 하신다. 아무 말도 없이 눈을 감고 계시던 어머니가 아기처럼 원초적으로 말씀하신다.
평상시 체면을 중시하고 늘 옷차림을 단정하게 하시던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난 당황스러웠다. 구급차 요원은 "제가 좀 빨리 가겠습니다"라고 하더니 사이렌을 울리며 차로 꽉 막힌 도로를 차 사이를 비집으며 운전을 하였다. 도착하고 나니 멀미가 나 어지럽고 토가 나올 정도였다. 그곳 직원은 직접 똥을 치워야 한다고 말했지만, 실상 그곳엔 기저귀가 없다고 말한다. 강아지의 똥을 매일 치우고 있고 아들 어린 시절에는 변비로 인해 서서 변을 보는 상황에서 내 손바닥으로 똥을 받아 본 경험도 있었기에 엄마의 똥을 치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했지만, 다행인지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가능한 한 빨리 시술을 하고 병원에 가는 게 좋겠다고 하기에 똥이 기저귀에 있는 상태로 10분 여만에 시술을 마쳤다. 그리곤 요양병원에 도착하여 간병인에게 알려드렸다. 모셔다 드리고 오는데 갑자기 간병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넘어 존경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엄마가 마지막 요양병원에 입원한 첫날, 간병인은 자신의 업무에 대해 명확히 말했다. 몸을 씻어주고, 콧줄을 통해 음식과 약을 넣어주고 똥을 치워주는 일을 한다고 말이다. 그 외는 간호사에게 물어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병원비는 68만 원 엠블런스 비용은 왕복 18만 원이 청구되었다. 기본이 7만 원인데 이동 거리에 따라 요금은 올라간다. 병원에 도착해서 짬이 생겨 내 혈압을 재보니 150이 넘었다. 평상시 혈압이 120-130 정도 되는 내 혈압이 급격히 높아진 걸 보니 내 마음과 몸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음을 혈압계가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창 밖을 바라보면서 "나무가 보여~"라는 말을 하신다.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동안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모습과 바깥공기를 마신다는 자체만으로 감사한듯한 표정이다. 똥에 뒤범벅이 된 기저귀를 차고 있음에도 말이다.
똥 냄새... 사실, 난 내 똥 냄새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동네 이웃이었던 마리아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오랜 시간 간병하였고, 효부상까지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똥 냄새를 맡기 싫어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냈다고 말했다. 나이 70이 다 되도록 90세가 넘은 시부모님을 돌보는 상황이니 상상하기만 해도 힘든 일이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야!" 우리는 이러한 말을 농담으로 하곤 한다. 영어바이블 모임에 참석하는 유니는 시아버지를 모시던 중 치매로 인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난 후, 손으로 똥을 만진 줄 모르고 여기저기 벽을 짚고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결국엔 요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사실, 똥은 우리의 건강의 기준이자 지표이기도 하다. 똥의 모양과 색깔을 보면서 내가 먹은 음식이 몸에 주는 영향을 확인한다. 심지어 난 강아지 똥까지 확인하기도 한다. 똥에서 혈변이 보이는 경우 대장암 진단으로도 사용하기도 한다. 엄마가 급성 폐렴 증세로 상급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의료파업으로 인해 2차 병원으로 옮겨진 상황에서 며칠간 열이 떨어지지 않아 고생을 하던 때다. 그런 상황에서 변에서 피가 나왔다는 이유로 대장암 검사까지 하였다. 결론은 음성이었지만, 실제 양성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항암 치료는 시도도 못한 상태에서 왜 검사를 한다는 것인지... 당연히 의료인의 '메뉴 얼 데로' 하는 것이라고 말은 하겠지만, 병원에서 하는 영업(비즈니스, business)은 상도(상업상의 도리)가 아닌 인도(인간의 도리)가 지나치게 선을 넘고 있다.
엄마는 평상시 특별한 운동을 하진 않았지만, 아침미다 스트레칭을 하거나 요가 동작을 하곤 했다. 탈장 증세로 인해 늘 배가 불룩하여 복대를 하고 생활을 하셨지만 자녀에게 채운 기저귀를 본인이 그대로 찰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2월 말에 급성 폐렴증세로 응급실에 옮겨진 이후로는 소변 줄도 차고 계신다. 소변줄은 방광에 모인 소변을 누울 힘도 없는 상태에서 찬다고 한다. 엄마는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매일 밤마다 화장실을 가는 번거로움에서 조금은 편해지셨을 거라 위안을 삼았지만, 기저귀로 인한 것인지 소변줄로 인한 것인지는 요로 감염까지 생겨 임종의 순간까지 항균제용 링거를 맞았다.
엄마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난 똥 꿈을 꾸었다. 아주 넓은 도로 한가운데에 똥을 쌌고 지나가는 차로 인해 똥이 튀기는 꿈이었다. 똥을 종이라도 덮어 놓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은 채 잠에서 깨어났다. 왠지 엄마의 죽음과 관련된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필이면 똥일까! 아빠의 임종 날의 꿈은 시청 광장에서 대통령 장례를 치르는 꿈이었다. 아주 큰 리무진에 타고 가는 아빠는 나에게는 한 나라의 대통령과 같은 존재였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엄마의 꿈에서는 똥이라니... 다음 날 올케에게서 전화가 왔다. 간병인의 말에 의하면 엄마가 투입되는 뉴케어의 양(평균 900cc)에 비해 아주 많은 양의 똥을 배설했다. 시어머니도 임종 며칠 전에 드신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똥이 나왔는지, 내가 퇴근하고 오니 화장실에서 팬티를 빨고 있었다. 그땐 그저 어린 며느리가 자신의 속옷을 빠는 것이 민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똥은 임종 전에 나타나는 전조증상 중에 하나인 것이다.
그 외 대표적인 임종 전조증상으로는 호흡곤란과 산소 포화도 저하(폐 기능 저하), 저혈압(심장 기능 저하)과 소변 양이 줄어드는 증세(신장 기능 저하)가 있다. 엄마는 이러한 증상이 다 나타났기에 임종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부분 서서히 상태가 악화되는 것이 보이며 숨을 거두기도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징조가 전혀 없이 갑자기 숨을 거두는 경우도 있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대부분의 노인들의 want to die(원어다이)는 잠을 자면서 심정지로 인해 급사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죽음은 아닐 것이다.
좀 전에 남편이 전화를 해 나의 속 쓰림 증상에 대해 안부를 물었다. 통화 중에, 엄마의 마지막 요양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병원에서 전화가 올 때마다 마음을 졸였던 탓인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놀라거나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왜냐하면 엄마는 죽었으니까... 문득 죽음이 좋은 것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맥주사관 교체를 위해 외래 진료를 받았던 병원비 환급(49만 원)을 위해 계좌를 알려 달라는 말이었다. 올케에게서 문자가 왔다. 엄마의 사망신고를 마쳤다고 말하면서 앞으로 어머니 관련 서류는 친자만 가능하고 앞으로 서류요청은 위임장이 있어야 한다면서. 며느리나 사위는 가족도 아니라고 말하며 웃었다 한다. 어찌 보면 자식들보다도 엄마의 회복을 위해 애쓴 며느리로서의 섭섭한 마음을 비춘 것이다. 나도 엄마가 평생 사용하던 전화를 해지하였고 휴대폰도 2만 원에 팔아 엄마의 미납된 전화 요금을 내었다. 앞으로는 더 이상 엄마의 건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간병인과의 간식을 싸들고 다니는 일도 없다. 의사나 간호사의 눈치를 보느라 엄마의 안부를 함부로 묻지도 못하고, 원하는 바를 요구하지도 못하면서 마음을 졸이는 일도 없다. 혼자서 병원비와 생활비를 감당한 큰오빠의 어깨도 한결 가벼워졌을 것이니, 엄마의 죽음은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을 느끼지 못할 엄마에게도 죽음은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그 누구의 죽음을 호상(good death)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죽음은 눈으로 보이는 관계의 단절이자 인생의 끝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간이 상상하거나 경험하는 가장 끔찍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 즉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한 사람들의 글을 보면 감정적으로는 힘겨운 시간이지만, 우리 몸속에 죽음에 대한 방어체계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2014년 완화의학회지 (journal of palliative medicine)엔 말기 질환자의 50-60%가 죽음을 앞두고 강렬하지만 매우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꿈을 꾼다고 한다. 죽는 순간 뇌에서 화학물질이 왈칵 분비된다는 증거도 제시했다. 따라서 죽음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빌 브라이슨의 <바디 우리 몸 안내서>에 의하면 매일 전 세계에서 16만 명이 사망한다 1년으로 하면 약 6000만 명이고, 사망률은 100명 당 약 0.7명으로 한 해에 죽는 사람이 100명 중 1명도 채 되지 않는다. 다른 동물에 비해 생존 능력이 뛰어난 것이다. 인간이 죽음으로 향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나이를 먹는 것(aging)이다. 서양에서 암 사망자의 75%, 폐렴 사망자의 90%, 독감 사망자의 90%, 각종 원인에 의한 사망자의 80%는 65세 이상이다. 그렇기에 사망 진단서에 적는 사망 원인이 '고령'인 경우는 드물다. 이유를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고령' 자체로 인해 죽기보다는 여러 가지 질병으로 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의 사망 진단서를 보니, 역시나 사망원인이 고령이 아닌 '질병'이라 적혀있다. 하지만, 실제 몸의 모든 증상, 즉 심장 비대증과 폐부종 그리고 신부전은 고령으로 인해 장기가 서서히 그 기능을 잃어간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의 주치의는 질병환자로 분류하고 치료할 수도 없는 장기의 X-ray 사진을 매주마다 찍었고, 혈액도 일주일마다 채취하는 등의 불필요한 과잉 진료와 처방을 내렸다. 그로 인해 환자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더하는 행위를 한 것이다.
호스피스(hospis)란 환자들이 편안하고도 인간답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베푸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기본적으로 매일, 24시간 환자를 돌보면서 상태를 확인하고 불편함이 없도록, 더 나아가 편안함을 느끼고 행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호스피스 병원을 이용 가능한 기간은 법적으로 최대 60일로 정해져 있는데 대부분의 환자들은 임종이 매우 가까워진 상태에서 입소하기 때문에 보통 한 달을 못 버티고 임종을 맞이한다. 호스피스 돌봄(Hospice Care)은 나무위키에 의하면, '죽음이 가까운 환자를 입원시켜 위안과 안락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특수 요양병원. 말기 시한부 환자에게 억지로 생명을 연장하는 연명치료를 하지 않고 육체적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한 치료를 하며, 심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도움을 주어 인간적인 마지막 삶과 웰다잉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 주로 말기 암환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데, 2017년 8월 4일부터 만성 폐질환·간경화·에이즈 환자도 호스피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호스피스 돌봄의 정의에 비추어볼 때 엄마는 웰다잉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엄마의 마지막 요양병원은 새로 지은 좋은 건물이고, S대의 이름의 우수 등급병원임을 홍보하는 병원이다. 입원 시 연명치료를 하지 않음을 문서로 작성하였다. 하지만, 엄마는 콧줄과 산소 투입기 그리고 손장갑과 24시간 혈압 모니터링으로 인해 손가락까지 통증을 호소했다. 간병인에게 손을 잡아달라며 기도를 부탁을 할 정도로 엄마는 심리적으로 종교적으로 도움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눈물 흘리는 나에게 주치의는 엄마가 그리 힘들지는 않다고 말하곤 했다. 코로나 팬더믹으로 인해 대면 면회를 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뒤늦게 주어진 20여 분의 면회시간도 매번 1000원을 지급한 비닐 옷과 장갑을 낀 채 간병인이나 간호사와 대화를 나누고, 감사를 표현하고, 몸의 아픈 곳을 마사지를 하고, 잘 들리지도 말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보면, 땀범벅이 가 된다. 그렇다고 큰 소리로 말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천국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갖도록 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콧줄로 인해 손장갑을 낀 채 침대난간에 묶여있는 모습에서 환자의 인권과 존엄은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엄마의 병동은 호스피스 병동도 중환자실도 아닌, 그저 '시체 놀이터'였다.
엄마가 머물던 3층 호스피스 병동엔 엄마와 같이 콧줄과 기저귀와 소변줄을 낀 비슷한 모습의 노인환자들이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낮에도 수면 상태이거나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다. 의료인과 간병인들은 시체와 다름없는 모습의 환자들의 연명을 위해 아주 열심히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주요한 원인으로 요양병원이 한 명의 고령 환자당 정부(건강보험 공단)로부터 지원받는 의료비가 400만 원이라는 점이다. 환자 부담금은 100만 원이 채 되지 않지만, 그 외 80%의 비용은 국민이 세금처럼 내고 있는 건강보험료로 충당한다. 월 간병비인 120만 원 정도(4만 원 X30일)의 비용은 환자 부담이기에, 병원에서는 간병으로 인한 추가비용은 들지 않는다. 또한 여러 진통제와 수면제와 항생제 등은 따로 처치비로 청구를 하면 된다, 내가 방문한 몇 개의 호스피스 요양병원에는 200여 명의 환자들이 누워있었다. 그들의 목숨 값을 대략 계산하니 한 달에 8억 원(400만 원 X 200명)의 수입이 창출된다. 그들은 그곳에서 죽을 수도 없고, 콧줄을 낀 채 병원 밖으로도 나갈 수도 없다. 생명 연자의 고통 가운데서도 가족들과 의료인들 그리고 간병인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 우리(가족, 의료인, 간병인) 또한 환자가 치료되고 회복될 것을 기대하지만, 그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저 현대판 고려장처럼 병원에 볼모로 잡혀있는 그들을 위해 최대한의 돌봄을 하며 그저 눈물 흘리며 바라보아야만 한다.
자식이지만, 전문적인 기술도 없는 상황에서 부모님을 집에서 모시며 똥을 치우거나 콧줄로 음식을 넣고 가래를 빼내는 일 등의 간병을 하기 힘들다. 주위를 보면 내 나이 또래의 중년의 여성들이 자신의 부모를 집에서 돌보기 위해 요양 보호사 공부를 한다. 자신의 삶을 희생해 부모를 돌보고자 하는 모습에 감동이지만, 의료 시스템과 법적인 문제로 인해 가정사(home death)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거의 대부분 우리의 노년기에 가야할 곳은 요양병원이거나 요양원이 된다. 실버 타운이라는 이름하에 멋지게 광고하지만, 실상을 보면 결국엔 요양병원과 호스피스 병동의 신세를 져야만 한다. 그렇다면 곧 노년의 삶에 이르게 되는 나의 간병은 과연 누구의 손에 맡겨야 할지 똥칠하기 전에 미리미리 준비해야만 한다.
엄마의 장례식에 조문 온중년의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부모님의 간병과 질병 그리고 치매로 인해 정신적, 심리적, 경제적인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호스피스 요양병원에 입원한 순간 멈추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conveyor belt)에 올라탄 것이라는 말도 한다. 18세기 기술 혁신이자 1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물건이 바로 컨베이어 벨트이지 않은가? 이것이 AI시대 최첨단 의료사업을 주도한다는 대한민국 병원의 현주소다. 병원 상업주의와 의료 시스템의 문제가 심각함을 보여준다. 병원이 하나의 직장인 의료인들은 당연히 의료법을 지키며 '매뉴얼대로' 진료와 처치와 처방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의료인들은 병상에 누워 육체적인 통증과 심리적인 외로움 그리고 죽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환자의 심리적인 고통에 대해 그리 공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가장 큰 문제는 병원의 상업주의로 인해 환자와 보호자가 고통을 받으면서 동시에 나라의 엄청난 세금이 시체놀이에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의료법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병원 매뉴얼이 문제인지, 고령화가 문제인지 그 해결책을 빨리 찾아 해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온 국민이 고통받을 뿐만 아니라 저출산 시대를 맞은 우리나라의 곳간마저 텅 비어 망하는 때가 곧 도래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