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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국 Mar 08. 2024

하와이와 울릉도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읽고


지리부도를 펴 들고 하와이를 찾아본다. 천분의 일 세계지도엔 넓은 바다에 콕콕 찍힌 점에 불과하다. 태평양의 하와이는 동해의 울릉도와 너무 비슷하다. 지형적으로 넓은 바다 한가운데 자리한 섬이라는 것과 확 트여서 좋을 것도 같지만 한편으론 쓸쓸하고 고독해 보이는 것까지 너무 닮았다. 신혼여행지로 아름다운 곳인 줄로만 알았던 하와이가 보이는 것만으로 즐기기엔 가슴 시린 사연이 너무 많았다.


1900년대 초에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한 첫 이민자 102명을 시작으로 노예처럼 일했던 우리 선조들의 힘든 삶이 있었다. 사진신부로 꿈을 안고 바다를 건넜던 어린 신부들의 한 서린 눈물의 역사가 밑거름이 되었다. 그 시대 엄마들의 삶이란 포와로 간 사진신부들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 살아도 자유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 당시 동해의 외로운 섬 울릉도 엄마들의 삶은 어땠을까. 결혼문화는 어땠을까 살짝 들여다보면

1900년대 중반까지도 결혼 당사자 의사는 존중받지 못했다. 어른들끼리 누구네 아들과 누구네  딸의 혼삿말이 오고 갔고 어른들이 결정하면 그대로 따랐다. 자녀들의 삶도 부모님 선에서 정해졌으니 자녀들에겐 선택할 권한이 없었던 것이다. “남녀 칠 세 부동석”을 크게 외치던 시대였고 어른들 말씀이 곧 법이었다.


열일곱 살에 신랑 얼굴도 모르고 시집갔다는 어떤 어머니는 “신랑이 누군고했디 보탕(모탕)에서 나무를 쪼개고 있었던 쪼맨한 애가 신랑이더라" 두 살 많은 신랑도 색시가 보기에는 쪼맨한 애로 보였던 모양이다.


쪼맨한 애랑 우째 살았어요?

"시집가면 삼 년 동안 눈 감고, 삼 년 동안 귀 닫고, 삼 년 동안 입 닫고 살아라 해서 그렇게 살았지."


쪼맨한 애랑 첫날밤은 어떻게 지냈데요?

“낯선 사람끼리 처음 만나 뭐할끼고. 모르것다 부끄러워서 등 돌리고 그냥 잤지 뭐 생각도 안 난다.”


쪼맨한 애들끼리 애는 우째 낳았는가 모르겠네요?

“애를 우째 낳는지나 알았나 우예우예 하다 보이 애도 낳았지. 쪼맨한 애도 남자라고 시간이 지나니 지 할 짓은 다 하더라.”


"어떤 때는 새벽밥 하러 정지(부엌)로 나가다가 치맛자락 잡혀서 소여물 창고에서도 그랬다 아이가 어지간이 급했던 모양이라. 가뭄에 콩 나듯이 어쩌다 한 번씩 아다리 치면 아가 생깄뿌는기라 그라다보이 아~만 마이 낳았제"


1900 년대 중반까지도 부모가 짝지어 주는 대로 시집가면 죽을 때까지 그 집  귀신이 되는 걸로 알고 살았다. 1960 ~70년대부터는 섬에도 서서히 자유연애가 시작되었다. 한마을이나 옆 마을 멀어도 섬안에서 중매와 연애결혼을 겸하던 시대였다.


어쩌다 본토로 딸을 시집보내는 집은 경사난 듯 동네 사람들도 부러워했다. 그때만 해도 요즘처럼 세상 소식이 빠른 때가 아니었다. 망망대해 저 끝에 육지가 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본토로 시집간다니 문화 충격이면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결혼 당사자는 일약 스타가 된 듯 우쭐하기도 했다. 그 훗날은 어찌 되었던 육지신랑 만난 것만도 출세한 듯했으니 순수시대였다.


대부분 한동네 처녀총각이 연애대상이면서 결혼대상이었다. 전화가 없었을 때라 연애 통신 수단으로는 동생들을 잘 이용하면 되었다. 쪽지나 편지로 마음을 전하기도 하고 데이트 약속을 잡으면 되었다.

밤이면 바람소리에 실려오는 '휘리릭' 휘파람 소리를 잘 분별하여 행동하면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찬장에 밥그릇이  개인지 숟가락 젓가락이  개인지 알만큼 서로 허물없는 사이로 만났으니 연애결혼한 사람들은 힘들어도  살아야 했다.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었으니 고생이 되어도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사주 관상을 보거나 고심하며 길일을 택해 결혼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홍주처럼 청상과부가 되거나 홀아비로 나동그라지지 않고  살았다.


1963년부터 울릉도와 포항을 왕래하는 철선 380톤급 청룡호가 해상교통수단으로 운행하게 되면서 본토와의 접근성이 좋아졌다. 소요시간 10시간 기후변화에 따라 15시간도 소요되는 작은 연락선이었다. 포와로 가며 멀미로 고생하던 버들처럼 똥물까지 게워내며 초주검을 겪은 후 포항에 도착하는 그런 시대였다.


60년대 이후부터는 본토로 유학하는 학생들도 많아졌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배우자 선택도 본인의 뜻에 따라 자유 결혼문화로 바뀌었다. 그때는 본토 사람과의 결혼은 흔한 일이 되었기에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해상교통수단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날로 발전했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지금은 외로운 섬에서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을 만큼 분주한 섬이 되었다.


멀지 않아 비행기 운항을 하게 되면 일일생활권으로 서울문화를 바로 받아들이는 시대가 열릴 것이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에서 분주 복잡한 섬으로 바뀌면 옛 정취가 아쉬워지지 않을까. 관광지이면서 천해자연을 잘 보존할 수 있는 섬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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