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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튼 Mar 09. 2022

소년심판 : 당신의 신념은 안녕하신가요

소년과 어른은 무관하지 않나요

사거리 대로변에서 생각해본다, 과연 드라마 같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까? 그러곤 생각했다, 아니, 드라마는 0.1%의 확률에 대한 이야기다. 우연이라도 마주치고 싶었던 남자도 내 눈앞에는 나타나지 않고, 우연히 재벌과 엮이는 일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내가 마주한 사회와 내가 마주한 현실은 여태까지 내가 살아온 삶을 대변한다.


촉법소년의 범죄를 다룬 드라마 <소년심판>을 보면서,  이 이야기가 실제로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진 것은 내가 겪어본 적이 없었음이 첫 번째였을 것이고,  내 눈앞에서 벌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 두 번째였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전달하는 이야기는 분명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내가 본 뉴스 속 짧은 단어 "피해자" 들과 "가해자"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소년이 아닌 이젠 '어른'이라는 딱지가 붙은 나 조차도, 소년이었을 때가 있었으며 소년들이 저지르는 범죄와 어쩌면 가까이 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엄마에게 버림을 받고 송치된 차 안에서 유나가 바라보았던 "맛있게 어묵을 나눠먹는 가족"에 속하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잔혹한 범죄에 방치된 유년기가 아닌, 좋은 엄마 아빠를 만나 그래도 보호받은 유년기를 거친, 좋은 동네에 살았기에 변두리의 삶은 전혀 몰라왔던.


나는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 다루고 있는 "부모의 가출", "성범죄", "촉법소년", "알코올 중독 부모"의 일들이 피부 안으로 와닿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나를 설득시키는 지점은 굉장히 다양한 '관점'에 있지만, '부모'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는 연출이 회차마다 등장하는 것이다.


심은석(김혜수)의 "소년을 혐오한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드라마는 초지일관 범죄를 저지르는 소년을 '범죄자'로 묘사하는 시각을 가지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 소년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피해자"의 입장을 중시하는 심은석의 모습들은 이 드라마를 맞닥뜨린 시청자들에게 "소년도 죄를 저질렀으면 처벌이 마땅하지"라는 인식을 심어주다, 결론적으로 차태주(김무열)가 과거에 소년범이었다는 설정으로 그 균형을 맞춘다. "아이가 왜 그렇게 됐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갱생"과 "교화"는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 두 법관의 신념이 꾸준히 대립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 드라마가 마냥 심은석의 관점에서 "아이를 처벌해야 한다", 피해자의 사진을 꼭 붙여놓으며 재판에 임하는 모습을 통해 "피해자"의 삶에 대한 보장이 있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함에 동시에 심은석 역시 소년법에 의한 피해자였다는 당위성을 부여한 설정으로 이 두 법관을 첨예하게 대립시키지만 이 드라마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관점은 딱 하나였다고 본다.


신념을 넘은 "어른의 역할"


극의 초반에는 가족, 그리고 부모가 가진 어른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라면 나중에 나근희(이정은)가 등장하며 이 책임은 법관에게까지로 확대된다. 그리고 이 과정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부모의 역할에 있어, '가정폭력' 에피소드와 '가출', '재혼' 등의 다양한 이야기를 등장시킨다. 학대범 아버지의 에피소드를 법관 차태주와 엮는다던가. 하지만 그 외의 설정 법정에 아이들과 선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며, 아이의 판결에 무심한 부모와 그렇지 않은 부모, 나의 잘못이라고 탓하는 부모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이 아이를 낳고, 기르고,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부모'의 책임을 빼놓을 수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그 부모의 책임에 대해서는 강현중(이성민)의 '부모'의 신념과 '법관'의 신념까지 확대되며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러한 부모의 방치에 법원의 처벌을 받음에도, 그 외의 소년들이 다시 법원에 서는 이유에 대해 범죄에 대한 사후 시스템에 제대로 그들을 보호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센터장이 등장한 에피소드에서는 범죄 이후 아이들의 삶에 집중한다. 또한 마지막 에피소드에는 한 번의 벽돌 투척 범죄 이후, 성폭행 사건으로 다시 법정 앞에 선 두 아이의 이야기를 그리며 왜 다시 그들이 교화될 수 없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지, 이를 거꾸로 말하면 온 마을이 무심하면 한 아이를 망칠 수 있다는 뜻도 돼. 과연 가해자가 저 아이들 뿐일까? 누구도 비난할 자격 없어, 모두가 가해자야"


이 마지막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심은석의 대사는 그가 가지고 있는 소년범을 혐오한다는 신념과 동시에 그를 만든 사람들, 이렇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들 역시 중요하다고 말하는 차태주의 이야기까지 품는 대사이자 다시 시청자들에게 질문하는 대사이다.


이외에도, 이 드라마 <소년심판>의 연출에 있어 어느 누가 피해자, 가해자인지에 대해 '에피소드'를 다루는 방식에서 어떠한 1차적인 편견도 없이 만들어냈다는 데에 박수를 치고 싶다. 이 <소년심판> 속 소년들에 대한 가해자, 피해자가 끊임없이 옮겨가면서 시청자들에게 "당신의 선입견은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 질문하기 때문이다. 센터장 에피소드를 맞닥드렸을 때, 당신은 정말 제보자가 딸임을 생각해보았는가? 센터장을 의심하진 않았는가? 질문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굉장히 또 빠르게 풀린다는 데에 이 드라마가 탄력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는 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드라마의 장치"를 위해 과장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이 소재를 이렇게 까지 다룰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진짜 좋은 드라마를 끝까지 봤다는 점은 지울 수 없다. 모두가 단순히 인터넷과 기사들로만 떠들었던 그 '신념'에 대해 '당신의 신념은 안녕한지', '정말 얼마 전 본 기사에서 드러낸 당신의 시각과 일치하는지' 질문하는 드라마이니까.


나의 옛날 이야기를 되돌아보며, 나의 소년 때를 되돌아본다. 중학교 시절, 소위 '문제아'라고 불렸던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당시에는 그들이 왜 이렇게 까지 하는가, 수업 시간에 늦고, 담배를 피우고, 소년이 저지르면 안 되는 선을 넘는가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아이를 왕따 시키고, 패고 했던 그런 일 속에서 나는 그저 방관자가 아니었나.


하지만 이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누구나 결핍은 있다. 드라마 속에서 말하는 아이들이 이런 일탈을 저지르는 이유는, "나 좀 봐달라고" 어른들에게 호소하는 거라고. 나 역시도, 결핍이 있어왔던 청소년기 속에서 "나 좀 봐달라고" 호소했던 적이 있지 않은가. 그 아이들 역시, 누군가에게 "나 좀 봐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범죄는 잘못되었지만, 이번 드라마로 "왜 그들이 그런 범죄를 저질러야만 했나"라는 생각 한 번쯤은 다시 한번 가져도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드라마 자체도 은연중에 꾸준히 그런 질문을 던진다.


"소년과 어른은 무관한가요?, 어쩌면 어른이 잘 못하지 않았나요?"


"당신은 좋은 어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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