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eviwerX스위니
성장 드라마를 가장한 서슬 퍼런 가부장 판타지, 뮤지컬 <엑스칼리버>
EMK다운, EMK답지 않은
<엑스칼리버>는 EMK뮤지컬컴퍼니(이하 EMK)가 <마타하리>, <웃는 남자>에 이어 선보이는 세 번째 창작뮤지컬이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비해 덜 알려진 유럽권 뮤지컬을 라이선스로 선보이며 입지를 다진 제작사 EMK가 내놓은 창작뮤지컬은 자연스럽게 유럽 라이선스 뮤지컬의 특성을 물려받았다. 탄탄한 서사와 메시지보다는 흔히 대극장 뮤지컬에서 기대되는 볼거리 많은 무대, 감정을 극대화한 음악, 그리고 대중적인 스타 캐스팅으로 관객에게 풍성한 쇼를 즐겼다는 포만감을 안겨준다는 특성 말이다.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낭만적인 모험과 로맨스를 펼쳐 보이는 아더 왕 전설은 EMK 특유의 ‘화려하고 웅장한 유럽풍 대극장 뮤지컬’을 구현하기에 적당한 소재로 보였고, 실제로도 이러한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무대디자인을 맡은 정승호는 그의 인장과도 같은 상징적인 박스 디자인 대신 거대하고 사실적인 숲과 바위 세트, 물과 불을 이용한 특수 효과로 판타지에 충실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켈틱 음악부터 록까지, 다채로운 장르를 넘나들며 배우가 가창력을 마음껏 뽐내게 만드는 프랭크 와일드혼의 특기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여기에 70여 명의 앙상블을 동원해 세종문화회관의 광활한 무대를 채우는 대규모 전쟁 씬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이러한 풍성함에도 불구하고 <엑스칼리버>는 인상적인 스펙터클을 선사하지 못한다. 과장된 홍보가 약속한 스펙터클을 경험하기에 찔끔찔끔 내리는 빗줄기 너머 슬로우 모션으로 표현된 전쟁 씬은 너무 조악하고, 중세가 아니라 선사 시대에 사는 듯한 적군 색슨족의 비주얼은 무시무시하기보다 우습다. 모든 곡을 배우를 혹사하는 고음으로 마무리하는, 그리하여 모든 장면을 하이라이트로 만드는 와일드혼 특유의 작곡법은 과유불급의 산만함을 남긴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캐릭터와 서사에 대한 제작사의 전에 없던 야심이다. EMK는 애당초 스위스에서 개발된 작품을 라이선스 뮤지컬로 들여올 예정이었다가 각색 과정에서 아예 대본과 음악을 전면 수정해 창작뮤지컬로 완성했다. 이와 함께 주인공 아더와 주요 캐릭터 랜슬럿, 기네비어, 멀린, 모르가나가 전설과는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마타하리>가 실존 일문 마타하리를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그릴 뿐 별달리 새로운 해석을 내놓지 않았던 것이나 <웃는 남자>가 원작 소설의 내용을 어설프게 요약하는 데 그친 데 비하면 <엑스칼리버>는 전설을 재료로 삼아 뮤지컬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의욕이 느껴진다.
지나친 의미 부여일까? 문장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근사하지만 일관된 서사로 응축되지 않는 인물의 목소리에서 허세 이상의 의미를 읽어낼 필요가 있는지 다소 의심스럽긴 하다. 하지만 <엑스칼리버>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좀 더 확신이 생긴다. 대극장 뮤지컬은 보통 마지막에 대규모 앙상블을 동원해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하는데, <엑스칼리버>는 피날레에서 아더 혼자 덩그러니 무대에 오른다. 그걸 보면 이 작품이 대중에게 어필하는 보고 듣기 좋은 쇼를 어느 정도 포기하면서까지 전하고 싶은 어떤 메시지를 품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 비장한 마지막 풍경 앞에서 내가 느낀 묘한 불편함은 무엇일까. 이 불편함이 창작진이 의도한 메시지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아비의 죄와 싸우는 아들들
평범했던 한 소년이 전설의 검을 뽑고 왕이 된다. 이는 후대의 수많은 판타지 문학에 영향을 준 짜릿하고 환상적인 설정이다. 하지만 더이상 신의 선택이나 왕가의 혈통이 통치자의 자질이 아니게 된 이 시대의 관객에게 아더가 왕이 되어야만 하는 정당성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엑스칼리버>의 창작진도 이러한 문제를 염두에 둔 듯, 작품 속에 흥미로운 질문을 심어둔다. 아더가 엑스칼리버를 뽑는 순간 랜슬럿이 ‘검이 한 사람을 왕으로 만드나?’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이 의문은 ‘진정한 왕의 자질은 무엇인가’, ‘인간은 운명에 좌우되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며 <엑스칼리버>를 단순한 액션물이나 로맨스물로 즐기기에는 무게감 있는 작품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 아더에게는 검을 뽑은 뒤에도 숙제가 남아있다. 멀린의 대사를 빌리자면, 아더가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 달성해야 할 과제는 ‘용의 불길을 다스리는 것’이다. 작품은 처음부터 아더가 난폭한 기질을 다스리지 못해 친구들과 싸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가 타고난 분노는 친아버지 우더 왕에게서 물려받은 용의 피 탓으로, 아더는 탐욕과 분노에 사로잡혀 용의 불길에 타버린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걷기 위해 자신 안에 불타는 분노를 다스려야 한다. 이렇듯 <엑스칼리버>는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 앞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애쓰는 아더의 성장기에 중점을 둠으로써 지금의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든다.
운명 앞에서 통제권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건 아더 뿐만이 아니다. 전설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기사였던 랜슬럿도 여기서는 자신을 학대한 술꾼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닌 존재로 등장한다. 그는 여자들과 술을 마시며 노닥거리다가 아더를 지키지 못하는데, 이 일로 자신에게 크게 실망한 뒤 술을 끊는다. ‘술을 안 마시면 춤이든 뭐든 제대로 하는 게 없다’고 말하면서도 모두가 취한 아더의 결혼식에서 술을 거절하는 그의 모습에서 아버지와 다르게 살아 보려는 절박한 마음이 읽힌다. 아버지가 물려준 나쁜 피에 저항하는 두 아들, 아더와 랜슬럿의 공통점은 노래 가사 안에서도 드러난다. 아더가 왕이 되기로 결심하며 ‘내 안의 악마와 싸워야 해’라고 노래한 것처럼, 란슬롯 역시 명예롭게 살 것을 다짐하며 ‘내 마음속 악마들과 난 싸워 이겨야 해’라고 노래한다.
그런가 하면 아더의 양아버지 엑터와 아내 기네비어는 운명의 대척점에 있는 의지를 대변하는 인물로 설정되었다. 폭력적인 친아버지와 대비되는 자애로운 양아버지 엑터는 엑스칼리버의 ‘칼집’을 만들어준다. 이는 아더가 왕의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고 폭력성을 다스리도록 이끄는 인물이 엑터임을 설명하는 장치다. 기네비어는 사랑과 겸손, 용기와 같은 올바른 지도자의 미덕에 대해 조언한다. ‘운명을 믿느냐’는 아더의 질문에 대한 기네비어의 대답 ‘우리 행동에 따라 길이 정해진다고 믿어요’는 <엑스칼리버>의 메시지를 요약한다.
하지만 운명과 의지의 대결이라는 흥미로운 테마는 무대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이유는 인물들이 너무 짧고 얕게 갈등하기 때문이다. 아더가 왕이 되려는 계기부터 불확실하다. 그는 멀린과의 첫 만남에서 왕의 운명을 거부하지만 두 번째 만남에서 갑작스레 검을 뽑기로 결심한다. 그 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관객은 모른다. 자비롭고 정의로운 왕이 되겠다고 굳게 맹세한 아더가 엑터가 죽자마자 난폭하게 변하여 주변 인물들을 함부로 대하고 무모한 전쟁을 강행하는 전개 역시 갑작스럽다. 그렇게 마냥 제멋대로 굴던 아더가 마지막에 자신을 배신하고 불륜을 저지른 기네비어와 랜슬럿을 죽이지 않고 추방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용을 다스렸다’, 즉 성장했다고 설명하는 이 작품의 논리는 납득하기 어렵다.
랜슬럿은 또 어떤가. ‘검이 한 사람을 왕으로 만드나’라고 의아해하던 랜슬럿은 같은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아더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맹세한다. 2막에서는 백성들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아더에게 거역하며 다시 한번 회의감을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아더의 곁을 떠나지는 않는다. 그가 운명에 맞서 선택한 명예로운 삶이란 단지 아더를 지키는 삶에 다름 아니다. 심지어 전설 속 랜슬럿이 사랑하는 기네비어를 구하기 위해 아더와 맞섰던 것과 달리 뮤지컬의 랜슬럿은 끝까지 아더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데, 랜슬럿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면서까지 아더를 지키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호하기만 하다.
극의 마지막 장면. 홀로 엑스칼리버를 쥐고 바위산에 선 아더의 모습은 1막 끝을 장식하는 즉위식 장면과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즉위식 장면과 같은 음악이 흐르고, 같은 배경의 세트가 등장하지만 당시 아더의 곁을 지켰던 친구 랜슬럿, 연인 기네비어, 조력자 멀린, 누이 모르가나, 그리고 그를 칭송하던 백성들은 이제 모두 사라지고 없다. 비장미 넘치는 음악과 조명으로 미뤄보건대 창작진은 이 피날레에서 방황과 상실을 딛고 일어선, 강인하게 성장한 왕 아더를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정작 관객의 눈에 비친 아더는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타인을 무시하다가 자멸한, 칼만 남은 공허한 왕처럼 보일 뿐이다.
용감하지만 무력한 딸들
운명과의 대결이라는 주제가 흐려지면서 엉뚱하게 부각되는 것은 이 작품이 보여주는 부자(父子) 관계에 대한 유난스런 집착이다. 주인공 아더에게는 아버지가 셋이나 있는데, 첫째는 친아버지 우더이고, 둘째는 양아버지 엑터이며, 셋째는 그의 탄생에 기여하고 이름까지 지어준 마법사 멀린이다. 친아버지는 그에게 왕가의 혈통을 물려주고, 나머지 두 아버지는 아더를 대신해 죽음으로써 그가 왕좌를 지킬 수 있게 돕는다. 이 밖에도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는 순간마다 늘 부자 관계가 끼어든다. 멀린이 신하의 아내를 범하려는 우더 왕을 도운 이유는 아들 같은 존재(아더)를 원했기 때문이고, 성군을 꿈꾼 아더가 이성을 잃고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은 양아버지 엑터가 살해당하면서부터이며, 적장 울프스탄이 아더에게 원한을 품는 계기 또한 아더가 자신의 아들을 죽였기 때문이다.
악역 모르가나는 이 공고한 부계 사회에 반기를 드는 인물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잃는다는 건 인생 가장 큰 비극이야’라는 울프스탄의 말에 ‘그런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는 게 더 큰 비극이지’라고 반박하는 모르가나는 이 극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 끈끈한 피의 대물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판타지 안에서 모르가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소외당한다. 아버지로부터 용의 힘을 물려받은 아더는 왕이 되지만 모르가나는 그 힘을 물려받았다는 이유로 위험 대상으로 취급되어 수녀원에 갇힌다. 모르가나가 거리낌 없이 적장 울프스탄을 도울 수 있는 건 그가 이기적이고 악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에게는 지켜야 할 가족도 국가도 없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게 딸로 태어난 모르가나에게는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모르가나의 비극은 동시대 관객에게 가장 현실적이고 공감 가는 비극으로 다가온다. 관객 사이에서 ‘아더가 아니라 모르가나가 주인공 같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다양한 여성 캐릭터에 목마른 뮤지컬 관객에게 강하고 영리하며 가부장제의 어두운 이면을 폭로하는 모르가나는 매력적인 여성 빌런으로 어필한다. 하지만 여러 언론 리뷰가 추켜세우듯 그를 주체적으로 재해석된 여성 캐릭터라고 단언하기는 머뭇거려지는 점이 있다. 먼저 이 캐릭터의 탄생 배경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자. <엑스칼리버>의 모르가나는 아더 왕 전설 속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두 마녀 모르가나와 비비안이 합쳐 만들어진 캐릭터다. 아더를 위협하는 누이라는 설정은 모르가나에게서, 연인 멀린에게서 마법에 대한 지식을 얻는다는 설정은 비비안에게서 따왔다. 비비안은 사랑에 눈먼 멀린에게 비밀스런 마법을 전수받은 뒤, 그 마법으로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그를 봉인한다. 하지만 <엑스칼리버>에서 배신당하고 감금되는 쪽은 멀린이 아닌 모르가나다. 멀린은 한때 사랑했던 제자 모르가나가 너무 위험한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수녀원에 감금한다. 그럼에도 모르가나는 멀린을 쫓아다니며 마법을 전수해 달라 간청한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모르가나는 지식을 전수받는 대가로 멀린이 원하는 아들을 낳아주겠다고 유혹하기에 이른다. 모르가나는 부계 전통에 반항하고 딸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을 요구하지만, 결국 대를 이을 아들을 낳는 도구가 되기를 자처해 가부장제 질서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권력을 얻고자 한다. 이러한 점에서 모르가나는 한계가 분명한 여성 캐릭터이며, 오히려 멀린을 이용하고 그를 대신해 전설의 대미에서 왕국의 수호자 역할을 한 전설 속의 비비안보다 퇴보한 존재다. 이 작품에서 가부장제에 도전한 모르가나에게 주어진 결말은 사악한 마녀로 매도되어 척결 당하는 것뿐이다.
또 다른 여성 캐릭터 기네비어도 전설과는 크게 달라졌다. <엑스칼리버>에서 기네비어는 지체 높은 공주가 아니라 부모 없이 자란 고아다. 하지만 그 덕분에 가부장제의 속박에서 한결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보이는 그는 극 초반에 신선한 매력을 뽐낸다. 제왕의 검을 뽑은 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에 기네비어가 가장 먼저 궁금해 하는 것은 ‘여자는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겠죠?’다. 그는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무예에도 뛰어나다. 여자들을 모아 전투 훈련을 시키고, 그런 여자들을 비웃는 랜슬럿을 혼쭐내줄 만큼 실력자다. 이런 기네비어는 일견 미투 운동 이후 공연계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화두가 된 페미니즘의 요구에 부합하는 여주인공처럼 보인다.
하지만 달콤한 설정은 모두 얄팍한 겉포장일 뿐이라는 점이 금세 드러난다. 아더, 랜슬럿, 기네비어 앞에 색슨족이 나타나 실제적인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기네비어는 무대에서 퇴장하고, 아더와 랜슬럿만 싸움에 나선다. 이후 기네비어에게 부여된 역할은 자신을 지키고 쓰러진 아더를 위해 기도드리는 성녀의 역할 뿐이다. 왕비가 된 기네비어가 랜슬럿과 불륜을 저지른 것도 한순간의 실수로 그려진다. 기네비어는 즉시 아더를 배신한 것을 반성하고 스스로 수녀원으로 향해 속죄의 여생을 보낸다. <엑스칼리버>의 기네비어는 최소한 랜슬럿을 향한 사랑을 부정하지 않고 뻔뻔하게 자신의 감정에 몰두할 줄 알았던 전설 속의 기네비어보다도 더 순종적인 아내다. 기네비어가 수녀원에 들어가는 건 원전에서 그대로 가져온 설정이라고 변명하지는 말기를. 기네비어의 모든 설정이 원전과 달라졌음에도 이 같은 결말만을 유지했다는 점이 오히려 창작진의 가치관을 투명하게 보여주니 말이다.
다시 작품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보자. 수녀원을 뛰쳐나온 마녀 모르가나는 파멸했고, 정숙하지 못한 아내 기네비어는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야만적인 이교도 색슨족은 패전해 물러났고, 기독교 왕국과 어울리지 않는 드루이드교의 마법사 멀린과 왕에게 복종하지 않았던 2인자 랜슬럿은 결국 아더를 위해 죽었다. 모든 불순물이 제거된 폐허의 자리에 칼을 쥔 아더만이 고고히 서있다. 그 살풍경한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막중한 책임감을 지고 홀로 운명 앞에 선 제왕의 고독보다 통일된 왕국, 하나의 신과 하나의 왕만이 존재하는 왕국을 확립하기 위해 사라져야 했던 수많은 인물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과연 아더의 성장기라 할 수 있을까. 아더가 이미 저질러진 비극 앞에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랜슬럿과 기네비어를 용서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봉건 사회의 폭력성을 극복한, 아버지 세대로부터 진일보한 존재로 설명하는 것은 가진 자의 지나친 자기애와 자기기만이 아닐까. 그리하여 결말 앞에서 창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는 다시 아더가 엑스칼리버를 뽑던 순간 제기된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검이 한 사람을 왕으로 만드나? 아더를 왕으로 만든 성검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그것은 결국 잔혹한 가부장제의 검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