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번째 책) 박연준,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창비(2007)
ㅡ 어디선가 들은 얘기 하나. 우리 몸의 중심은 어디일까? 심장이나 배꼽이라는 대답이 유력할 것이다. 아니면 뇌라는 대답도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저 의미심장한 난센스가 의도한 대답은 따로 있다. 바로 '아픈 곳'. 어느 부위든 아픈 곳이야말로 우리 몸의 중심이라는 대답은 뜻밖이지만 반박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입안에 구내염이 날 때마다 내 모든 신경은 그 작은 염증 부위에 초집중되곤 했다. 우문현답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처음에는 유머라고 생각했으나 곱씹을수록 아득한 지혜로 여겨진다. 열 군데가 건강해도 한 군데가 아프면 그곳이 중심이 된다는 씁쓸한 지혜. 마치 인간에게는 고통이 즐거움보다 중요하다는 듯이.
ㅡ 박연준의 첫 시집을 읽으면 그녀의 중심은 어디일까 생각하게 된다. 어디가 그토록 아팠길래 저런 문장을 썼을까(써야만 했을까). "오늘도 딸들은 구두 뒤축으로 아버지를 뭉개죽이고"(「밤 11시」 중). 섬뜩한 문장들이 가득하다. 그것들은 그보다 더 섬뜩했을 자신의 생으로부터 왔을 텐데, 그 생의 중심에는 분명 그녀의 아버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그녀의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자였고 극심한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병을 앓던 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이 시집을 다 읽고 난 후였다. 그러니 그녀의 고통의 원인에 아버지가 있었던 게 아니고, 차라리 아버지가 그녀에게 고통 그 자체였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첫 시집의 많은 시에서 "아버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아니, 시의 주인공이 아버지인 게 아니라, 그녀의 중심이 아버지다.
ㅡ 그녀의 아버지는 아팠다. 병상에 누운 아버지는 딸에게 '아픈 곳'이 됐다. 자신의 아픈 중심을 보며 시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를 사랑하는 동시에 혐오했던 딸의 마음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며 간신히 가늠해 보게 된다. "내 어린 손으로 활짝 핀 아버지를/꺾는다, 자귀나무 꽃이 붉으니/아버지 깊은 잠에도 꽃물 들겠지 (…) 아버지, 운 나쁜 나의 애인"(「봄의 장송곡」 중). 아버지 위에서, 사랑과 증오는 중첩된다. 그녀는 아버지를 보며 "가엾은 당신, 내 멍으로, 푸른 멍으로/기르고 싶다"(「껍질이 있는 생에게」 중)고 말하기도, "나는 온 힘을 다해 당신을 벗어나며/내 허리춤에도 못 미치는 당신을 밀치며"(「달의 상상임신」 중) 아버지와의 이별과 단절을 꿈꾸기도 한다. 사랑하면서 증오한다는 애증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이것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증오해야 하고, 증오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사랑해야 하는 어떤 악순환이다.
ㅡ 이제 그녀가 뭘 할 수 있을까, 저 잔인한 고통 속에서 비명을 토하는 것 외에. 다만 그녀의 비명은 내지를 힘조차 없다는 듯이 나지막한 비명이다. 묵묵한 비명이자 소리 나지 않는 비명이다. "이제 곧 비명처럼 펼쳐질 생을 품고 끙끙 앓는 어두운 바다"(「타락한 캔디의 독백」 중). 속으로 끙끙 앓고 속으로만 흐느끼는 그런 비명, 그런 시. 그것은 그녀가 쓴 독한 문장들에 비해 얼마나 여린가. 우리 몸에서 가장 약한 속눈썹만큼이나 여리다.
창문 밑에 매달린 고드름 사이로,
흐린 하늘에 목매달아 죽은 가오리연을 본다
하늘을 휘젓는 연의 시체는 부드럽다
까만 바람, 겨울은 낙타를 타고 걷는다
이따금, 땅바닥에 흩어진
겨울의 부러진 발톱을 몰래 줍는다
주워들고는 죽은 구상나무 뿌리에 기우뚱 심어놓는다
구상나무는 아무것도 모르고 순하게 죽어 있다
뿌리에서 또다른 슬픔이 자라는 줄도 모르고
죽은 몸과 자라나는 슬픔 사이의 여백이 차갑다
-22면, 「겨울, 점점 여리게」 부분
ㅡ 정말로 속눈썹으로 썼을 것만 같은 시. 바들바들 떨면서. 저 여린 비명과도 같은 시를 "슬픔이 자라는 줄도 모르고" 읽게 된다. 고작 스물여덟이라는, 시인으로서는 굉장히 젊은 나이에 낸 첫 시집이다.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어렵고 굴곡진 삶이 그만큼 좋은 시가 되어 그녀에게 돌아왔을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당시 이십 대의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이후의 삶이 그보다는 나앗기를 바랄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바람을, 이 시집이 나온 지 십 년도 넘은 지금에 와서 뒤늦게 해 본다. 그 겨울 같은 생이 지나가고 지금 그녀는 봄을 살고 있을까. 지금부터 그녀의 시집을 한 권씩 읽어나가는 동안 알게 될 것이다. 문득 이런 구절이 보인다.
겨울이 피를 토하며 죽어나갔고
봄이
시체처리반으로 납시었다
-106면, 「광주 알코홀릭 병원」 부분
08.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