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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작가 Apr 21. 2024

소모 인간

드라마, 영화, 웹툰은 늘 즐겁다. 코로나 시기쯤 구독자 5만이던 영화 리뷰 유튜버가 어느새 120만이 훌쩍 넘어간다. 즐겨보던 웹툰은 드라마와 영화가 됐다.


늘 나의 머리를 손질해 주는 헤어디자이너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다듬어주고,

늘 내 양복과 와이셔츠의 카라를 드라이해 주시는 집 근처 세탁소 아저씨는 사람들의 옷을 깨끗하게 해 준다.


하씨 나는 뭐 하고 있었지?

그동안 나는 소비한 것 밖에 없는데.

 


봄이 오니 결혼하는 친구들이 늘었다. ‘그래, 이 초초초저출산 시대에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조국의 경제 발전과 안전에 이바지하려는 너희들이 자랑스럽구나’ 하고 두툼한 축의금을 턱 하고 내놓는 것이 나의 최선이다.



내 삶이 어떤 식으로든, 아주 조금이라도, 세상에 이로운 영향을 주리라 믿고 싶지만 요즘 통 그런 생각이 안 든다.

근래 매일 같이 야근하던 터라 몸도 마음도 약해진 틈을 타 역한 생각이 피어난다.

내게 자존감은 공기 같은 존재라 감사함 없이 지냈는데, 공기가 오염되니 숨 쉬기가 영 편치 않다.

직사각형 이불을 잘만 덥고 자고 있었는데, 괜히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잘라버려 가지고, 어떻게 덮든 발이 이불 밖으로 자꾸 삐져나오는 듯한 불쾌한 기분이다.


이렇게 떨어진 내 자존감과 직업 소명 의식을 높여주는 일화가 있다.

힘들 때면 멋지게 이 일화를 떠올리며 힘을 내곤 합니다라고 쓰려다가, 이내 그러거나 말거나 잠이나 많이 자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글 쓸 때 뻥이나 치지 말자 다짐하고 다시 글을 쓴다. 하지만 종종 그때를 생각하면서 정신 차리곤 한다.


나는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해외 판로 개척을 지원하는 일을 한다. 해외 영사관에서는 현지에서 우리 국민을 보호하듯, 우리 기관의 해외 부서들은 기업들이 안전하게 해외로 진출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전 세계 인구 1% 미만의 대한민국 시장을 벗어나 99%의 시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원한다.

국내 지사는 해외로 나가고자 하는 중소기업을 만나고, 해외 지사는 우리 기업들의 제품을 살 바이어들을 찾는다. 그리고 그들이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업무가 우리 기관의 핵심 역할이다. 기업을 위한 결정사(결혼정보회사)라고 보면 되겠다.


그날은 우리 임직원을 대상으로 시각장애인에 대한 인식개선 교육을 받는 날이었는데, 인식개선을 통해 수출 지원 업무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는 시간이었다.

‘성인지 어쩌고, 군 정신, 대적관이 어쩌고... 음 그럼 그럼 알지 알지 다 잘 알지, 어차피 다 아는 얘기, 나는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거니까.

난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응.

원래 이런 교육은 초중고, 대학교, 군대를 거치면서 늘 ’ 보여주기식 행사‘, ’ 의무 시간  때우기‘ 관성 때문에 이번에도 사실 크게 기대 안 했는데 이번 교육 말미에는 감회 되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번 교육은 경기도시각장애인복지관과 시각장애인용 제품을 만드는 사회적 기업의 도움을 받았다.

먼저 시각장애인 안내견이 교육장에 나타나 관심을 끌었다. 안내견을 대하는 에티켓부터 가볍게 듣고, 안내견이 전국에는 80마리도 체 안된다는 얘길 듣고는

‘엥? 그거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차에 한 마리를 길러내는 데 1억~ 2억 원이 든다는 소리에 척추가 곧게 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게 별로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허. 참.


다음으로 점자 찍는 실습을 했다. 엘리베이터를 보면 올록볼록 튀어나와 있는 점자다. 이걸 내가 직접 찍어보기 전까지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인지 못하고 있었는데, 점자는 읽는 방향과 쓰는 방향이 정반대다. 왜냐면, 점자가 튀어나오려면 종이를 뒤집어 앞으로 튀어나오도록 막대기로 눌러 찍어야 하는데 그 말은 즉슨 점자를 읽는 방향과 반대로 찍어야 뒤집었을 때 제대로 읽는 방향이 된다는 거다.

주사위에 눈금 6개 모양을 생각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에 있는 점 점자를 상상하면 된다.

예컨대, 점자의 왼쪽 가장 상단 위에 점자를 하나 찍고 나서 뒤집어서 보면 오른쪽 최상단에 점이 튀어나와 있는 모양새다.  

이게 생각보다 엄청 헷갈린다. 마치 글을 거꾸로 읽고 쓰는 기분이다. 다이분기 는쓰 고읽 로꾸거 을글 치마.

출판물 같이 양이 많은 건 점자를 찍어내는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여러 장비가 있어 일일이 다 손으로 찍을 필요는 없지만, 작은 메모나, 노트 필기 같은 건 개인이 일일이 손으로 다 찍어내야 한다. 지금 내가 이렇게 편히 글을 쓰는 행위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


‘신통방통하네~ 불과 이 여섯 개의 점자로 어떻게 세상을 표현하는 거지’ 하고 궁금해하던 차에, 선생님이 점자는 문장의 가장 첫 번째에 어떤 기호를 표기하느냐에 따라, 숫자도 될 수 있고, 한글도, 영어도 될 수 있고 했다.

’ 에라이 이건 어려워도 너무 어렵잖아 ‘ 배움의 의지가 한 풀 꺾인 상태로 점자를 제대로 읽고 쓰려면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보니, 최소 6개월은 배워야 읽고 쓰는데 조금 익숙해진다고 한다. 게다가 나이가 많은 분들은 손끝의 촉각이 많이 무뎌서 훨씬 오래 걸리신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각장애인 강사분께서 덧붙이기를 점자로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 시각장애인 중 10~20%도 채 안된다고 하셨다. 그만큼 배우기 어렵고, 많은 나라에 국가적으로 배울 수 있는 환경 조성이 안되어 있다고 한다.

잠시 상념에 빠졌다.

배우기 어렵다. 배우는 환경이 좋지 못하다. 읽고 쓰는 능력이 부족해진다. 배움이 부족하다.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진다는 간단한 결론이 난다.

세상의 불편한 편린을 마주했다. 살아오면서 충분히  법도  사실인데 그간 그만큼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방증이겠다.


내가 어렸을 때는 저녁식사 직전쯤? SBS에서 오후 5시~6시가 되면 늘 포켓몬스터, 슬레이어즈 같은 만화가 상영됐는데 나는 그때마다 광고 기다리는 게 너무 싫었다. 나이가 든 뒤에서야 그 광고가 있었기 때문에 만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야 비로소 ‘아 내가 어른이 된 건가’ 싶었는데... 이후 광고 보는 태도가 달라졌다.

 사고의 외연을 넓힐수록 상황을 대하는 태도도 덩달아 전향적으로 바뀌는 것 같다. 나에겐 더 많은 경험,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다음으로 시각 장애 걷기 체험을 했다. 실제로 눈을 가리고 지팡이를 이용해서 아래 보도블록에 튀어나와 있는 표시를 느끼면서 다음 강의실까지 이동했다. 등에 식은땀이 나면서 5번 경추부터 12번 흉추까지 흘러내렸다. 속도는 당연히 느렸다. 체감상 하루 종일 걸은 것 같은데 불과 15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 강의실이었다. 눈뜨고 걸으면 30초도 안 걸리는 거리를 눈을 가리고 걸으니까 5분도 더 걸렸다. 그마저도 옆에서 잡아주는 사람이 있기에 종종걸음으로 빨리 간 거지 혼자 했으면 10분도 더 걸렸을 것 같다. 목에 담이 온 것 같다.

이후 시각장애인들이 어떻게 일상생활을 하는지 직접 들었다. 예컨대, 스마트폰(보이스오버 기능)을 쓸 때 어떻게 쓰는지, 어떤 컴퓨터를 쓸 때는 어떻게 사용하는지, 평상시에 겪는 애로사항들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요즘엔 비대면 업무나 도처에 무인단말기기 천지라 힘들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시각장애인용 제품을 만드는 사회적 기업 대표님께서 발표를 하셨다.

인자하신 인상에 눈빛은 어찌나 따듯한 느낌을 주던지 시작부터 압도됐다. 마치 어린양을 대하는 목사님 같은 기분이랄까. 대표님은 40분 정도 담담하게 이 일을 왜 시작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할 건지, 사회적 기업으로서 현재 어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 회사에서 만드는 시각장애인 보조기기 주력 제품은 휴대용 점자 연습장이다.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우리가 전화를 받으면서 가볍게 포스트잇에 메모를 남기는 행위조차도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넓적한 장치에 종이를 반듯하게 고정한다 그리고 점차 틀을 종이 위에 고 정시시켜 날카로운 핀으로 구멍을 뚫는다. 메모 내용을 읽으려면 역순으로 점자 틀과 종이 고정장치를 떼어내고 종이를 뒤집어야만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는 시각장애인들이 다니는 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이 수학문제를 풀 때 연습장 쓰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점자 연습장을 개발하게 됐다고 했다. 직사각형 플라스틱 점자 틀에 점자를 찍고 뒤집으면 튀어나와 있는 부분으로 바로 읽어낼 수 있고, 툭툭 위쪽 버튼을 누르면 다시 원판 상태로 돌아간다. 이 제품의 원리를 보면 참 간단한데, 이렇게 저가의 제품을 만들어 낸 사람은 이 대표가 유일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기업들에게 돈이 안되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와 장비도 개발하셨다. 이런 거다.  만약 시각장애인과 일반인이 회의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면, 회의 참석자들은 A4로 출력된 자료를 보면서 할 것이다. 이때 시각장애인은 자료의 맥락을 따라가기 어려울 수 있다. 종이를 얼굴 가까이 데어만 보이니까 말이다. 그때 이 기업의 제품을 활용하면 캠이 촬영하고 있는 범위에서 A4용지에 출력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움직이면, 그 부분이 확대되면서 저시력 장애인은 그 부분을 따라가며 볼 수 있다. 회의 참석자들이 손가락 하나만 배려해 주면 함께 일할 수 있다.


22년 통계청 기준으로 국내 장애인은 260만여 명에 달한다. 그중 시각장애인은 25만 명. 25만 중 81%는 정도에 따라 일상생활을 어느 정도 할 수 있고, 21%는 우리가 시각장애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불편한 사람이 12%인 반면, 후천적 원인(녹내장, 당뇨 등)이 88%다. 대부분 후천적 원인에 의해 시각장애가 생기는데 이는 해외의 경우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후천적이라고 하더라도, 개도국 중에서도 경제 수준이 낮은 나라에서는 치료를 받으면 충분히 앞을 볼 수 있는 병세임에도 병원을 가지 못해서 악화되어 앞을 전혀 못 보는 전맹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정확한 통계는 아닌 것 같지만, 전 세계 시각장애인 3억 명 중 60% 이상은 시각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작디작은 국내 시각장애 시장에서 기업 활동을 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이 시장은 주요 소비자(정부, 기관)와 수요자(시각장애인), 공급자(기업) 구조가 복잡해 더 어렵다고 한다. 이 말을 덧붙이면서 대표님께서는 다행히 점자는 규칙이 다를 뿐 해외에서도 그대로 쓰기 때문에 해외 시장으로 확대하면 기업 활동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기에 우리 기관 같은 곳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하셨다. 그간 코이카나 코트라를 통해 많은 지원을 받으셨고, 해외전시회도 활발히 나가시면서 판로 개척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심에 무한한 박수를 드리고 존경한다.

이렇게 멋진 일을 하는 사람을 보니 부끄러웠다. 내 삶에 어떤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지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고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취준을 하던 때도 있었는데 말이다. 난 뭐 하고 있었지? 수출진흥기관에서 일한다고 좋은 일 한다고 대외적으로 주접만 떨어댄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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