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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작가 Mar 12. 2024

복싱장에서 만난 사람들

2화 < 이 일차원적인 육체 운동이 철학적임을 느낄 때>

우리 복싱장의 매주 금요일은 스파링 데이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갈고닦은 복싱을 테스트해 볼 수 있다.


오늘은 직업 군인 아저씨와 곧 군인이 될, 이제 갓 성인이 된 청년이 스파링을 하고 있다.

링 아래에서는 관장님이 이 두 관원에게 쩌렁쩌렁 소리치며 세컨을 봐주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경험이 많지 않아 서로 견제만 하고 상대가 주먹을 낼 때만 조금씩 반응해서 투닥거리고 있다.


"왜!! 상대가 주먹 내는 걸 기다리고 있어!! 먼저 들어가란 말이야!!!"


“질문에 답만 하지 말고 네가 질문을 하란 말이야!!”


“(링 아래) 오~~~ 관장님"


잠시 상념에 빠졌다. 전 세계챔프 홍수환이 왜 복싱이 우리 인생과 같다고 했는지 이럴 때마다 느낀다.


맞다 우선 전략과 복싱 스타일에 따라 다르겠지만, 상대 주먹에 대응만 하다 보면 상대의 페이스에 그대로 말려들게 된다.

먼저 내 템포가 아닌 상대 템포에 맞추다 보면 상대는 인엔 아웃을 하며 자신이 원하는 타이밍에 들어와 주먹을 내지르고, 다시 빠지고 숨을 고를 수 있다.

반면, 상대 템포에 말려든 나는 상대가 언제 들어올지도 몰라 잔뜩 긴장한 상태에 몸은 경직되고 숨은 차면서 점차 체력이 고갈되기 쉬운 상태로 변한다. 그래서 내 템포에 상대가 따라오게끔 하는 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특히 인파이터들이 실수하는 게 아웃 복서들의 빠른 발에 졸졸 따라다니다 보면 금세 지친다. 상대가 빠져나갈 길목을 먼저 막아야 하는데 말이다.

졸졸 따라다니다가 내 발이 묶이는 순간 아웃복서들의 현란한 스텝에 대응 못하고 그들의 거리에서 신나게 두들겨 맞다가 끝날 수 있다.


상대의 페이스를 중간중간 끊어주면서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스타크래프트를 할 때도 비슷한 걸 느꼈던 거 같다. 내 주 종족은 테란, 친구는 저그였다.

저그는 낮은 생산 단가와 빠른 생산 속도를 이점으로 공격 유닛을 빠르게 뽑아 끊임없이 적진으로 보내는 전략이 기본이다.

반면 테란은 생산 속도는 느리고, 유닛 하나하나는 약하지만, 부대로 모였을 때는 엄청난 화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저그는 끊임없이 테란의 적진으로 공격을 가해, 유닛 하나하나를 야금야금 없애야 한다.

반대로 테란 입장에선 유닛을 잘 지켜야 한다. 하지만 저그의 계속되는 공격에 방어만 하다가는 절대로 게임을 이길 수가 없다.

오히려 적의 허점을 치고 들어가서 공격을 중단시켜야 한다. 제일의 방어가 제일의 공격이라는 게 언어유희가 아님을 알았다.


회사에서도 특히 외부 기관이나 사업 파트너들을 만날 때면, 먼저 치고 들어가서 상황을 휘어잡으면 협상할 때 쉽게 우위를 가져갈 수 있던 거 같다.

“A업무, B업무, C업무 중에서 B, C업무를 그쪽 기관에서 맡아 주시면, A업무는 저희 쪽에서 무조건 성공적으로 처리하겠습니다.(사실 B업무도 맡아도 되는데, 여유 있는데 ㅎ)”


"저희 기관에선 B, C업무를 다 하게 되면 일정상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B업무까지 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흠... 그러면 저희가 B업무까지 가져오는 대신, A업무 예산 20%만 증액해서 지원해 주세요. “


“... 알겠습니다.”


이렇게 보니 공격이 중요하다라기 보단, 어떤 방식이든 그 상황을 주도할 줄 아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다시 링으로 돌아가서.


군인 아저씨와 예비 군인 소년이 대치하고 있다. 서로 몇 번 상대 주먹에 맞아보니 아팠나 보다.

거리를 상당히 두고 섣불리 상대 공격거리로 들어가려 하지 않고 있다.

다시 관장님이 외쳤다.


“들어가! 둘 다 들어가! 몇 대 맞는 거! 두려워하지 말란 말이야!"


 “판돈도 하나 안 걸면서 돈을 따려고 하면 안 돼!!!”


멋진 말이다. 이런 날이 한 번씩 있다.


맞다. 상대와는 키, 몸무게, 나이, 유연성, 팔길이 뭐 하나 같은 게 없다.

서로 다른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와 나의 거리를 예상하기 어렵다.

내가 닿는 거리에 상대가 있을 수도 있고, 상대 팔이 너무 길어 내 거리에선 상대를 칠 순 없지만, 상대는 칠 수 있는 거리일 수도 있다.

그러니 서로 온갖 수를 써가며 움직이고 또 움직이면서 거리를 재고, 자신이 유리한 거리에서 싸워야 한다.

고개를 틀고 피하면서 각을 만들어 때릴 수도 있고, 한 번은 어깨를 깊게 틀어 넣으면서 주먹을 깊숙이 찔렀다가 두 번째 세 번째 주먹은 짧게 내질러 상대의 거리감각을 헷갈리게 만들 수도 있다.


때로는 용기 있게 상대의 거리 안으로 확 들어갈 때도 있어야 한다.

상대 잽은 하나 맞더라도, 내 뒷손으로 상대의 간을 세게쳐 숨도 못 쉬게 아예 게임을 끝낼 생각으로 용기 있게 상대의 보폭 안으로 깊게 들어가는 거다.


상대는 잽 한 번 만큼의 포인트를 가져갔다면, 나는 그 게임 자체를 가져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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