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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이스 Oct 21. 2019

미술엔 문외한이지만

책 <진중권의 서양미술사:인상주의 편> 휴머니스트, 2018년

미술은 잘 모른다. 학교 다닐 때도 미술 점수가 잘 나온 적이 없다. 실기 비중이 높은 만큼 미술은 내게 괴로운 과목 중 하나였다. 미술학원을 다닌 애들의 남다른 솜씨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작품 전시회를 몇 번 간 적이 있다. 감흥은 짧고 무지의 회한은 깊었다. 그래도 미술사 책은 가끔 읽는다. TV에서 하는 예술사 강의도 곧잘 본다. 학구열에 불타서도 아니고, 교양을 갖추고 싶어서도 아니다. 의외로 재밌어서 읽고 본다. 내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데 가장 큰 명분이 되는 것은 작지만 확실한 즐거움, 즉 재미다.


서양미술사 책을 재미로 읽지만 난 교양이나 지성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은 스토리텔링이 강한 이야기에 몰입하기 쉽다는데, 언제부턴가 난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집중력이 쉽게 떨어지는 걸 느낀다. 내 취향이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인물과 상황에 감정을 몰입해야 하는 이야기는 귀찮고 힘들다. 반면, 약간 건조한 인문 교양 책이나 강의가 의외로 받아들이기 쉽다. 일단 감정을 쥐어짜가며 몰입하지 않아도 된다. 평점심을 유지한 채 저자나 강사가 주는 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돼서 좋다. 간혹 이해가 안 가는 내용도 있지만, 내 (얄팍한) 지성 밖의 것은 못 알아들은 채 넘어가면 된다. 시험을 볼 것도 아니고, 이해 못한다고 누가 비난하는 것도 아니니까. 요즘 나오는 교양서는 나같이 어느 한 편에 치중하지 않고 골고루 무식한 사람이 적당히 이해하고 넘어가면서 읽기 좋은 책이 많다.


진중권 작가는 믿고 읽는 저자 중 하나다. 『미학 오디세이』를 비롯해 그의 책을 몇 권 읽었는데 단 한 권도 실망한 적이 없다. 어려울 거란 선입견을 버리면, 행간 사이로 차근차근 얘기하는 듯한 작가의 달변이 느껴진다. 그의 전공인 미학이나 미술에 관한 교양서뿐만 아니라 에세이나 다른 저자와 함께 낸 책도 다 읽을만하다. 그의 목소리가 익숙해선지, 아니면 강의한 것을 책으로 엮어서 그런 것인지 이 책도 얘기로 들려주는 것처럼 술술 읽힌다.


인상주의는 서양 미술사에서 고전 미술과 모더니즘 사이에 등장한 사조다. 아마 공교육 미술 수업 시간에 가장 많이 등장해 가장 익숙한 작품들이 이 시기의 작품들일 것이다. 나 같은 '미술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그나마 낯설지 않은 르누아르와 드가, 마네와 모네, 고흐와 고갱, 쇠라와 마티스, 세잔 등 19세기에 활동했던 화가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원근법을 고수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고전 미술은 유럽의 시대정신에 의해 붕괴된다. 시민혁명과 민주주의, 독립적인 예술가 의식은 사실주의를 탄생시켰다. 그 와중에 혁신을 위해 과거로 회귀해 라파엘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라파엘전파(前派)라 불리는 화가들이 생긴다. 언젠가 영화에서 봤던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중 하난데, 서양 미술사에서 차지한 라파엘전파의 의의보다 내가 아는 화가 이름이 나왔다는 게 더 뿌듯하다.  


인상주의는 사물을 '보는 방식'에 일어난 혁명이었다. 색이란 빛과 대기가 만들어내는 효과라는 것이 모든 인상주의자가 공유하는 공통의 신념이었다.


인상주의는 '색은 곧 빛'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나마 내게 익숙한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가 그리려 한 것은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망막에 비친 사물(혹은 인물, 풍경)의 주관적 인상이다. 대상의 세부적 묘사를 포기한 인상주의자들의 화면은 색채의 효과가 형태의 묘사를 압도해버린다. 인상주의자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포착하기 위해 야외에서 마치 스케치하듯이 그림을 그렸는데, 먼저 칠한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다른 색을 칠하는 알라 프리마 기법이 사용되었다.  


모네가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그림을 그렸다는 건 TV에서 하는 강의를 보다 우연히 알았다. 왜 그의 ‘연못의 수련’ 그림이 후반부로 갈수록 뭉개지며 점점 추상화처럼 되어갔는지 알겠다. 인상주의자들은 어찌 보면 현대 추상화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한 선배들이었다.


「목욕하는 여인들」을 자주 그린 르누아르와 무용하는 소녀들 그림으로 유명한 드가가 인상주의 사조에서 어떤 의의를 갖는지도 흥미롭다. 순간적 장면을 포착한 점을 제외하면 드가는 사실주의자에 가까웠고, 르누아르는 모네와 더불어 인상주의 화풍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지만 이탈리아 여행에서 르네상스 거장들의 걸작을 보고 온 후 규율 잡힌 형식으로 돌아간다.


후기 인상주의는 외부 사물의 인상(impression)이 아니라 화가 내면의 정서적 표현(expression‎)이 드러난 작품이 많다. 고흐의 그림은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나 카페테라스의 풍경을 그린 게 아니라, 그의 내면의 격정을 표현했다는 해석이 타당하다. 고갱이 현대 미술의 선구자가 된 것은 추상화에 가깝게 가시적 현실의 재현을 넘어 비가시적 관념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고흐보다 고갱을 더 쳐주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상징주의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에 반발해 탄생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절규」로 유명한 에드바르 뭉크가 대표적인 상징주의 화가다. 널리 알려진 두 화가의 작품은 (무식한 내가 봐도) 확실히 세상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했다고 보기 힘들다. 예술 작품에 나타난 추상적 표현은 지금의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하지만, 현실과 세상을 비교적 충실히 모사하거나 반영한 19세기엔 작품에 드러난 추상성이 매우 쇼킹했을 거라 짐작된다.


이름은 익숙하지만 작품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 세잔이 이렇게 위대한 화가인 줄 또 처음 알았다. 작가가 서술한 세잔의 미술사적 의의는 이렇다.


세잔의 위대함은 미술을 '시각적인 것'에서 '촉각적인 것'으로 바꾸어놓았다는 데에 있다. 선 원근법에 기초한 르네상스 회화는 물론이고, 빛의 효과에 기초한 인상주의 회화는 철저히 광학적 성격의 예술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지각이 시각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정신의 눈이 아니라 몸 전체로 환경을 지각한다. 이렇게 신체로 체험하는 원근법에서는 하나의 장면 안에 다수의 시점이 애매모호하게 결합된 채로 공존한다. 이 촉각적 공간의 도입을 통해 세잔은 500년 이상 지속된 고전 미술의 가장 중요한 규약, 즉 선 원근법을 파괴한다. 현대미술의 선구가 된 입체주의는 세잔 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이 책에서 언급한 수많은 화가들 중 단연 탑이다. 분량도 다른 화가들에 비해 많다. '제재를 넘어서(aller sur le motive) 감각을 실현하라.' 세잔의 모토가 의미하는 것이라 한다. 이토록 중요한 화가인데 그의 그림은 낯설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무지는 이런 식으로 불쑥 드러났다 수줍게 사라진다.  


작가가 알려주는 세잔의 미술사적 의의도 새롭지만, 세잔이 남긴 말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슬프게도 나는 더 이상 천진하지 않다. 우리는 문명화된 존재들이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우리는 우리 뼛속에 고전적 문명의 걱정과 근심을 가지고 있다.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나 자신을 명확히 표현하고 싶다. 천진함을 가장하는 사람들에게는 관학적 유형의 것보다 더 혐오스러운 종류의 야만이 있다. 오늘날 더 이상 천진할 수는 없다. 누구도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온갖 편의로 무장한 세계 속에 들어왔다. 편의는 예술의 죽음이며, 우리는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예술은 자연의 그것에 필적할 만한 조화를 갖고 있다. 예술가가 항상 자연보다 열등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보다. 예술가는 자연에 필적한다. 물론 그가 의도적으로 개입하려 하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예술가의 모든 의도는 침묵이어야 한다. 제 안의 모든 편견의 목소리들을 침묵시켜야 한다. 잊어야 한다. 그러면 풍경 전체가 그의 존재의 예민한 판 위에 새겨질 것이다."


저자가 세잔의 말(or 글)을 인용한 데엔 이유가 있고 (책을 읽다 보면) 맥락상 타당하다 생각하지만, 사실 세잔을 이해하는 건 만만치 않다. 그의 문장이 아름답지만 의미를 완벽하게 파악하진 못했다. 우선 고흐나 드가의 그림을 보다 세잔의 그림을 보면 확실히 낯설다.


이 책의 말미에선, 일본의 판화와 회화가 19세기 유럽(특히 파리)에 새로운 영감의 원천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19세기 후반 유럽 지성계와 예술계에 느닷없이 일본풍을 유행시킨 자포니슴(japonisme, 일본주의)은 생각보다 꽤 강력했다. 모네와 마네, 르누아르, 드가, 심지어 세잔과 고흐까지, 이 대가들의 작품에 일본풍의 영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당시 유럽 예술가들을 매료시킨 일본 작품은 지금 보니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조악하고 만화 같은 것도 많은데, 어째서 이런 게 대유행이었는지 모르겠다. (왜색을 싫어하는 나의 개인적 취향과 반일 감정이 반영된 의견이다).


더 놀라운 것은 자포니슴이 이렇게 광범위하고 강력하게 유럽 예술계에 영향을 끼쳤는데도, 내가 받은 미술 공교육에선 전혀 이런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통틀어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미술 수업을 받았는데, 자포니슴은 금시초문이다. 분명 그들은 수업을 했는데 내가 불성실한 학생이라 놓친 것인가. 미술 교과서 어디에서도 자포니슴이란 용어를 본 기억은 없다. 의도적으로 교과 과정에서 누락시킨 것인가. 아니면 그런 것쯤은 서양 미술사에서 다루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비중이 작다고 여긴 것일까. 반일 감정으로 자포니슴을 무시하기엔 너무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못마땅하면서도 안타깝다. 이렇게 놓치거나 잘못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 어디 한두 가지일까. 책장을 덮으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 몰랐는데, 아무튼 이 책은 생각보다 재밌고 인상적이다. 저자가 쓴 서양미술사의 다른 파트 『고전예술』, 『모더니즘』,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도 서둘러 읽어보고 싶다. 그동안 몰랐던 인상적인(?) 역사적 사실이 또 홀연히 드러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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