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New Rhetoric of Richard Rorty
Question -
Richard Rorty가 현대에는 “new rhetoric”이 필요하다면서 그것은 “낭만주의 시와 사회주의 정치”에서 많은 것을 끌어와야 한다고 했는데 그 의미가 무엇일지, 여러분의 생각을 자유롭게 서술하시오.
God’s suicide note
나는 이 세계를 하나의 실험을 위해 창조해냈다. 바로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 피조물들이 완벽하게 증명해 줄 수 있는지 확인하는 실험이었다. 내심 나를 찾아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어찌됐든 나는 수많은 생명들이 부대끼며 살아가고, 자신들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을 설계했다. 하지만, 제약을 하나 두었다. 어떤 생각을 하든,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도록 설정해 놓았다. 실험은 시작되었고, 인간들은 예상한 대로 나에 대한 것들을 하나하나 연구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한계를 딛고, 인간들은 기록이라는 발명과 토론이라는 행동을 통해서 자신들만의 체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들의 발전을 두 눈으로 지켜봐 온 나로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찬란한 발전들 중, 인간들은 과학이라는 분야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나에게 한 걸음 다가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내 실체를 볼 수는 없지만 그들은 나를 원했고, 나를 조금씩 파헤치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자신들의 실험을 믿었으며, 그로부터 나오는 결과들을 무한정 신뢰했다. 이런 식으로 나는 항상 존재했으며, 어떤 때는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때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했다. 그리고 내 실험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사랑스러웠다.
이 창조물들을 보며 나는 흡족했고, 이 사람들의 목적이 내가 된다는 사실은 내가 이 실험실에 더욱 애착을 가지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사실상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이 세계에 나는 애착을 가졌고, 나의 존재 이유는 이 사람들에 의해서 조금씩 증명되고 있었다. 심지어 나에 대해서 탐구하지 않는 것들조차 과학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정당성을 얻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나를 찾아오는 길은 모든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간들은 나에게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 명이 말했다. ‘우리는 이제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 말을 기점으로 나를 위한 탐구들은 하나 둘 줄어들었고, 어느 새 자신들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들 안에 신이라는 절대자는 자리잡고 있지 않은 듯 했다. 오로지 자신들의 내면세계에 집중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내곤 했다. 나로 인해 살아가던 사람들이 점점 자신 내면의 무언가를 찾아간다는 사실은 나에게 크나큰 배신감으로 느껴졌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 또한 바뀌어 갔다. 사람들은 점점 자신들의 살아가는, 해석하는 것들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나에 대한 탐구가 지배적이기는 했지만 나는 이걸 용납할 수 없었다. 불순물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은 있어서는 안됐다. 결국 사람들은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과학이라는 방법을 다시 사용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누군가 말했다. ‘과학조차 절대적 사실을 표명한다고 할 수 없다’. 이 말이 인류사회에 꽤 잘 먹힌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른 가치를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나는 점점 혼자가 되기 시작했다. 상실감이 내 몸을 지배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기력하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것들이 나를 떠나는 기분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니. 나는 전능한 존재가 아니었구나.
나 자신의 증명은 이 사람들로 인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찾아 주길 원해서 나는 이 인간들을 만들어냈고, 과학이라는 수단을 이용해서 나에게 이 모든 세계가 다가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를 찾아내는 방법이 절대적인 지위를 잃어버린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고,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알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계로 눈을 돌리는 순간, 나를 찾으려는 사람은 줄어들 것이라는 것을.
끝없는 시간 속에서 나를 찾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갈 바에는, 나는 더 이상 살아가지 않으려고 한다.
2086.
God , The Absolute Truth.
‘신의 유서’는 Richard Rorty의 실용주의적 관점이 제시되는 광경을 ‘Absolute truth’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위 글에서 진리를 신이라는 개념으로 치환하고, 인격을 부여하였다. 진리는 자신이 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내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알아주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과학에 대해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하루하루 자신에 대한 정보들을 알아가는 인간들에게 깊은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낭만주의로 인해서 사람들은 거룩한 것에 대한 표현보다는 자신의 내면세계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에 신은 불안을 느끼게 되고, 점점 공동체와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는 인간들을 보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물론 과학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너무 극단적인 생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인간에 대해서 가지는 애착이 강했기에 저런 극단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한다. 결국 사람들이 공동체와 자신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며 진리에 대한 극단적 믿음이 약화됨에 따라, 진리는 자신은 더 이상 절대자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생을 마감한다.
신의 유서에서의 묘사와 비슷하게, 과학은 사람들에게 거의 신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다. 신의 모습을 한 꺼풀 벗겨내 알게 된 사실이라는 개념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는 하늘 높은 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맹목적인 믿음 속에서 Richard Rorty라는 실용주의자는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저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해댈 뿐이며, 우리가 실제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실생활의 삶에는 녹아들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한 인문학에 대해서 말이다.
이 인문학은 신에게 다가갈 수 없는 실패한 학문이었다. 신은 철저한 논리와 사실들로 무장해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과학은 믿을 수 있었고, 실생활에 그만큼 유익한 것이 없었다. 우리의 인식이 아닌, 그 자체로 존재하는 진리라면 틀릴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논리적으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객관성과 진실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신에게 다가간다. 그것이야 말로 신에게 복종하는 방식이다. 진리는 자신이 만든 논리대로 흘러가는 세계를 보며,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이 실험구에서 찾았을 것이다. 이 세상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세계라는 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을 것이다.
신에게 다가가는 길목을 차지하지 못한 인문학은 과학의 발끝이라도 따라가기 위해서 사실들로 무장하기 시작한다. ‘사회 과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논리와 사실을 다루는 것처럼 포장을 하기도 하고, 실제로 과학의 방법론적인 것들을 채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인문학은 신에게 다가가는 길목에 설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인문학은 다른 신을 향해 다가가는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논리신이 창조해낸 개념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문학은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위 글에서 화자인 신은 다른 분야에 과학이 붙어 정당성이 확보되었다는 그 사실에 흡족해 한다. 결국 인문학은 ‘다른 분야’라는 두 단어로 뭉뚱그려질 수 있을 정도의 상태라는 느낌을 살려보고 싶었다.
이 때문에 Rorty는 과학의 자리를 인문학으로 대체하려 하는 대신, 또다른 신을 창조하고자 했다. 그리고 각자의 신을 찾을 수 있도록 과학과 인문학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공동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벤치를 준비했다. 인문학이 공동체에서 가지는 의의를 찾고, 인문학이 자신만의 신을 찾을 수 있도록 길을 만들었다. 과학 또한 논리적이기만은 할 수도 없다는 말과 함께 과학의 우상을 깨 버림으로써 극단적으로 신격화된 위치에서 끌어 내렸다. 결국 “Science as Solidarity” 한 편의 글에서 그는 새로운 신을 창조하는데 성공한다. 실용주의적 관점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이들이 모두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우리의 문화 속에서 모든 신은 더 이상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밀착되고 긴밀히 연관된 신으로 둔갑한다. 심지어 진리신까지도 말이다.
이처럼 Rorty는 과학과 인문학, 사실과 가치의 경계를 모호하게 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의 기준들보다는 새로운 기준을 정립함으로 앞으로 나아가자는 취지이다. 이 새로운 기준은 ‘모든 것은 그 사건이 일어나는 공동체 안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라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결국 우리 삶에 밀접히 연관된 개념으로 이성적, 논리와 같은 단어들의 의미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표현한 뒤, 낭만주의와 사회주의 정치를 언급한다.
낭만주의를 표현하는 수많은 문장들이 있겠지만, ‘우리 본연의 것을, 우리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자!’라는 문장에서 끌어와야 할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첫째로 인문학이 자신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는 관점에서 살펴보게 되면, 인문학의 본래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과학이라는 신에 밀려 자신 본연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과학’이라는 단어나 붙이고 있었으니, 자기 자신의 의미를 찾기 힘든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결국 낭만주의의 생각처럼, 인문학의 본연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야 다른 분야의 지식들과 원활한 의견 공유가 이루어지고 담론이 형성될 것이다. 또한 이 문장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도 적용되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솔직히 표출함으로써 자유로이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전제 조건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절대적 과학의 기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견 또한 계몽주의를 비판하는 낭만주의의 관점과도 유사하다.
사회주의 정치에서 찾을 수 있는 문장은 ‘우리는 최고의 민주주의를 향해’ 였다. 굳이 정치라는 관점을 제시한 이유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사회민주주의라는 사상이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민주주의를 통해서 더욱 좋은 사회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상이었다. 그 기저에는 평등과 자유라는 개념이 깔려 있다. 학문의 영역에서 본다면 모든 학문이 자신들만의 개성을 추구하면서 발전하지만 어떤 학문도 다른 학문들보다 우위에 설 이유가 없으며, 모두 동등한 입장에서 토론을 하고 입장을 나누며 섞여야 한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개인들의 영역에서 본다면 모두의 의사소통을 통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하나의 문화 안에서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민주주의의 가치가 전제되는 공동체를 바라는 Rorty의 생각과도 비슷하다고 여겨졌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낭만주의도, 사회민주주의도 어떠한 사상에 반기를 들고 나온 사상이라는 점이다. 물론 하나의 사상이 태동하는 데에는 보통 비슷한 맥락이 함께하지만, 나에게는 이 두 가지가 탄생하게 된 이유가 Rorty가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의 폐허 위에서 시작되었고, 사회민주주의의 근본인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가정으로 시작되었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절대적인 가치들이 무너지고, 그 후에 태동한 사상들이라는 사실은 Rorty가 기존의 상식들을 무너트려야 한다고 주장한 모습과 유사한 느낌을 받게 한다. 어쩌면 낭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서 가져올 것들 중 하나가 기존의 지배적인 체계에 대한 의심 아닐까.
결국 Rorty는 모두가 자신의 내면의 생각들을 자유로이 말하고, 차별 없이 서로의 생각이 공유되며 그 담론 안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사회를 바랐던 것 같다. 그렇기에 낭만주의와 사회주의 정치에서 아이디어를 끌어와야 한다고 말을 했다. 자신의 내면을 표출할 수 있는 조건과, 그 표출된 생각들이 차별 없이 논의될 수 있는 세상의 조건은 이 두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사상의 상징성을 본다면, Rorty는 지금의 세상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과학이 지배하는 체계를 무너트리고 다른 학문과도 공동체 발전을 위해 교류하는 모습을 꿈꾸었지만, 그렇지 못한 세상을 보고 ‘바꾸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결국은 혁명의 느낌을 가지고 있는 두 사상에서 아이디어를 끌어오고 싶어했던 것이 아닐까. 정리하자면, 이 둘에게서 많은 것을 끌어와야 한다는 의미는 앞서 말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모두가 평등히 말할 수 있는 조건들을 이 두가지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Pragmatism을 통해서 상반되어 보이는 두 단어의 벽을 허물고자 하는 아이디어는 내게 있어 쉽게 다가오는 생각은 절대 아니었다. 두 표현의 의미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했을 것이고, 이 두 가지의 벽이 어떻게 허물어질 수 있고 같은 영역 안으로 편입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또다른 고민을 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도는 어느정도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확한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사상과 관련 있는 낭만주의와 사회주의 정치체계에서 많은 것들을 끌어와야 한다는 문장과 함께 사람들이 고민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한 지점 이외에도, 수많은 생각들이 낭만주의와 사회주의 정치체계에 대한 사상으로부터 응용될 것이다. 이는 결국 이런 벽을 허물고, 진리의 이름을 가진 신이 유서를 쓰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