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체리 May 27. 2023

정신머리를 찾아서

아직 살만해서 다행인 세상

 

 뭔가를 잃어버린 경험이 많지 않은 나. 그래서 나에게는'보기에만 정신이 없지 사실은 정신머리를 단단히 붙잡고 사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작년에 썬글라스를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프랑스, 더 나아가서 유럽의 치안은 꽤나 악명 높다. 나도 크게 당한 적은 없지만 여행 오는 친구들에게 꼭 조심은 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프랑스에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 세 번이나 잘 찾아온 경험이 있어서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일말의 희망과 최후의 인류애를 사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왜 나와 다니엘의 물건들이 무사히 주인을 찾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짚이는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다만 그래도 없어지면 여간 난처하지 않은 물건들을 되찾은 경험들이 아직도 기쁘고 감사하다.

- 우산 (되찾기 난이도 ☆☆☆☆★)
 꽤 자주 가던 피자집에서 잃어버렸다. 당시 13구 근처의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행복하게도 혼자 먹는다고 해서 눈치가 보이는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혼자 여기저기 많이 쏘다녔다. 그래서 돌려받은 것 자체가 신기하거나 별난 일은 아니다. 다만 내 딴에는 아끼던 과일 무늬 우산이라 혹시 누가 이미 가져갔을까 봐 지레 겁을 먹었다. 주택가에 있는 단골들이 많은 피자집이라 더욱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던 것 같다. 당시까지만 해도 불어로 갑자기 대화를 시작하는 것에 겁을 많이 먹었었다. 그런데 아저씨가 우산 잘 가지고 있으니 걱정 말고 내일 찾아가라고 사람 좋게 말해서 안심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피자집은 13구에 있는 L'Atelier pizza인데 사장님이 정말 친절하고-우산을 찾아줘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격도 꽤나 괜찮아서 점심을 먹기에 좋은 데다 손님들도 유쾌하지만 미친듯한 맛있음은 아니기 때문에(평범하게 맛있다) 가까이 사시고 피자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추천하지만 굳이 지하철을 타야 하는 거리에서 찾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 코트 (되찾기 난이도 ☆☆★★★)
 이것은 내가 아니고 다니엘이 잃어버린 품목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짐작하시는 바처럼 그는 매우 취해 있었다. 다니엘은 르망에 사는 직장 친구 에띠엔을 만나러 놀러 갔다. 에띠엔이 잠시 우리 고양이를 맡아주기로 해서 오닉스를 데리고 르망 집으로 가는 김에 에띠엔  집에서 자고 오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흥분상태로 축구를 보다가 그만 코트를 까맣게 잊고 귀가한 것이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서 그게..잊어버려지나..? 싶었지만 아마 몸에 열이 많아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좀 더 젊을 때만 해도 다니엘은 너무 열이 많아서 겨울에도 여름 양복이 아니면 코트 속에 입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음날 아침 바는 (당연히) 닫혀 있어서 코트의 행방을 물어볼 수도 없었고, 르망은 우리 집과 기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여서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저녁에 다시 오지 뭐, 할 수 있는 수준의 거리가 아니었다. 결국 다니엘은 한겨울에 코트도 없이-이날은 코트가 있어도 매우 추운 날이었고- 집에 온 후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다니엘은 코트는 없어져도 주머니에 있는 카드는 절대 안 돌아올 거라면서 태산같이 걱정을 했는데 나는 오히려 걱정이 되지 않았다. 10시 즈음에 집에 왔다면 모를까 새벽 몇 시가 되어서야 집에 온 마당에 그 바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남의 코트를 신경 쓸 만큼 정신머리가 남아있을리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니 나는 잃어버린 코트가 어디 구석에서 치이다가 바텐더 손으로 넘어갔을 거라 추측했다. 카드는 나도 확신이 없었지만. 게다가 코트가 좋은 물건이고 다니엘에게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우리가 더 젊었던 시절 일본에서 산 이래로 겨우내 하루도 안 빼놓고 입는 물건이니 아무리 견물생심이라지만 누가 집어가고 싶어질 만큼 상태가 좋은 옷은 아니었다. 내가 너무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에 차 있어서 다니엘은 서운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추측처럼 코트는 무사히 에띠엔 손에 들어간 후 다시 다니엘에게로 돌아왔다. 하필 이 기간 동안 에띠엔이 휴가를 가는 바람에 다니엘은-나는 아직 백수였던 시기라서 가능했음- 내 롱패딩을 입고 회사에 다녔다. 뭘 잃어버린 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이 기간 동안 다니엘은 그동안 그렇게도 싫어하던 패딩 코트를 좋아하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내 롱패딩을 입고 다니는 다니엘에게 단골 식당 주인도, 직장 동료들도 잘 어울린다면서 칭찬을 했다. 그래서 나는 술도 안 마시고 집에서 가만히 있다가 유일한 롱패딩을 반쯤 뺏기는 신세가 되었다.

-썬글라스 (되찾기 난이도 ☆★★★★)
 이것은 작년 여름에 다니엘 외할아버지의 아파트가 있는 라 클루자에 놀러 갔다가 잃어버렸다. 여름에 알프스라니, 겨울에 갔을 때도 처음 가보는 알프스에 심취했지만 여름에 가는 것은 더더욱 기대가 되었다. 게다가 여행 가기 전에 다니엘이 썬글라스를 새로 사줘서 매우 신나는 여행의 시작이었다. 당시에 우리는 할아버지 아파트에서 가까운 Patrick Agnellet이라는 제과점에서(라 클루자에 가시면 디저트 좋아하시는 분들은 꼭 들러보셨으면 좋겠다. 케이크도 맛있지만 초콜릿, 마카롱, 하다못해 쿠키까지 빠지는 데가 없었다) 꾸덕꾸덕한 쿠키를 두 개 사서 리프트를 타고 산 위로 올라가 트래킹 코스를 따라 걷다가 쿠키를 먹고 내려와 아파트로 돌아오는 일정을 고수했다. 그날의 트래킹은 약간 실패해서 슬프게도 재개발 뷰를 구경하며 그루터기에 앉아 쿠키를 먹었었다-우리는 산 중턱에 개발 물결이 이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16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썬글라스가 없음을 눈치챈 것은 21일이었다. 나는 산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것도 선물 받은 선글라스를 개시하자마자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깊이 실망했지만 17일부터 20일까지 비가 와서 우리도 우비를 입고 나갔다가 얼마 안 걷고 돌아왔다는 사실에 약간의 희망을 품었다. 등산로에 평소보다는 사람이 적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1일부터 날씨는 매우 쨍쨍해졌다. 그리고 22일 나는 다니엘을 조르고 잘라 집에 가기 전날 마지막 트래킹을  시작했다.  다니엘은 일단 썬글라스가 그 자리에 없을 게 뻔하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게다가 집에 가기 전 마지막 산행이 망한 재개발 뷰 코스 재탕이라는 사실에 상당히 분노했다. 그럴 만하다.

 16일과 완전히 똑같은 경로로 걸어갔을 때 우리가 쿠키를 먹었던 그루터기 근처에는 썬글라스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깊이 실망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이때부터 분노보다는 약간 짠함을 느끼며 '그래,, 어차피 망한 거 직성이 풀릴 때까지 해봐라'라는 심정으로 도와주었다. 나는 케이블카 사무소에도 없으면 진짜로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중턱 정거장 사무소 사람이 며칠 전에 들어온 썬글라스가 있다는 거다. 아저씨가 손으로 썬글라스 모양을 만드는데 끝이 치켜올라간 모양이 내 것과 같았다. 그래서 나는 되찾은 희망에 전율하며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갔다. 입구 케이블카 정거장에 내리자마자 처음 보이는 사람에게 썬글라스의 행방을 물어봤더니 그런 물건은 안 들어왔단다. 다니엘이 저기 중턱에서 만난 사람이 여기 오면 있다던데?라고 되물으니 그는 그제야 아, 그거라면 어제 들어온 게 있다면서 내 썬글라스를 내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여름의 알프스에서 새로 산 썬글라스를 무사히 되찾을 수 있었다. 그다지 흥분하는 일이 없는 다니엘도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냐면서 너는 정말 운 좋은 줄 알아야 한다고 펄쩍 펄쩍 뛰었다.

 아마 우리가 처음부터, 쿠키를 먹은 그루터기를 찾아가지 않고 중턱 사무소 아저씨한테 물어봤더라면 아저씨는 제대로 상대해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일단 잃어버린 지점까지 다녀와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처음부터 입구 쪽 사무실에 갔다면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저씨가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순순히 포기했을 거다. 사무실에 따라갔던 다니엘 말로는 사무실에 분실물 박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책상 위 빈자리에 대충 놓여 있었는데 그 공간이 별로 넓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17일부터 비가 오지 않았다면, 날씨가 맑아 더 많은 사람들이 밖에 나왔다면 내 썬글라스는 더 일찍 발견되어 더 늦게 발견된 분실물들에 밀린 나머지 잘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밀려났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썬글라스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진작에 눈치챘다면. 하루 뒤에 눈치챘다면! 그때는 아직 썬글라스가 분실물로 들어오기도 전이라 그냥 잃어버렸다 생각하고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의 썬글라스는 잘 쌓인 우연들을 징검다리처럼 밟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체 누가 썬글라스를 찾아 친절하게 1시간 떨어진 케이블카 사무소까지 가져다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귀찮았을 텐데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동안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갑자기 프랑스도 사람 사는 곳이고 너무 겁먹지 마시라는 글처럼 되었는데 그것은 내 의도와 전혀 무관하다. 내가 어쩌다 운이 좋아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긴 했지만 이런 희귀한 케이스 때문에 너무 안도하지 마시고 평소처럼 바짝 가방을 지키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셨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선의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에 세상은  험난하고 우리의 소지품은 소중하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번갯불에 구운 어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