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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 Jun 10. 2023

여긴 에어컨 못 놓죠?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몇 년인가 전에 파리에서 자기 친구 집을 방문한 내 (아시아인) 친구가 SNS에 이런 글을 올렸었다. '오늘 나는 프랑스 생활 처음으로 정상적인 냉방 시스템과 비데를 갖춘 집을 방문했다. 집주인은 건축가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다니엘과 살게 될 집을 보러 다니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집의 조건은 아래와 같다.

- 소음이 너무 크지 않을 것, 즉 너무 큰 길(2차선 도로)을 바로 정면에 두거나 너무 큰 상점가를 낀 거리에 위치하지 않을 것, 층수는 도로와 약간 떨어져 있을 것, 이웃과 너무 많은 벽을 공유하지 않을 것, 벽이 어느 정도 두껍거나 소음 방지를 염두에 두고 건축되어 있을 것, 위층에 이웃이 없는 마지막 층이거나 조용한 이웃들을 두고 있을 것


-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을 것. 다니엘은 지금 사는 동네를 조금은 떠나고 싶어 했다. 학생 때부터 꽤 오래 산 동네이니 이해가 된다. 나는 이곳이 프랑스에 와서 살게 된 첫 동네이고 이미 익숙한 도시를 한 번 떠나왔는데 한 번 더 큰 이동을 하고 싶지는 않고 이 동네에 '집'이라는 애착이 있어 이동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한 번 이사를 했고 그동안 마음에 드는 정육점, 생선가게, 자주 찾는 식료품점 등을 찾아낸 결과 다니엘도 지금 사는 곳에서 너무 멀어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1제곱미터당 가격이 다른 구 대비 그렇게 높지 않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한몫했다)


- 거실은 그렇게 크든지 말든지 대단히 중요하지는 않으나 침실이 2개 딸린 집일 것. 화장실을 가기 위해 메인 침실을 거칠 필요가 없는 집일 것. 이 점도 매우 중요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집은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무조건 침실을 거쳐야 하는 구조라서 손님들이 밤늦게까지 있기 힘든 구조일 뿐 아니라 친구들이 여행을 오면 선뜻 우리 집에 초대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소파베드만 있었어도 좀 나았을 텐데 문이 너무 작아서 (작지도 않지만) 구조상 소파베드를 설치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들은 후 집 크기에 맞는 중간 사이즈 소파만 놓고 살았기 때문에 운이 좋아 손님이 150cm 미만이라 소파에서 잘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거실 테이블을 치우고 에어매트리스를 놓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방법 역시 침실에 비해 거실이 좀 더 밝아 조명에 민감한 사람은 고충을 겪을 거라는 단점이 있다. 자기 전 불을 끈 후에도 인터넷 모뎀 불빛이며 냉장고 계기판 조명은 꺼지지 않는 데다 (거실의 일부인) 부엌 창문에는 셔터가 안 달려있기 때문이다. 대학생 시절이라면 보통 혼자 여행들을 왔기 때문에, 또 다들 젊은 몸이라 어디에서 어떻게 자든 크게 상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걸로 충분했을지 모르나 이제 서른이 넘은 우리의 몸은 편안함의 맛을 알아버렸다. 그리고 혼자 오는 친구보다 누군가와 동반으로 파리를 찾는 친구들이 훨씬 늘어났다. 초대받는 쪽도, 초대하는 쪽도 편안한 마음으로 주고받으려면 이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한국에서 오는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은 마음도 물론 강했지만 프랑스에서도 거의 주변에 신세만 졌기 때문에 이젠 좀 주변 사람을 챙기고 대접하고 싶다는 마음도 강했기 때문에 이 기준이 꽤나 중요했다.


- 2층 이상,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일시 4층을 초과하지 않을 것. 다니엘과 처음 살았던 집이 엘리베이터 없는 6층 건물에 있었다(한국 기준 6층). 다니엘은 운동도 되고 좋다면서 엘리베이터가 없어도 높은 층수도 염두에 두자고 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지금 당장은 어떤 계획도 없지만 가족계획을 100퍼센트 배제한 것도 아니다. 만삭이 된 몸으로 엘리베이터 없는 6층 탑을 오르다니, 여름이면 에어컨도 없는 이 도시는 40도가 훌쩍 넘어가는데 그 더위에 6층을 오른다고? 재미없는 농담인가? 나는 극렬히 반대했다. 한국에 살 적에도 엘리베이터 없는 5층에는 살아봤지만 나는 그때 대학생이었고 임신의 가능성 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후보는 4층 이하로 좁혀졌다. 1층은 너무 어둡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창문 밖에서 안을 기웃거리는 것이 너무 싫기 때문에 각하되었다.


- 지하철역에서 너무 멀거나 출퇴근이 지나치게 복잡해지지 않을 것.


- 해가 들어오는 집일 것. 이 부분은 지금 사는 집이 해가 전혀 들어오지 않는 집이다 보니 지금보다 더 많은 햇살을 누리며 살고 싶은 마음으로 적었다.


- 이웃집 사정을 너무 빤히 알 필요가 없는 집일 것. 이 항목은 파리에서 집을 찾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타협하게 되는 항목이다. 거의 대부분의 집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지어졌기 때문에 결국 집안의, 2개 이상의 창문이 이웃집과 마주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아파트들은 그나마 사정이 낫고 사이에 놓인 것이 건물 내 중정이라면 훨씬 더 가까워서 알고 싶지도 않은 것들을 많이 알게 된다. 이것을 vis-à-vis(비자비라고 발음)가 있느냐 없느냐로 표현하는데 이 비자비에서 자유로운 집이 아주 없지는 않겠으나 우리 예산에서는 어렵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위의 조건들이었지만 내 마음속에 중요했던 조건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에어컨이었다. 에어컨 설치가 파리에서만 어려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파리에서는 굳이 물어볼 가치도 없을 정도로 더욱 불가능에 가깝다. 에어컨 설치는 주로 실외기가 외부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아파트 입주민 조합이나 관리사무소 차원에서 금지당하고, 가장 위층에 사는데 지붕 시공이 엉망이라 여름을 나기 힘들 정도로 더움을 입증할 수 있고 옥상 구조가 실외기를 외부로 드러내지 않을 만큼의 조건을 충족시켜 건물 외관을 해치지 않을 것이 확실한 경우 등의 제한적인 경우에만 시공할 수 있다. 사무실이라고 해서 무조건 에어컨이 있는 것은 아닌데 실제로 내가 근무했던 직장 한 곳에는 에어컨이 없었고, 행정 업무를 보러 관공서에 갔을 때도 에어컨이 없어 직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최근에 지어진 새 건물은 그나마 가능성이 더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것도 녹록지는 않을 것 같다.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기에 나도 집을 보러 다닐 때 에어컨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딱 두 번, 건물 외벽에 실외기가 붙어있기에 이곳에서 에어컨을 허용하는지 물었을 때와 건물이 (내 눈에는 / 70년대 건물이었다 / 파리에서는 20년대 건물도 현역이다) 나름대로 현대적으로 보인 나머지 헛된 희망만큼이나 헛된 헛발질을 했을 때 두 번뿐이다. 그것 때문에 집에 와서 다니엘에게 혼이 나긴 했지만.. (구매에 진지하다는 인상을 줘야 하는데 파리에서 에어컨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만으로 진지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 부동산 사람도 뾰족한 답을 줄 수는 없을 것이므로)

 사정을 들은 친구들과 가족들이 창문형 에어컨이라는 대안을 제시했지만 샤시 모양이 다르고 창문이 미닫이 형식이 아니라 고정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애초에 내 의문을 들은 프랑스 사람들이-부동산 사람들- 주로 제시하는 대안이 냉풍기(얼린 물통 같은 걸 넣어서 찬바람을 내는) 아니면 선풍기인 것을 보면 이 사람들이 얼마나 에어컨을 대안 취급도 안 해주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파리보다 훨씬 에어컨이 필요한 남부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에어컨 설치가 녹록지 않음을 호소하는 글이 종종 올라온다. 단독주택에 살면 이런 문제가 많이 해결되지 않을까 싶지만 단독주택에서의 삶이란 곳 지금 사는 동네를 떠나야 할 뿐 아니라 교외로 나가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상당히 늘어난다. 결국 에어컨을 향한 마지막 한줄기의 집착마저 내려놓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몇 년을 집착하건 유의미한 소득이 없을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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